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 그 시절 버스(2)
동물적 본능 바탕위에 이성의 성을 쌓는 듯 이 세상은 어찌 보면 아주 단순 명백하다. 동물들 세계에서는 암컷이 있으면 수컷이 몰려오고 갖은 묘기를 다 부리며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 사람들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그 시절 명동이 붐비고 이대 앞이 번창하며 화사하였던 이유는 여성들이 주차지였기 때문이다. 여자가 몰려들면 향내 쫓아 자연 남자들은 따라가게 되어 있다. 80년도던가 마산 수출 자유공단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마산은 열 명 중 여덟 명이 여성이라고 했다. 다방 안에 그득한 여자들이어서 숫기 없는 나는 오금도 못 펴고 그냥 나온 적이 있다.
60년대 말 안양이 꼭 그러했다. 호구조사는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시대의 마산 같은 진풍경이 아니었겠나 싶다. 당시 사회추세도 그렇지만 여성인력 쓸어 담기 좋은 경공업 위주의 공장들이 안양에는 많았다. 특히 방직공장이 많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대로 그 무렵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금성방직은 기찻길이 역까지 연결되도록 일제시대 때 이미 되어 있었으며 담배촌이라는 동네의 채석장 역시 기찻길이 놓여 있었다.
방직공장으로는 태평방직, 금성방직, 동일방직, 삼풍산업이 있었으며 훗날 국내 최초라는 동양나일론공장도 생겨났다. 그 밖에도 수다전자, 동화약품, 동아제약등의 공장들과 제지공장들도 많았는데 이곳 공장들은 여성근로자가 대다수인지라 일시적으로 남녀의 성비가 불균형을 이룬 곳이 그 당시 안양이었다. 이는 객관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TV가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여성들이 갈 마땅한 장소는 바로 극장이었다.
당시 안양에는 3개의 극장이 있었다. 작은 동네에 극장이 셋이라니. 안양역전의 북측에 위치한 화단극장과 새로 길이 뚫렸지만 아직은 포장이 되지 않은 중앙로에 위치한 삼원극장과 안양극장. 그 중 여공들이 제일 많이 몰리는 곳이 나의 누나도 그러했지만 단연 화단극장이었다. 화단극장은 새로 지은 삼원극장이나 안양극장보다는 개관한지가 오래되어 시설은 취약했지만 관람료가 저렴할 뿐만 아니라 조금은 후미진 허름한 극장으로 여공들의 취향에 맞는 국산영화를 위주로 상영하였다.
휴일에는 장사진을 이루고 매회 매진을 기록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인원들은 거의 대다수가 여성들이었으며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당시 옆집 형이 말 한대로 하자면 '화단극장 앞에서 5분 만에 애인을 구하지 못하면 바보'라 하였으며 역전 옆에 위치한 태평방직이나 금성방직의 월급날이 되면 안양의 모든 제비와 건달들이 정문에 모두 모인다고 했다.
나는 80년도 초에 울산 현대중공업을 다녔었는데 그때는 술집 아줌마들이 월급날 장사진을 이뤘다. 며칠 사이 외상값을 받지 않으면 또 다음 달로 넘겨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누나도 북부동(안양여중 바로 뒤)에 살며 자취를 했는데 그 무렵 매형을 만났다. 그런데 극장의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70년대 초반 방직공장들이 문을 닫자 얼마 못가서 안양극장하고 화단극장이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대신 늘어난 게 중화학 공장들이다.
그런 안양이다 보니 1964년도 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가던 때와 70년도 중학교를 갈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야말로 동네개벽이 일어난 셈이다. 안양시장이 그 이래로 전국최고의 상권이라고 했다. 버스가 느니 내 주변에는 차장누이들도 많았다. 우리 동네는 집집이 방을 달아내 차장들 자취방을 만들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언제부터 여차장이 등장한 것일까. 1961년 6월 교통부는 8월 1일부터 시내버스 차장을 전원 여자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사회기강 확립을 주문했던 정부였다. "남자 차장들에 의하여 가끔 발생하는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없이 하기 위함." 6월 12일 부산 시내버스를 시작으로 8월까지 전국 버스 차장이 남자에서 여자로 교체됐다. 1960년대 사람은 남아돌았다. 여자는 더 남아돌았다. 사람값은 쌌고, 여자 값은 더 쌌다. 많은 시골 계집아이가 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도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무학(無學)의 10대 소녀들에게 돌아갈 일자리는 없었다.
