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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아버지 닮은꼴 작은 손

안양똑딱이 2017. 3. 14. 03:55

[조성원]아버지 닮은꼴 작은 손
(당신의 손 )
 

본디 타고나는 것이 어디 천성뿐인가. 나의 손은 무척이나 작다. 어찌나 작은지 기타 줄 C코드를 간신히 잡을 정도다. 그래서 그 언제던가 기타교본 ‘에델바이스’란 곡을 겨우 마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곡을 칠 때쯤 자연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를 맨 처음 만났을 때 손 작음을 고백하였었다. 작게 보이기는 한데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친해지자마자 덥석 내 손을 먼저 잡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의 손은 자연 아내 손에 안기는 꼴이다.
결혼반지도 조그만 손에 투박하고 무겁기 그지없어 얄팍한 실반지를 따로 맞춰 끼고 다녔었다. 술집에서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오히려 내 손을 탐하여 내 손을 만지작대기 일쑤였다.그런 나의 손을 닮은 것이 또 아들들이다. 나야 키라도 작으니 대비가 그리 크게 되지 않지만 그놈들은 큰 키에 영 안 어울리는 작은 손이다. 그러한 유전성은 순전히 나의 아버지로부터다. 그런데 아버지 손이 작다는 사실을 나는 당신 성성하던 때엔 전혀 느껴보지도 못하였다. 그런 당신은 당신 손이 작다함을 스스로 인정한 적이 있었을까.
나의 아버지는 수의학을 전공하여 지금도 안양에 있는 가축위생연구소(현 한국 수의과학 연구원)에 다니셨다. 조실부모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신 아버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어릴 적이나 다 커서 분가하여 살면서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땅 한마지기 없이 나와 단신으로 객지에서 공부를 하고 자립을 하였으니 당신 의지만큼 설움 또한 컸을 것인데 하필 당신 떠나고 부질없는 지금에서야 당신의 그 눈물 많았을 유년 삶이 자꾸 상상이 되는지 모르겠다.
못 받은 애정에 대한 반사적 계시라도 갖은 것인지 당신은 유독 자식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다. 말 수가 적은 당신은 아픈 과거를 한 번도 자식들에게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였던 당신 젊은 시절의 아픈 삶의 기록이다. 아버지는 가족사진도 거의 없고 학창시절 때의 사진도 남겨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신 사진으로는 대학 학사모 쓴 사진 그리고 정구를 치다 찍은 사진 몇이 있을 뿐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 수가 적었던 것은 혼자 지내던 날들이 쌓여 습성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학창시절 정구 선수였다. 대학부의 도 대표도 하였다는데 당신은 자랑 삼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어머니가 말해줘서 알았다.
아버지의 가운데 손이 휜 것은 정구 라켓을 많이 잡아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정말로 당신 손은 가운데가 똑바르지 않다. 아버지는 따로 놀러 갈 곳도 반 겨줄 곳도 없어서 학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다고 들었다. 그런 당신은 약골인 나를 낳고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옷이 없어 군용담요를 둘둘 말아 나를 키웠다는데 디프테리아로부터 해서 잦은 병이 내게 찾아왔을 때 안양시내 김 외과란 곳 까지 들쳐 없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더러는 직접 주사를 놓아 죽을 놈을 살렸다고 하는 소릴 여러 번 들었다. 말로만 듣던 디프테리아 전염병 당사자가 나였다는 것도 이 나이 새삼스럽고 만약 당신이 수의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란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당신은 직장에서 인기가 높았었다. 연식정구가 변하여 테니스가 번창하던 때 높은 분들 교습상대로 당신이 당당히 상대를 하였다. 당시 농촌진흥청장은 일부러 안양에 들러 아버지 교습을 받고 가곤 하셨다. 직장 배구 대회 때도 두 손을 순발력 있게 버쩍 들어 올려 블로킹을 잘하여 박수를 많이도 받았었다.
구멍 뚫린 담 밖에서 지켜보던 나와 동생은 집에 와 아버지가 한 솜씨를 재현하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곤 하였는데 그 무렵 아버지는 돈 콜레라 예방약을 국내 처음 개발하여 히트를 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당신의 손은 늘 큰 느낌으로서만 내게 남아 있다. 병상 때 가냘파진 당신 손을 어루만지면서 그때 당신 손이 작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요즘 당신의 휘어진 손이 떠오르면서 당신의 유년시절의 아픔을 쓸어내렸을 그 작은 손도 같이 느끼고 싶다. 살아생전 추운 면을 숨겨 두려한 당신에 대한 안쓰러움엔 필시 당신의 작은 손이 있었다. 왜 당신은 그토록 춥게 지냈는가. 못나 보이지 않으려 갈고 닦은 그 손이 아니었던가. 만지작대며 당신이 당신에게 남몰래 말하였을지도 모르는 그 말 속에 분명 작은 손은 그 긴 여로 무엇인가로 깊이 존재하였을 것만 같다.
당신의 자조적인 그 말이 지금 내게 다시 들리는 듯도 하다. 스스로도 야속하여 하였을 아무도 모를 그 말이. “내 손은 왜 이리 작은 것일까.” 아련한 심증은 그러하지만 어쨌거나 내 살던 그곳을 떠올리면 나는 캄캄한 오밤중 대추나무를 들고 닭장을 지키던 아버지의 거룩한 손이 눈에 더 삼삼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