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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삽질 잘하면 먹고 살았다

안양똑딱이 2017. 3. 14. 03:53

[조성원]삽질 잘하면 먹고 살았다
(삽질)
한참 동네가 새마을로 변신을 하던 그 무렵. 우리 동네는 삽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 새벽 장화를 준비하고 장갑을 끼고 신작로에 오르면 큰 트럭 한 대가 기다린다. 그 중에는 지난해까지 마부였던 사람도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도 벌터에서 소작을 했다는 사람도 끼어 있다. 웬만해선 그 무리에 끼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돈벌이가 괜찮은 만큼 서열도 있고 끼려는 사람들도 줄을 대야 했다.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많았던 것은 그나마 줄을 잘 선 덕분인지도 모른다. 목수나 미장이가 떼거지로 산 동네였으니 굴비 엮듯 꼬인 트럭 한차였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야말로 삽질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시멘트 포대를 한 손에 딱 잡으면 옆으로 부지직하고 실밥이 튕겨져 나갔고 큰 철판위에 마치 비빔밥을 만들듯 금세 물과 모래가 뒤섞인다.
물이 철렁되며 넘쳐날듯 한데도 전혀 그런 일 없이 갈무리 하듯 골고루 잘 섞인다. 이제부터는 굳기 전에 부리나케 삽질을 해야 한다.물 타기를 해서 시멘트 양을 줄인다고 주인들은 꼭꼭 챙겨 보던 그 시절. 질통을 멘 사람은 연실 퍼 나르고 삽질 하는 사람은 구령에 맞춰 삽질을 한다. 일명 공구리패라 하여 스무 명이 한 패가 되어 동네 신축현장은 그들이 불려 다녔다.
그 광경을 보면 자연스럽고 전혀 힘이 안 들어 보이는데 아무나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숙달이 되고 요령을 잘 아는 그들만이 가능한 그런 삽질이었다. 새벽부터 두 시간 남짓 뚝딱 한 일을 해치우고서는 그들은 준비된 트럭에 또 오른다. 하루에 그렇게 세 번은 해야 돈벌이가 된다고 했다.
그들을 기억하자면 뻔! 뻔! 외장치며 번데기를 동네방네 팔고 다니던 아저씨가 나는 꼭 떠오른다. 그중에서 제일 가냘팠기 때문이다. 욕을 질펀하게 하던 오야지란 사람한테 혼나는 것을 보고서는 더욱 안타까웠다. 신문지 둘둘 마른 번데기 봉지나 들고 동네나 돌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 삽질의 통증을 가슴으로 담은 것은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다. 아저씨는 일은 안 나가고 양지녘에 쪼그리고 앉아 우리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난 그 삽질에 꼭 맞는 시 하나를 알고 있다.
저문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중에서 -
삽질은 모든 노동을 대변한다. 노동은 사람이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정직한 노동의 가치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치가 떨어져서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부당하게 취급도 당한다. 저문 강에 선 하루의 저녁은 인생의 노을과 같아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는 자조와 탄식 그리고 생의 달관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삽자루에 맡긴' 묵묵한 노동의 성실함을 어느 시대 그 누가 제대로 알아주랴.
저문 강은 피곤했던 하루를 씻어줄 뿐 아니라 의연한 깊이를 보여주어 세상살이에 지친 이에게 위안을 준다. 요즘은 공구리 패란 패거리는 없다. 아예 그러한 삽질도 없어지고 말았다. 대신에 레미콘이라는 괴물이 그 일을 한다. 기껏 우리가 삽질을 한다는 것이 어쩌다 땅 두세 치 파고 작물을 심는 일이다. 그러기에 요즘은 ‘삽질을 하다.’ 하면 괜한 일을 득도 없이 힘들게 했다고 할 때 비어로 그 말을 쓴다. 하지만 삽질은 여전히 사람이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방식중 하나이다.
'삽'이라는 한 글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삽질은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낮춰야 하는 일이다. 한 삽에 한 삽을 더해야 하는 묵묵하고 막막한 일이다. 흙 한 삽, 모래 한 삽, 시멘트 한 삽이 모여야 밥이 되고 집이 되고 길이 되고 마을이 되고 무덤이 된다. 삽질은 그 우직함과 정직함에 있다. 파고 푸고 옮기고 덮고 매만지듯 차곡차곡 하는 일이 비단 땅을 다루는 삽질만인가. 늘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은 삽질과도 같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울 것도 없이 어느 참 우리는 몸을 낮추고 허리 춤 힘까지 아낌없이 다 소비하는 용감한 일꾼이 되었다. 이른 아침이면 으레 눈이 떠지고 삽을 들고 구부리고 일터로 향한다. 누구는 그 같은 생이 곤곤하다 할지 모르지만 일터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삽을 들고 걷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그러기에 비록 삽자루에 맡긴 생애가 저물고 저물어 썩는다 할지라도 의연히 우리는 삽자루를 들고 나서 볼 것이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그 시절과 다름없이 사는 날 다하여.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