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정진원]마음속의 청산 청계산과 청계사

안양똑딱이 2017. 3. 18. 18:22

청계산(淸溪山)은 어릴 적 우리들 마음속의 청산(靑山)이었다. ‘살어리랏다’ 청산이었다. 나무와 풀들과 온갖 덩굴들이 어우러져 숲이 되고, 숲이 수해를 이루어 우리들은 파도를 타듯이 울렁대는 수림 위에서 자맥질했다. 아니 운해가 되어 스펀지 구름 위에서 텀블링을 하듯이 했었다.

아프리카에만 따로 밀림에 타잔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너구리나 고라니만 우리와 아주 다른 산짐승이 아니었다. 머루랑 다래랑 널려 있었다. 우리들은 청산에 청사슴이 되어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아니면 그곳에 청벌레가 되어 나뭇잎 뒤에 붙어 있어도 좋았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푸른산에 살고 싶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푸른산에 살고 싶다.

                「청산별곡(靑山別曲)」첫 연


청계산 깊숙한 속에 청계사 절이 있었다. 한직골, 새말, 토굴, 하ㆍ중ㆍ상청계를 지나 올라가면 골짜기 끝, 망경대 밑에 청계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규모와 꾸밈에 있어서 요즘 사람들 눈으로 보면 대단한 절도 아닐 테지만 그곳은 당시 우리들에게는 립 밴 윙클의 산중 소인국이나 되는 것처럼 아주 희한한 곳이었다.

여느 절처럼 입구에 일주문이 있고, 천왕문-불이문 뒤에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귀 승방 툇마루에서 올려다보면 극락전이 상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자주 청계사로 소풍을 갔었는데 우리들은 그 마당에서 노래자랑을 벌이곤 했었다. 극락전 옆 동산 쪽에는 산신각인가가 있었고, 그 뒤 언덕에는 조릿대가 여기저기 모여 자라고 있었다.

대개 그렇듯이 청계사는 그 절보다 그 가는 길 굽이굽이가 인상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청계사를 가려면 오른쪽으로 청계 개울을 끼고 걸어야 했다. 봄철이면 도롱뇽이 알을 까서 물속에 띄워놓기도 했고, 가을이면 벌써 울긋불긋한 단풍잎들이 골짜기 개울을 덮어서 흐르는 물에 밀려 내려갔었다.

덕장학교 모퉁이를 돌아서 조금 걸어가면 토굴이라는 작은 동네 앞길이고, 거기서 작은 동산을 넘으면 지금은 의왕-과천 도로 터널 입구에 바짝 붙어있는 농굴이 올려다 보였다.

토굴 앞 한길 가에는 서낭당이 있고, 그곳 거무칙칙한 나무 밑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고, 나뭇가지에는 형형색색 헝겊들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옆으로 논 서너 배미 건너에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건너편에 새말, 거기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한직굴이라는 비교적 큰 마을이 있었다.

청계사를 향해서 올라가는 청계 마을 앞길은 완만한 비탈길이어서 어린 걸음으로도 걸을 만했었다. 그러나 상청계를 지나면 집들도 없어지고 인적도 없는 가파른 고갯길이 되어서 어린 우리들은 그곳을 넘을 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청계사에는 할아버지 같은 부처님이 계셔서 무릎을 짚고, 숨을 할딱이면서 올라오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계신 듯하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후유’ 하면 은은한 향내가 솔바람에 섞여서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소풍을 다니던 후로 수십 년이 지나서야 청계사를 다시 보고 싶어서 식구들과 함께 찾아간 적이 있었다. 청계사 바로 밑에 경사가 급했던 오솔길은 온데간데없고, 시멘트 포장길이 절 턱밑까지 나 있었다.

개울물은 오염되어 시퍼런 이끼에 덮여 있었고, 자동차들이 좁은 포장길로 비집고 들어와 걷기조차 마음 편치 않았다. 절 경내에도 조약돌로 만들었다는 전에 없었던 커다란 불상이 어색한 모양으로 누워 있었다.

여기저기 새롭게 손댄 흔적들이 노파가 짙게 화장한 것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무슨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었다. 그것은 사행과 이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속으로 웃으면서 하는 장난이었을 것이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