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세월따라 입맛도... 어렷을적 먹거리
(새월따라 입맛도)
그 시절은 한 여름 온 식구가 평상에 나와 앉아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거나 로케트 배터리를 고무줄로 칭칭 감은 파나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정 중앙에 모셔두고 메르데카 배 나 킹스컵 축구 중계를 듣곤 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아나운서의 멘트는 아주 극적이라서 가슴은 늘 조마조마했다. 어머니는 채반에 포도나 소사란 동네서 나온다는 복숭아도 때론 내오기도 하였지만 우리 텃밭에서 기른 옥수수나 고구마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겨우 크림빵을 맛보았던 시절이니 줄줄이 사탕 뽀빠이과자 크라운 산도 맘보 캬라멜 해태 풍선껌 라면땅 건빵들은 알기는 해도 간식으로 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께끼 통을 둘러멘 동네 아이에게 공짜로 삼강하드를 얻어먹은 것하며 생일날 냉천동 사는 여자아이네 집에 초대받아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콜라를 나는 잊지못한다. 그 시절은 불량식품이 참 많았다. 자칫하면 배탈이 나는데도 우리는 먹지 말라하던 소라나 번데기 눈깔사탕이나 꽈배기에 여전히 손이 닿았다.
그런 조무래기가 달달한 꺼리들은 어느 참 제쳐두고 학창시절엔 술꾼이 다 되었다. 역에서 내려 귀가하는 길목엔 카본 등불에 졸린 눈 비비는 포장마차가 늘 길게 진을 쳤다. 어둑해지는 무렵 배는 출출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니에 뭔가 잡힌다 싶으면 소주 한잔 값은 되는가 보다 미루어 짐작하고 무작정 기어 들어갔다. 몇 번 들락거리니 단골이라는 명함이 달라붙고 가던 집만을 찾았다. 나는 그 시절 포장마차에서도 긋고 먹는 외상을 했다.
동네 친구들도 대충 천막을 살짝 들치고는 행여 아는 놈들이 있으면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는 표정으로 씩 웃고는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지역사회에선 이런 푸근한 맛이 별미로 따로 존재한다. 그런 동네에선 깡패도 국회의원도 어릴 적 그대로의 친구다. 그때는 잔술이 꽤 괜찮았다. 딱 반병만이요가 잘 통했다. 피 같은 술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때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던가.
아낀답시고 조금씩 술잔을 곁눈질을 해가며 홀짝거렸지만 바닥이 보일 때는 거의 소주잔이 입안에 수직으로 당겨지는 상황이 된다. 안주는 닭똥집 아니면 꼼장어가 단연 최고였다. 깨소금에 참기름 바른 닭똥집의 오들 오들 씹히는 고소한 맛은 목에 방금 넘어간 소주의 독한 맛을 이내 향기롭게 만든다. 꼼장어는 또 어떠한가. 유리 창 안에 갇혀진 그 놈을 고를 때만 해도 핏빛이 든 몸체가 그래도 제법 길쭉하다 싶었는데 푸른 빛 연탄불에 놓이면 뱅그르르 꼬이면서 주먹만 하게 움츠려든다.
어느 정도 구워서 기름기가 빠졌다 싶으면 칼로 몸체를 동강동강 내어 고추장 양념하고 섞어 다시 굽는데 그때는 이미 그 냄새에 취해 소주 반병은 벌써 해치운 상태다. 닭발이나 창살에 엮인 참새구이도 제 몫을 톡톡히 했었고 그 당시엔 홍합 국물은 공짜로 제공되었다. 국수 한 사발 말아 먹고 만다고 들어간 주점에서 결국 동네 친구 다 만나고 세상 이야기 다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집을 향하던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얼마 전 그 맛을 못 잊어 동네어귀에 큰 플래카드로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라 써 붙인 큰 간판 내 걸린 집을 찾았다. 듣자니 영화 친구의 열풍으로 부산부터 유행을 탔다는데 벽에 그 시절 교실풍경에 친구에 나오는 영상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 그대로 안주를 시켜 먹었는데 들깬 숙취감에 괜스레 연탄 불 때문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일고 왜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지 모르겠다.
세월 따라 그 맛도 변하는 모양이다. 꼼장어 맛이 달라진 것은 아닐 테고 내가 변했다. 나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마늘쫑이란 건 입에도 안 댔다. 어릴 적 봄철이면 으레 닭똥 잔뜩 머금은 마늘 밭에서 솎아 상에 올려놓은 것이 마늘 쫑 이었다. 아버지는 고추장에 찍어 드시며 고소한 표정을 짓곤 하셨는데 코끝까지 찡하게 만들며 풍기는 쌉쌀한 맛을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매운 고추 또한 여전히 모를 일이었다. 나오는 눈물을 참는 용맹으로서 어른이 되는 양 눈을 부릅뜨고 참았지만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 거부감이었다. 달래,고비, 머위에 씀바귀 하다못해 깻잎도 최근까지 먹지를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부터서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이 구미가 당겨지고 색다른 느낌으로 괜찮다 싶다. 쌉쌀하다하는 느낌에 익숙하지 않은 미각이 묘한 향취로서 나를 자극한다.
분명 쌉쌀함을 지나쳐 씁쓰레함까지도 주저하지 않는다. 밀가루 것들은 물론 그 좋아하던 육류도 시들해져 버렸다. 묘한 것이 바뀌는 입맛이 점차 그 시절 아버지의 입맛을 닮아간다. 어머니한테 요즘 들어 매번 듣는 소리가 있다. ‘너는 고집 부리는 것 하며 하는 게 아버지를 꼭 닮았는데 찾는 음식도 이제 아버지 그대로다.’ 요즘은 아버지가 평소 즐겨 드셨던 가지나물이 끌린다.
보랏빛의 진한 색채로 탐스럽게 밭에서 거두어들인 가지는 여름 철 아버지 입맛을 돋우곤 했었다. 밥을 할 때 호박잎하고 가지를 같이 찌도록 해서 쌈 싸먹듯 이것저것 곁들여 먹는 것을 꽤나 즐기셨다. 그렇게 몇몇 음식들을 마주할 때는 아버지가 불현듯 떠오른다. 거의 여지없이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것들이 내 곁에 다가선다. 비록 토마토 케찹에 밥을 비벼 먹는 자식 놈들이지만 훗날은 나를 닮은 그런 쌉쌀함이 또 아닐까. 어쩌면 달작지근한 푸른 여릿함에서 제법 드세져 쌉쌀한 맛으로 살아지는 길이 또한 인생길인지도 모른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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