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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읍내 중심에 놓인 '신작로'

안양똑딱이 2017. 3. 15. 16:02

[조성원]1960년대 안양읍내 중심에 놓인 '신작로'

(신작로 길)

언덕너머에 신작로 길이 생겼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신작로라 불러서 나는 그 길 이름이 신작로인 줄 알고 지냈다. 신작로는 필요해 의해 새로 만든 길이다. 문명의 길 실크로드와도 같이. 문명세계에서 필요는 빠른 시간을 전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그 길은 미루나무 마냥 시원스럽게 쭉 뻗어 있으며 문명에 편리하도록 반듯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길은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사람들을 대동한다. 마을길이 끊기면 마음의 길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첩첩산중에 갇힌 마을의 적막함을 이를 때 하는 말이고 문명 길에서는 길이 끊기면 황량함 내지 황당함이 되고 말 것이다. 촌로들은 바깥세상을 기웃이라도 할 양으로 으레 신작로 길 초입의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문명 길에 펼쳐진 광경들을 목격하곤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신작로는 그다지 필요한 길은 아니다. 예전엔 물길을 따라 길이 나고 마을이 생겨났다. 물 흐르듯 구성되었던 마을에 골목길 또한 올망졸망한 집들을 휘감듯 자연 생겨나 동네 아이들을 대했다. 아이들에겐 골목길이면 그만이다. 동네의 골목은 세상의 전부이고, 골목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통한다.
마을 앞산을 에도는 마을길을 벗어나야 비로소 먼 곳을 향하는 신작로가 나타난다. 신작로는 거리이든 시간이든 단축과 꽤 유관하다. 그러기에 산도 뚫고 물길도 거스르며 골목길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반듯하다. 그 길을 통해 학교를 가고 장터를 가고 도회지로 나간다. 신작로는 빠르게 오가는 통로일 뿐 느긋하게 거닐며 이웃을 살피거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동네의 골목길이나 고샅길 같은 길은 아니다.
절을 나누고 정을 쌓으며 생활을 품앗이하는 골목길 . 그러기에 고샅이나 골목은 마을사람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하지만 밀려드는 문명은 고샅으론 만족할 것이 아니다. 신작로가 동네를 가로지르며 고샅의 정감을 미련 없이 밀쳐 내자 갈라진 동네는 예전같이 더 이상의 왕래도 정감도 뚝 끊겼다. 그 쯤 나도 좁은 골목길에서 벗어나 신작로 길에 올랐다.
우리 동네는 신작로 말고도 아래엔 아스팔트로 포장된 국도가 가로질러 있었다. 수원과 서울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해마다 개나리 필 무렵 수원에 모심으러 박대통령이 행차하는 날엔 우리는 그 길 변에 늘어서 태극기를 흔들고 박수를 쳤다. 나는 그곳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부모님 말을 잘 들어서도 그렇지만 그 도로는 좁고 속도를 낸 차 이외는 거의 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장은 안 되었지만 그래도 신작로는 거리의 잡화상처럼 흥미로운 길이었다. 시내로 향하는 이 길은 널찍하여 오고갈 많은 것들이 있었으며 훤하여 보기에도 좋았다. 아이들은 시발택시가 먼지를 날리고 지나가면 그 먼지 속으로 달려들어 다른 세상을 맛보듯 휘발유 냄새를 맡곤 했다. 나의 창은 바로 그 신작로였다. 그곳을 지나치는 것은 무엇이든 새로웠다.
분명 이는 큰 세상으로의 발 돋음 이었다. 그 길에서 많은 문물을 터득한 셈이다. 마차는 말할 것도 없고 꽃상여도 소몰이꾼도 그 길에서 보았다. 색종이를 알록달록 부친 시발택시 타고 시집가는 풍경도 그 길에서 보았다. 그 길은 안양의 살림밑천이었다. 나무를 짊어지고 시흥에 내다파는 노인하며 보따리 행상에 사내들 일 깜은 늘 그곳을 통하였다.
신작로 빈 공간 한편에서는 연탄도 찍고 흙벽돌도 만들었으며 하다못해 성 나자로 병원이라 하여 근처에 문등 병 환자 수용소가 있었는데 그들 또한 그곳을 통하여 구걸을 하러 돌아다녔다. 나의 누나 또한 그 길로 걸어들어 왔고 그 길을 통하여 멀리 시집을 갔다. 먼지 풀풀 날리던 그 시절의 신작로 길, 그렇게 나는 그 길에서 골목에서 터득하던 정감과는 아주 다른 세상 물정을 배웠다.
하지만 그곳에 검은 포도가 씌워질 무렵부터 안양의 사람들은 더 이상 순박한 처지는 아니었다. 흡사 질주하는 차들의 느낌으로 변하여 그 신작로를 통하여 떠났다. 이후 그곳을 스쳐 지나지만 별반 남는 느낌도 없는 무감한 8차선 대로가 되어버렸다. 요즘도 나는 분간이 흐릿한 뽀오얀 안개 길을 가노라면 스미듯 마치 예전의 단 맛 나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접어드는 기분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문명이란 명분으로서도 그 굽이쳐진 정감은 정녕 돌아오지 않으리라.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던 그 신작로도 기억조차 흐릿한 아득한 먼 안개 속 나라이다. 대청 댐 안개가 몰려들어 몽연하기만 한 오늘 그 신작로 길을 따라 멀리 시집간 누나가 마치 먼 미지로 떠난 양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