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미 껌과 갓댐
6ㆍ25전쟁 직후에 우리 마을에 이러한 말들이 어떻게 해서 들어왔는지 잘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헬로우, 기브미’와 ‘갓댐’과 ‘사나나베치’ 등 당시로서는 아주 낯선 방언들이었다. 내 나이 예닐곱 살 때였으니까 누구들이 하는 말이 하도 이상해서 마음속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모국어도 제대로 다 하지 못하는 형편에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이 골짜기 안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미군이 우리 동네까지 진주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맥아더 장군이나 된 것처럼 자랑삼아 인천상륙작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해병대 출신 동네 아저씨가 전해준 것들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헬로우), 손 벌려 달라 하다가(기브미), 못된 놈(갓댐)이라 욕먹는 것에서부터 어린 시절이 시작되었는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군용 도라꾸(트럭), 쓰리코타(쓰리쿼터)들이 신작로의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을 것이다. 동네 조무래기들은 흙먼지와 매연 냄새가 범벅이 된 그 흙 안개 속으로 따라 뛰며 외쳤을 것이다. ‘헬로, 기브미 껌,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코렛!’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차들은 흙 안개 속으로 그냥 사라져 갔을 것이다. 오징어가 뒤로 흘리는 먹물 같은 먼지와 매연을 어린 애들의 얼굴 위에다 쏟아 부으면서 내달렸을 것이다. 그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간 아이들의 외침이 있었다. ‘기브미 껌 기브미 껌!’ 그 가운데 자선의 손을 내밀어 껌 한 통을 찢어 하늘이 내리는 은총처럼 뿌렸을 미군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안개를 뒤집어쓰고 닭 좇던 개 먼 산 쳐다보듯이 오랫동안 서 있었다. 왜 달라는 것에서부터 말을 배우게 되었는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군인은 껌이나 초콜릿은 고사하고 안개 속에서 손을 벌리고 따라 뛰는 아이들을 향해서 ‘갓댐 갓댐!’ 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그냥 속으로만 중얼거리듯이 했을 수도 있다. 원시 토인의 아이들이 새끼 짐승처럼 치근대는 것이 성가시지만 조금은 신기해서, 들릴 듯 말 듯 ‘갓댐 갓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뜻이 아주 엄청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예수를 믿는 우리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뜻이라니, 이보다 더 충격적인 언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기브미’로 손 벌리는 것 때문에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서 삶을 시작한 세대이다. 그런데도 이만큼 되었으니 그 말은 그냥 단순한 귀찮음의 중얼거림이었나 보다.
우리들은 조상, 가깝게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을 가장 큰 부끄럼으로 여긴다. 욕을 해도 부모를 빗대어 하면 더욱 불쾌하게 생각한다. 도라꾸를 따라 그 안개 속을 뛰면서, 차 뒷전을 잡아 뛰어올라가려고 하면 그들은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사나나베치 사나나베치’ 그 말뜻을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말로 ‘×자식’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을 ×새끼만도 못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개들은 도라꾸에 기어오르면서 ‘기부미 껌’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그 도라꾸와 그것이 내뿜는 안개 속에서 오리무중 향방을 잡지 못하고 뛰고 있다. ‘기브미 달러, 기브미 유에스 아미, 기브미 뉴클리어 언블레러’를 연발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그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뛰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전에 배운 ‘사나나베치’를 웅얼대고 있는가. 중국 오지나, 서남아 아라비아나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헬로우’와 ‘기브미 껌’들을 만난다. 지겹도록 치근대며 따라붙는 ‘기브미 원 달라’들을 밥상 위의 파리 쫓듯이 따돌리고 우리들만의 즐거움을 즐긴다. 비교우위의 안락의자에 앉아 그들을 향해서 ‘갓댐. 갓댐!’ 하려다가 문득 6ㆍ25전쟁 직후 산골 동네의 내 모습을, 내 허망한 눈망울을 그들에게서 발견하고는 여행은 즐거움이 아니라 갑자기 우울한 것이 되었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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