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안양 병목안행 기찻길옆 '길모퉁이 카페' 추억
(지금도 여전히)
고유란 본디부터 지니고 있거나 그 사물에만 특별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 느껴지는 소중함이다. 고유하여 드물 것 같지만 어느 것이든 또 누구나 다 그런 특별의 것을 최소 하나씩은 지녔다. 요즘은 어느 것에 쓰던 알리는 이름들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길가에 펼쳐진 간판은 참으로 다채롭다.
어느 것은 구수하고 어느 것은 산뜻하여 날아가는 새가 연상되고 또 어느 것은 파란하늘에 우수를 자아내어 지닌 고유함을 느낌으로 전한다. 얼마 전 보았던 횟집 간판 하나가 상큼하게 떠오른다.‘푸른 바다 세상’. 그럴듯한 간판 하나로 길가에 그리움이 생기고 사랑이 넘치고 아련한 추억이 낙엽처럼 뒹군다. 그 간판에 취해 서성이는 나그네도 있을 법하다.
낭만 넘치는 고운 문구는 단연 술 마시고 노래하는 카페에 제일 많이 담겨 있다. 기억해두는 감미로운 간판 몇이 있다.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휘날리고’,‘마실 다니기’,‘황토 빛 이야기’,‘그대들의 자유’‘달빛 머무는 뜨락’이런 달콤한 풍 말고 추억에 쌓여 제법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간판도 많다.‘그대에게 갈 수 없어서’,‘노을 빛 그리움’,‘그리움 그 행선지’가 바로 그런 류다.
고유의 것은 독특한 특색대로 풍기는 맛 또한 제각기이다. 음미하면 깊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도 갖는다. 나는 친구들을 그런 느낌으로서 표현하곤 한다. 수수하고 텁텁하여 매사 친근감이 넘치는 석이라는 친구는 어느 카페 제목처럼 ‘찻잔 속에 달이 뜨네’ 란 표현이 제법 맞을 듯싶고 늘 변하는 새로움으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익이란 친구에겐 ‘ 그 바람이 숲을 깨우다’란 표현이 제격일 것 같아 그리 생각해 둔다.
늘 아픈 시를 나르는 시인에겐 특색지어 난 ‘마음에 꽃 멍들어’ 란 어느 집 카페 제목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나에겐 어느 표현이 제 격일까. 첫 수필집을 낼 때 딴엔 나의 풍에 그럴듯하게 맞아 떨어지면서도 향내 나는 말을 찾기에 꽤나 고심하였었다. 그런 느낌으로 찾은 제목이 바로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이다. 괜찮다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여 그 표현은 앞으로 내가 갔으면 하는 길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지 정작 현재의 나를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가까운 듯 먼’ 이라 던지 ‘아직도 못 다한’ 같이 말에서 풍기는 미련 남는 사물에 유독 더 정이 쏠린다. 끝 가장자리에 놓인 것들의 애틋함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지금도 가슴 졸여가며 그것들에서 시선이 멈춰진다. 삶의 언지리라 할지 느낌의 변두리라 하는 삼류의 것이나 싸구려 눈물에 유독 감동 받는다. 깔끔한 정취가 묻어나는 자리나 고결한 대상들 앞에선 주눅 들고 밋밋할 뿐 감흥도 적다.
떠오르는 글이 있다. 제목부터가 묘해서 그 시절 단번에 읽어 내렸던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란 중편소설이다. 그 소설을 연상하면 지금도 자연스레 변두리란 말이 떠오르고 그 시절의 안양유원지가 생각난다. 어릴 적 서울사람들 구경한다고 기웃대던 그 유원지엔 관악산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계곡을 차곡차곡 막아서 만년풀이니 대형풀이니 풀을 만들어 서울손님을 맞이했다.