차장은 학력은 물론 나이도 제한이 없었다. 식모보다 나았고 직공보다 쉬웠다. 사람대접 못 받는 대한민국 여자들에게 여차장은 쉽게 취직할 수 있는 꿈의 직업이었다. 시험은 간단했다. 30 곱하기 7은. 당시 버스요금은 30원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안양을 오가는 버스요금은 50원, 시흥까지는 30원을 받다가 거기서부터 20원을 더 받았다. 나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집에서 중학교까지는 조금 멀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나는 걸어 다녔다. 가축위생연구소, 큰 다리 지나 평촌동, 서울 포도원 ,신흥목재, 한전 변전소, 등기소, 전화국, 한성운수 종점, 남부시장,제일 목욕탕, 한일목재, 고려석면, 안양시장, 삼원극장, 금성방직을 지나 담배촌을 향하는 길로 300미터쯤 따라 올라가야 중학교가 나온다. 나중에는 10원을 주고 버스릍 타고 전화국 언덕을 올랐는데 그 당시 짜장면이 40원, 라면이 25원이었으니 10원은 큰돈이었다.
원래 라면은 10원부터 시작한 것인데 그 무렵부터 물가가 뛰기 시작했다. 한때 나는 삼원극장 앞에 늘어선 호떡가게의 5원하던 호떡 맛에 빠져 10원 어치 다 사먹고 어쩔 수없이 걸어가기도 했다. 차장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첫차에 올라서 하루 16~18시간을 승강구에 서서 일하다가 밤 12시가 다 돼서 막차에서 내렸다. 차 내부를 청소하고 세수를 하고 합숙소에 누우면 새벽 1시 정도였다. 3시간 만에 아침이 왔다.
1970년 초 그녀들이 받은 월급은 5000원이 채 안되었는데 월급을 쪼개서 저금을 하고 고향으로 부치고 동생들 학비를 댔다. 그 당시 신조어로 까지 나온 말 삥땅. 어느 회사는 경찰을 동원해 여차장 전원을 조사하며 손가락 사이에 만년필을 끼워 비틀며 고문을 했다. 여차장 117명이 새벽에 탈출했다. 삥땅 혐의를 받던 차장이 제1한강교에서 투신자살했다. 이후 삥땅 감시원이 생겨났다. 넘버링(발판 아래 설치한 계수기로 승객들 숫자를 새기는 일)을 해가며 이들이 얻어낸 승객 숫자는 여차장들 '센터 까는 데(몸수색을 하는 데)' 이용됐다.
1970년 4월 YMCA 주관으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제는 '삥땅이란 무엇인가'. 한 여차장은 "하루 300원 삥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죄의식이 너무 커서 교회도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누구나 공정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라고 선언을 했다. 그런데 그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1960년대 후반에 생기기 시작한 전국 수출 공단이 본격 가동됐다. 덕분에 많은 차장이 공단으로 빠져나갔다. 공단에서는 야간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벌이도 더 좋았다.
노동의 고달픔, 힘들다 해도 설마 그때만 하랴. 누이들은 서서 자는 경우가 참 많았다. 생각해보면 그녀들 또한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가 아니었던가. 연애편지를 주던 형들도 있었고 차장 덕을 본 아이들도 많았다. 어수룩하면 누이들이 돈을 받는 척 그냥 지나치기도 했으며 교복 입은 고학생이 물건을 팔고 내릴 때면 차비를 받지 않았다. 어떤 아이들은 착한 누나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얻어 타곤 했다. 어린 아이를 앉히고 발판에 기대서 회수권을 세던 누이들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나도 동네 누이를 만나면 공짜로 얻어 타기도 했다.
그 버스 차장이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은 1989년이다. 시민자율버스라고 해서 승객이 토큰을 직접 넣는 것으로 바뀌고 나서다. 그녀들은 60년대의 마부처럼 대한민국에서 극적으로 실종된 직업군이다. 나는 대학시절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4명 중 2명의 아버지가 버스 기사였다. 그 중 한 애 엄마는 내가 잘 아는 경력 출중한 버스차장 출신이었는데 벌써 그 아이들이 커서 나에게 공부를 하러 온 것이다. 버스종점에서 그 아이 동생을 업고 서울 간 남편 오기를 기다리던 그 애 엄마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쯤에 그 아이 집은 버스를 세 대나 갖은 부자였다. 그리고 먼 훗날 그중 한 아이는 최고의 대학을 나와 박사를 따고 교수가 되었다. 알다시피 그 후 지하철이 일상화되고 자가용시대가 찾아온다. 그 시절 달려드는 승객들에게 ‘저기 뒷차 오네요.’ 거짓말을 하고는 문짝을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던 누이들. 그들이 부지런히 날랐기에 우리는 지금 잘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버스차장이 사라진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
우리 인생도 오라이 붕붕!!하더니만 어느 참 젊은 아이들이 자리를 내준다. 못난 기억을 되살리자는 ‘그 시절 차장들’ 모임도 생겨나고 백일장도 열리는 상황이려니 지난 세월은 애닯은 기억은 다 어쩌고 그저 아련하고 그립기만 한 옛 동무같은 존재인가 보다.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고 최근에는 역사에세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를 펴냈는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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