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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안양똑딱이 2017. 3. 17. 15:02

[조성원]안양초교 운동장의 추억
( 늘 푸른 운동장 )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도밭이었고 천일포도주 공장이 근처에 있었다. 읍내에는 실내에서 모이는 유일한 장소로 영화나 쇼를 보여주는 읍민관이 하나 있었고 실외의 넓은 장소로는 우리학교 운동장이 유일하였다.
우리학교 운동장은 안양의 큰 잔칫상이었다. 송구부가 전국체전을 제패하고 트로피를 높이 들어 올릴 때도 시흥군수의 상을 받고 백일장 상을 받을 때도 모두 그곳이었다. 선거유세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복서로 유명하였던 안양 출신이라는 서강일 선수의 권투 시합도 읍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밑에 드럼통을 깔고 널빤지를 올려 운동장 한가운데서 하였었다.
어디 그뿐이랴. 저녁엔 휘장을 두르고 읍민을 상대한 대규모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였으며 시흥군의 학교들이 다 모여 체육대회가 열리던 때는 장터나 다름없는 흥겨운 한마당이었던 곳이기도 했다. 5학년 때던가 당시로는 너무도 안타까웠던 이승복 어린이를 추모하는 궐기대회가 전 읍민이 모인가운데 행해졌다.
같은 해 10월 덕장이니 삼성이니 군자니 하는 학교들이 다 모인 체육대회에선 만안초등학교가 처음 우승기를 타가는 바람에 분하다할 정도로 애석함을 가졌던 곳이기도 했다. 다채로운 행사로 늘 바쁜 운동장이 비로소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때는 뭐라 해도 가을 운동회 그 무렵이다.
코스모스 하늘거리고 미처 떠나지 않은 고추잠자리가 논둑에 메뚜기를 맴도는 그쯤은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도 덩달아 몽실몽실 피었다. 우리는 구름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지는 않았다. 비만 안온다면 그만이라 했는데 어둑해진 하늘저편엔 어느 참 먹장구름이 지켜 서서 우리를 쳐다보았다.
들뜬 마음만큼이나 겁을 잔뜩 먹은 아이들은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동동촉촉하다가 서편에 일찌감치 떠오른 샛별을 보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봄에는 소풍 가을에는 운동회를 하던 그 시절, 학교터에서 구렁이가 나왔는데 소사아저씨가 일을 내서 제대로 승천을 하지 못하고 서러움의 비가 큰 행사 때가 되면 내린다고 했다. 그 시절의 운동회는 추석대목만큼이나 북적대는 안양 읍민의 잔칫날이었다.
추석이 지나면 거의 보름은 먼지 날리는 운동장에 모여 곤봉을 들고 율동을 하고 기마전 연습을 했는데 새 시장의 장터 신발가게는 그 시절 처음으로 나왔다던 하얀 운동화를 장만하느라고 며칠 전 부터 아우성이었다. 만국기 펄럭이는 그 날. 새벽부터 밤잠 설친 아이들 행진곡 발맞춰 하얀 줄 따라 미리 달리기를 했었다.
파도타기, 삼삼칠 박수 응원에 이어 오재미에 맞아 떨어진 오색 풍선이 날아오르고 딱총소리가 하늘을 가르면 푸른 하늘은 더없이 맑고 높았다. 이 세상에 백군 없으면 무슨 재미로 아니야! 아니야! 청군이 최고야, 바르싸 바르싸 데... 응원 소품으로 만든 반짝이가 닳아 없어지도록 신나게 문지르고 소리 지르던 그 시절의 꿈 소년들.
400미터 계주가 끝나면 한없이 넓기만 한 운동장을 일곱 바퀴 반이나 돌아야했던 1500미터 달리기가 있었다. 율동은 늘 틀려서 제일 늦게까지 남아야했고 달리기는 늘 3등을 면치 못해 공책한권 탄 적 없었는데 그 시절의 아쉬움은 어쩌고 남을 것 없이 지워진 옛 기억 속 작은 잔재가 바람결에 실려 푸른 하늘 속으로 자꾸 날아올라 그리움을 만든다.
한 바퀴를 앞질러 일등을 한 수럭스런 그 아이는 지금도 여전히 잘 달리는가. 그 언젠가 곳을 다녀왔었다. 여느 운동장처럼 철봉대에 그네, 축구골대가 가지런할 뿐 그 시절만큼의 큰 운동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워진 기억으로 추억도 상상이 되는 마당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 속 우리학교 운동장은 당시의 여의도 비행장만큼이나 넓고 하늘같이 푸르기만 하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는 동창이지요.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데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