정작 안양촌놈들은 제대로 생긴 푸른 물통에 발 한번 못 넣어 보고 돈 한 푼 안내는 맨 아래에 위치한 그때 말로 자유풀이라 불리는 똥물에서 삼각팬티 차림으로 놀곤 했다. 이를테면 자유 풀 같은 언저리에서 놀던 내 동심이 나이 들어 변두리란 단어와 용케도 매칭이 되어 그런 연상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글 속에 산 곳은 서울의 변두리 70년대의 성남이란 동네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그 표현에 머무는 것이 왠지 고맙기만 하다. 학창시절 카페를 종종 들렸었다. 특히 아리따운 여인을 데리고 간 곳은 반드시 그곳이었다. 왜 돈도 없던 녀석이 서머한 운치를 즐겼는지는 이해가 안 간다. 포근하여 아늑하고 때론 이색적이고 우아하거나 고풍스러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곳이라 하여 전혀 색다른 것이 갖추어진 것도 아닌 마당 곳에 이끌려지고 매료되었으며 지금도 그런 곳에 얇은 여운과 야릇한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묘하다.
그곳은 으레 전등하나가 긴 목을 늘여 트려 쳐다보고 피카소의 우스꽝스런 그림 하나가 삐죽 환상을 만든다. 줄 끊어진 기타는 텅 빈 벽에 사슬로 묶여 있고 알지 못할 외국 책이 빼곡히 채운 빈 양주병에 나란히 놓여 있다. 단절된 간이 벽 선반엔 촛불이 켜있고 탁자위에 놓인 재떨이는 사기그릇이었다. 컵 하나도 삼각이나 사각형 같은 형태를 갖추고 맞이하였으며 노랜 꼭 질질 끌리는 LP 판으로 말하였다. 꽃의 아름다움이나 자연의 수수함에서 얻어지는 느낌과는 판이한 이질적인 낭만이라면 낭만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곳이 아름답다거나 그윽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혹여 전혀 다른 이질적인 환상이라서 빨려 들어갔는지 모른다. 동떨어진 것을 취하려는 도피처는 아니었을까. 고독의 은신처로 때론 폐허의 나락으로 때론 못 이룰 꿈의 환상으로 술 마시듯 마시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곳에서 산수화나 사실적인 그림을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오히려 샤갈의 괴상한 그림은 무척 많이 보았다.
즐겨 간 카페는 담배촌으로 향하는 길모퉁이 돌아 기찻길 바로 옆 맨 끝 집에 있었다. 아마도 그 카페가 안양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면 그곳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길 언저리 카페에 나를 포함한 남겨진 그 무엇이 있다고 믿었다. 모퉁이란 것과 담긴 환상이 나한텐 꽤 이질적인 멋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 나는 젊은 시절 그 환상의 곳에서 묻어났던 것들을 글로 재현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곳을 스쳐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엔 중국집이 들어서 있었다.
이제 나의 환상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젠 ‘나눔의 향기로운 쉼터’, ‘햇살 가득한 풍경’, ‘그리움의 하늘정원’같은 풍의 카페에 들러 창을 열어놓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좋겠다 싶었다. 요즘 그런 나의 흔들림은 사실 꽤 위태하다. 순수한 사랑의 열정에 그다지 감격해 하지 않으면서 야릇한 유혹에 말려들어가는 환상이 쏟아진다. 얼마 전 본 ‘립스틱 짙게 바른 집’ 카페 이름이 뇌리에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어둑한 카페 그 흐릿한 추억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는 것이 훨씬 안정적이다.
그 카페는 흔들리는 갈대마냥 길 언저리에 서성이며 그 누구든 철학적 감각으로 다듬어주었으며 늘 이질적 환상이나 우수의 감성을 안겨주었다. 추억의 그곳에 다시 “길모퉁이 카페(LE CAFE DE COIN)”그 간판을 걸어 맨다면 그야말로 그것은 기적의 환상이 되고 말리라. 어쨌거나 나는 이 나이에도 여전히 무중력 상태로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샤갈의 한 마리 양으로 살기를 꽤나 갈망하나보다. 본디 타고난 천성은 그래서 또 어쩌지 못하지 싶기도 하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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