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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1960-70년대 그 시절 안양의 기억

안양똑딱이 2017. 3. 17. 03:31

[조성원]1960-70년대 그 시절 안양의 기억
(그 시절의 안양)


오늘 새벽도 추적추적 늦은 여름비를 뿌렸지만 가는 세월은 이정표 없이 무작정 달리는 기차와도 같이 한 계절의 끝을 알리는 정거장을 이미 통과하였습니다. 창문 틈에 서린 기운이 어제 같지가 않습니다. 그 가는 속도는 얼마쯤 되는 것일까요. 덜 여문 창밖의 그림 속엔 어느새 추석이란 명절이 다가섭니다. 이때쯤이면 자연 마음은 고향을 향합니다.
나 역시도 안양을 떠난 지 햇수로 25년이 넘습니다. 흘러간 세월만큼 너무도 변한 안양! 동구 밖에 포도밭 고추밭 냇가가 그대로 있는 정감어린 안양도 아닌데 지금도 여전히 애착을 느끼는 것은 내 삶의 깊이만큼이나 골 패인 마음을 고향의 흙냄새로 치유 받고 싶은 단순한 동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동심의 고향은 늘 그렇듯 따스한 정감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잡다하다 싶은 작은 기억들은 그림자조차도 너무도 희미해 아련할 뿐 자꾸 맘속으로만 숨으려합니다. 그러기에 잊을 건 잊혀지고 조용히 살다 미련 잠재운 그리움만으로 허술한 집이나 겨우 짓다 허물어버리고 말 것이란 생각을 또 합니다. 이미 고향은 그리움 넘어 체념이기 때문입니다.
안양처럼 급속하게 발전한 도시는 우리나라에 몇 없을 것입니다. 안양에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신작로가 나고 유원지가 있었어도 그렇게 발전이 빠르지는 않았습니다. 실은 군포 쪽에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큰 공장이 들어선 덕분입니다. 아마 안양 공업발전의 디딤돌은 수리산 끝자락을 잇는 병목안 깊숙이 자리하던 채석장하고 왜정시대부터 들어선 금성방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두 곳은 전용 기찻길이 따로 있었고 용화사 뒤편을 통과하여 안양역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절 기차가 간간이 지나칠 때 뜀박질로 기차 꽁무니에 오르곤 했는데 차장은 푸른 깃발만을 내저을 뿐 막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시들해질 때 쯤 그러니까 천일포도주 공장이나 오리온 소시지 공장이 뒤 처질 무렵 안양엔 굵직굵직한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
60년대 말 제지회사가 재계 서열 10위 안에 두세 개 들어갔었던 때, 그 중에 하나인 한국특수제지가 안양역 바로 앞에 있었고 삼덕제지등 골판지 만드는 회사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시내 한복판에는 고려석면이 있었고 기찻길 건너서는 태평방직이 있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나일론공장인 한일 나일론 공장이 지금의 명학역 너머에 들어서고 이어서 금성전선 금성통신등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기계를 전공한 젊은이들이 들어간 공장은 현대양행으로 박달동(지금의 만도기계)이나 군포(지금의 농기계를 제조하는 LG기계)공장에 밀려들었습니다. 그밖에도 동아제약을 비롯한 많은 제약회사와 페인트에 잉크를 만드는 화학공장이 안양유원지까지 파고들었는데 그때쯤 안양천은 제 색깔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안양 전화국자리 맞은 편 중심에 위치한 결혼예식장은 친구인 익이네 옛날 논, 거화 예식장은 풍년원 포도밭집, 태평방직하고 교화동 사이에 포도밭은 섭이네 땅, 지금의 남부 순복음 교회 자리는 우리 집 고구마 밭이었는데 정말 흔적도 없이 너무 달라져 버렸습니다. 저 넘어 근명여중 밑 호박밭은 주인이 끈질기게 갖고 있어서, 아들인 권수창씨가 덕보고 국회의원도 했습니다.
땅이 효자 되어 졸부도 생겨났다고 하지만 순진했던 안양사람들은 발전도 되기 전 모두 땅을 팔아 돈방석에 앉았다는 소린 거의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안양이 양적으로 팽창한 건 일차적으론 안양국민학교를 가로질러 지금의 평촌신도시와 인덕원을 향한 비산동을 연결시킨 고가도로가 생긴 이후고, 이차적으로는 북부동 지나 석수를 향한 안양대교가 생기고 난 후에 1977년도 큰 물난리를 겪고 난 후 안양에 전체적인 도시정비가 이루어진 후 일이었습니다.
특색 없이 북적거리고 화장을 짙게 한 모양새가 이제는 서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 같이 부슬부슬 비 오면 질펀한 눈물로 떠오르는 그곳. 쓸쓸함이 넘치는 거리에 추레한 예전 모습만 출렁입니다. 구시장, 읍민관, 화단극장, 소골안, 포도밭, 수푸루지...... 정오를 알리는 읍내 성당의 종소리는 십리 밖을 넘어섰습니다. 이보다 큰 읍내는 없었습니다.
비 오면 떠나고 맙니다. 범계, 산본, 평촌, 인덕원, 석수.. 수리산 물과 산본에서 내려온 물이 합쳐져서 불린 이름 쌍개울. 그 물이 넘쳐나 비산리 다리가 떠내려가고 그 덕에 학교를 쉬었습니다. 밀밀한 공간으로 지금은 어림없겠지만 먼 거리인데도 늘 세세히 들렸던 새벽기차 소리. 제게는 그 소리가 과거로 향하는 아늑한 첫 길목이기도 합니다.
그쯤 눈이 떠지면 엄마의 밥 짓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습니다. 하루는 늘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기적소리는 안양역을 향하는 상행선이고 달가닥달가닥 소리만 들리면 안양역을 막 떠나 수원을 향하는 기차소리입니다. 오늘같이 사각사각 빗소릴 차분히 듣자면 빽빽 울어대는 그 기적소리도 여릿여릿 그리움 되어 다가옵니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