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정진원]1912년 안양에 전기 처음 들어온 기억

안양똑딱이 2017. 3. 18. 17:13

등잔불에서 전등불까지 
 
등잔불. 그것은 따듯하고, 푸근했다. 그 불빛은 지나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못 미칠 것도  아니었다. 디테일한 것은 과감히 소거해 버리고, 아주 대국적으로 사물을 보게 했다.

대서특필(大書特筆)만 돋보기 없이 볼 수 있을 정도의 어스름이었다. 등잔불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사랑방 머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등잔은 대개 백색 자기였다.

뚜껑에는 창호지를 말아서 심지를 박는다. 밖으로 조금 잡아 빼서 끝을 조금 남기고 가위로 잘라낸다. 등잔은 등잔걸이 위에 놓는다. 가늘고 약한 불이어서 콧숨만 조금 크게 내어도 꺼졌다. 켜 있을 때는 있는 둥 마는 둥 했었지만 막상 꺼지고 나면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에 가득했었다.

그러면 됫박 성냥 알을 찾고, 화로에 남은 불씨를 찾다보면 등경이 넘어지고 등잔이 엎어지게 되면, 이것은 삽시간에 경국(傾國)의 위란(危亂)이었다. 순간에 만들어진 카오스, 위기상황이었다.

그 불 아래서 우리들은 책을 읽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셨다. 그 어둠 속에서 바늘은 쉴 새 없이 골무를 뚫고 들어가 엄마의 엄지손톱 밑을 찔렀을 것이다. 등잔불이 켜져 있는 방은 어둠과 밝음의 회색빛 완충지대였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조는 듯 어슴푸레한 공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러한 공간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촛불. 그것은 소리 없는 슬픔이었다. 슬픔은 그 불꽃으로 모여들어 눈물 되어 뒷강으로 흐르고, 긴 한숨 되어 창가에 어렸다. 그것은 흰옷 입고 문득 다가선 여인 같았다. 촛불은 한없는 기다림이었다. 밤새워 쓴 편지를 지워버리는 새벽 불꽃, 지쳐 바랜 하얀 불꽃이었다.

그것은 어둑한 법당 안에서 신음하듯이 가늘게 흔들리고, 크리스마스이브 시골 언덕의 작은 예배당 안에서 춤추듯 팔랑거렸다. 등잔불이 꺼져 반짇고리며 서랍을 뒤지다가 작은 초토막이라도 손에 잡히면 촛불을 켰다.

전깃불이 나가도 초를 찾아 촛불을 밝혔다. 제상 위에, 생일 축하를 위해서 촛불을 켜고, 분위기 그윽한 카페에서 연인 사이의 멋으로 촛불을 밝혔다. 첫날밤 신방에도 촛불을 켰다.

등잔불이 꾀죄죄한 시골 아이라면, 촛불은 예쁠 것도 없는 수수한 산골 처녀와 같았다. 더 맑고 깨끗했다. 어느 때는 조금 슬퍼 보였다. 이따금씩 눈물을 주룩 흘렸다. 그것도 가슴 깊은 데서 나온 뜨거운 눈물이었다.

남폿불. 그것을 남폿불이라 하였다. 그것은 깊은 밤까지 나와 마주 앉아 있었던 다정한 친구였다. 그 깜박거림과 때때로 흔들림의 속내를 나는 알았다. 심지 타는 소리의 속 앓는 소리를 들으면서 동병상련이었다.

남폿불은 램프 등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납작한 유리병에다 석유를 넣고, 마개에 심지를 박아 아래에 있는 석유까지 내린 후에 그 위에다 조롱박처럼 생긴 유리 등피를 씌워서 불을 켜면 등잔불에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환한 것이 좋았다.

등피 안에서 가볍게 흔들리면서 타오르는 불꽃은 밤중 산속 어느 오두막의 유리창 너머에서 움직이는 소녀를 숲속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신기하기까지 했었다. 등피 안에 그을음이 쌓이면 불꽃은 점점 엷어져서 가스등처럼 되었다.

주막에 걸려 있었던 남폿불이 매양 그랬었다. 어릴 때 나는 내 남폿불의 등피를 많이 닦아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등피를 닦으면서 나는 내 의식의 안개를 많이 걷어냈던 것 같았다.  

전등불. 알전구의 차가움, 표변한 뜨거움과 눈부심. 빠르기가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였다. 너무 밝아서 부끄럼이 온 천하에 들어나게 되었다. 적나라함을 조금은 감춰야 했으므로 방마다 휘장을 드리웠다.

‘전기가 들어왔다!’는 말은 새 세상 도래를 알리는 복음처럼 들렸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전등불을 보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안양 고모님 댁에서였다.

천정 가운데 길게 매달려 있는 알전구 하나, 겨우 30촉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등잔불 아래서 책을 읽던 내가 전깃불을 보았을 때는 심청부가 눈을 뜨는 것처럼 그것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문명이 내리꽂는 비수와 같았다. 그 섬광에 눈이 부셨다.

지금도 나는 알전구를 보면 카멜레온을 보듯 눈부심과 차가움을 종잡을 수 없다. 친화와 소원을 가늠할 수 없다. 한참 후에 형광등이 나왔다. 반딧불이 빛이라지만, 그것은 이미 유기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욱 냉습하고 섬쩍지근했다.

언 손을 따듯하게 녹여주었던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의 따듯한 손 같은 남폿불 등피의 체온이 그립다. 누님의 해쓱한 웃음 같았던 서늘한 촛불이 그립다. 그 가운데서도 기름 냄새 났던 등잔불이 가장 그립다. - 정진원 문학박사·수필가

 

정진원(72)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