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안양천변에는 마부들이 살았다
(마부)
동네는 물 흐름을 따라 자연 형성이 된다. 우리는 수리산 물이 그 차지였다. 물은 소골안을 지나 지금에 평촌에 해당하는 쌍개울이란 곳으로 흘러내렸으며 동네는 개울을 사이로 나뉘었다. 개울 건너편엔 마부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에게 말은 삶의 전부였다. 여물을 솥단지에 끓여 드럼통을 잘라 만든 함지박에 담아 나르는 것이 아낙의 몫이었고 그 놈들 잠자리를 보아주고 똥을 치우는 것이 아이들 할일이었다.
긴 막대기로 여물이 잘 섞이라고 휘젓고 나면 녀석은 곁눈으로 냄새를 슬쩍 훑곤 입맛을 다셨으며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고맙다는 시늉도 빼 놓지 않았다. 다 먹고는 녀석은 꼭 오줌을 누었는데 지켜보던 우린 뜻도 제대로 모르고 한마디씩 하였다. “오줌발 보니 세긴 세겠는데.” 이른 새벽 귀볼 겨우 가리는 털모자를 꾹 눌러 쓴 볼 패인 사내. 마부는 채찍 하나로 신작로를 맨 처음 올랐다.
돌아올 설 걱정에 밤새 뒤척인 몰골이 으스스하다. 고삐를 쫓는 하현달마저 얼굴을 감추면 그야말로 적막한 신작로 길이다. 적막을 가로채는 말발굽소리. 수천 년이나 되풀이 되었을 활기에 찬 그 굽 소린 이젠 삶의 허기진 노정이 되고 말았다. 딸가닥 딸가닥. 인류에게 말은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산업혁명전까지만 해도 말은 이 세상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알렉산더도 징기스칸도 로마군도 아메리카를 찾아간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나폴레옹도 그 모두 말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또한 말을 잘 다루었다.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민족은 몽고와 우리 말고는 전 세계적으로 없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가 이를 증명한다. 마부란 그렇게 수천 년을 지켜온 당당한 먹고 살 터전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제나라의 명재상인 안영의 마부에 대한 글이 하나 있다. 안영의 마부가 안영을 태우고 외출할 때에 의기양양하게 말을 몰고 가는 모습을 마부의 아내가 보게 되었다.
마부가 돌아오자 그 아내는 이혼을 요청하였다. 마부가 그 이유를 묻자 그 아내는 " 안자(안영)는 키가 여섯 자(160cm 정도)도 못 되는데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제후들 사이에 명성을 날리고 있다. 오늘 제가 그의 외출 모습을 살펴보니 품은 뜻이 심오하고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여덟 자(2m 정도)나 되지만 남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도 아주 만족스러워하니 이것이 제가 이혼을 청하는 이유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이후 마부는 전과는 달리 겸손한 자세로 말을 몰게 되었는데 안영이 이상히 여겨 그 이유를 물어보자, 마부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이것을 듣고 안영은 마부를 천거하여 대부(大夫)로 삼았다. 그런 마부의 호시절도 있으련만 이제는 말굽소리를 마부는 애타는 시간으로만 듣는다. 가보아야 헛것이지만 집착은 왜 하는 것일까. 순간 신작로에 찬바람이 인다. 삼륜차가 어느 새 앞서 달려가고 있다.
그 날도 허공을 가른 채찍은 공연한 짓이 되었다. 일주일째 마부는 여물만 챙기다가 곤드레 다되어 동네로 들어왔다. 그러던 이듬해 그 가족들은 그 마차에 짐을 얹고 어디론가 떠났다. 내가 아는 한 아이도 그 바람 전학을 가버렸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살이란 것을 그 시절 알 리 없었던 나는 말을 팔아 삼륜차를 사면 될 것인데 하며 끌탕을 하곤 했다.
마차가 선 자리에는 삼륜차도 잠시, 어느 참 버스 종점이 들어서고 주변엔 차 고치는 집이 무성하게 늘어났다. 반반한 술집이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겨울 새벽 시동을 거는 기름 때 묻은 정비공 형들 때문 새벽잠을 깨야만 했다. 어느 참 그런 형들은 운전수가 되어 서울 길을 나섰고 차장 누나와 눈이 맞아 우리 동네는 갑자기 살림집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소달구지는 간간이 보았지만 나는 이후 어디에서고 딸가닥 딸가닥 달리는 활기 넘치는 마차를 본적이 없다. 그로부터서 마부의 대물림은 영원히 끝이었을 게다. 그리고 나는 일거리 찾는 마부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여행길에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 역 앞에서 그 시절처럼 똑같이 또 본다. 수 천 년의 역사를 지켜온 마부는 어디에서든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이다. 맥이 끊긴 게 어찌 그 마부뿐이겠냐 마는.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이야기보따리 > 기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조성원]60년대 국민학교 졸업 선물 '도장' (0) | 2017.03.15 |
---|---|
[기억-조성원]안양초-안양중-안양공고 축구의 배경 (0) | 2017.03.15 |
[기억-조성원]안양역 연탄공장 있던 그때 그시절 (0) | 2017.03.15 |
[기억-조성원]추억의 세발 자전거 (0) | 2017.03.15 |
[기억-조성원]학교급식 강냉이빵을 기억하나요 (0) | 2017.03.15 |
[기억-조성원]아버지 닮은꼴 작은 손 (0) | 2017.03.14 |
[기억-조성원]삽질 잘하면 먹고 살았다 (0) | 2017.03.14 |
[기억-조성원]안양은 나의 영웅본색이었다 (0) | 2017.03.14 |
[기억-조성원]세월따라 입맛도... 어렷을적 먹거리 (0) | 2017.03.14 |
[기억-조성원]안양유원지의 추억 (0) | 2017.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