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안양은 나의 영웅본색이었다
(Q등급을 꿈꾸며)
안양의 변천을 보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이 시대 산업의 첨병으로 자리한 안양이기 때문일 것이다. 50년대 논과 밭 그리고 포도밭이 그득하였던 안양은 서울의 위성도시답게 늘 발 빠른 변모를 하였다. 가발이 수출항목에 껴 있던 60년대 당시의 선도 산업은 방직업이나 제지업이었다.
우리 동네는 바로 그 산업의 본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후 그 산업은 보다 임금이 싼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70년대에 들어서는 서울에 가까운 특성을 십분 살려 우수인력들이 대거 몰려들어 경제개발 계획이란 국가 시책에 부응한 이를테면 현대양행이나 만도기계 같은 중공업의 시대로의 전환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90년대에 와서는 근교농업을 하던 비닐도 모두 걷혀지고 많은 공장들이 이전을 하였으며 대신에 평촌이니 산본이니 신도시 유형이 생겨났다. 이 또한 요즘에 들어서는 동탄이니 판교니 하며 근처 신도시형태로 전파되고 있다. 마치 한 시대의 실험조련을 안양에서 꾀하고 성장하면 보다 싼 곳으로의 이주를 시키는 그런 식이다.
나는 그 사실이 매우 흥미롭지만 또한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엇이든 변하여야 살고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곧 퇴보를 의미하지만 안양은 한 시대의 늘 갈림에 섰으며 본색은 커녕 지금은 흔적조차 묘연하여 기억의 의미도 없게 되어 버렸다. 만신창이의 모습이다. 나는 그 주된 원인으로서 사회의 진보된 가치의 잇속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현대 사회는 늘 재화를 쫓는다. 한때는 공장이었는데 지금은 땅값이고 건물이다. 땅을 파면 6 25의 잔재만이 즐비하던 곳이 이제는 천정부지로 오른 땅 값으로 한 몫을 한다. 한 때 안양은 제품의 품질이었는데 요즘은 땅 가치로서 말을 한다. 안양 땅은 제품으로 치면 요즘 명품에 해당한다. 재화의 가치는 바로 품질이고 고품질이면 재화의 가치로서 대접받는 세상이다.
품질 우선주의 시대이다. 우리는 불량률 1%의 산업 시대에 산다. 이는 철두철미한 요건과 제한을 갖는다. 정에 끌려 오판하거나 공말을 하고 착시를 현실로 판단하다가는 당연 공사는 부실이 될 것이고 제품은 불량이 되기 십상이다. 공정하고 하자가 없다 하는데도 불량이 발생한다. 봐주고 대충하는 식의 일처리나 감정은 절대 금물이다.
이 사회는 품질관리를 적극 후원한다. 제품의 정밀함과 정확성을 숭상하듯 평가하는 행위가 바로 품질관리이다. 품질 검사나 감사를 받아보면 잘못에 대해선 인정사정없음을 누구든 자연 알게 된다. 판정기준이 똑 떨어지기 때문이다. 감사원이 그러하듯 품질을 책임지는 곳은 어디든 간섭을 안 받도록 독립적인 조직체제로 구성되는 것이 표리부동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품질검사를 철저히 하면 당연 불량률이 적고 제품의 질은 향상된다. 우리가 육하원칙에 의해 정확하게 기사를 쓰듯 품질관리 또한 단계별 그물망을 펼쳐 빠져 나갈 구멍이 없도록 엮어져 있다. 이를테면 최상위 등급으로 분류되는 것들(우리는 이를 Q CLASS라 부른다.)은 18단계의 절차로 세분화되어 관리를 한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로 빈틈이 없다. 대개 감정의 기복은 불량이 날 확률을 높인다. 무감으로서 기계처럼 일을 하기를 품질은 원한다. 현세의 스트레스는 바로 정확성과 실수가 용납이 안 되는 품질 그물망에 갇힌 신세이기 때문에 더욱 더하다. 착오와 실수에선 가차 없이 False를 드러내야만 하는 처지들이 이 세상은 기실 너무도 많다.
품질관리 없는 사회는 이제 어느 곳에도 없다할 정도다. 열심히 일을 하였다하여도 결과가 불량이면 하나마나한 일을 한 것이다. 정작 이쯤에선 불량을 용서치 않는 사람을 품질관리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감과 정감의 혼돈으로서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마음의 질적 향상이다. 사람들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하는 것이 십분 이해가 간다.
이쯤 안양은 스스로 세상 품질의 명줄을 놓았으면 좋겠다. 그 정도 이용당했으면 됐지 싶다. 그 시절의 본색은커녕 안양은 지금 서울보다 집값이 싸다느니 교통이 가깝다느니 하는 방편으로서의 마치 임시 거처 같은 느낌마저 든다. 특색은 스스로에게 주어져있으며 그 가치는 그야말로 순순한 품질의 재창조이다. 어김없는 자연의 순리는 무감의 엄격한 품질관리 없이도 늘 최고의 순도이다.
서울이나 다를 바 없는 지금의 무난한 품질이 아닌 안양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독특한 품질 등급 Q를 재창출하였으면 싶다. 안양은 작지만 늘 큰 나의 영웅본색이었으며 앞으로도 능히 그럴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속된 말로 몸 주고 정 주고 다 준 마당 더는 어쩔 수도 없는 처지다. 나의 사랑 그곳 안양! 영원한 꿈속의 그곳! 꿈에도 그리는 곳을 내 죽어도 정녕 떠나지 못하리라. 그 무엇이 세월을 아무리해도.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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