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1960년대 그시절, 호마이까 전축
(호마이까 전축)
사람들은 집에 그들만의 특질을 갖추고 또 나름의 정서를 만들어내며 산다. 물론 선뜻 비추어지는 것들이 그 집의 전체가 될 수는 없겠지만 분위기는 금세 와 닿는다. 운동기구가 즐비 한 집엔 우람찬 근육의 사내가 있고 책이 꽉 차 있으면 공부벌레가 있다고 보아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 입시에서 낙오가 되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아이들의 등교가 끝난 후에 학원을 다닐 정도로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 무렵 고등학교에 들어간 친구네 집을 어쩌다가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엔 고등학생이라면 서클도 들고 취미도 가꾸고 하였는데 라디오로만 듣던 팝송LP판이 친구 집엔 방안 그득했다. 1년 차가 그리 달리 보일 수가 없었다. 느낌을 스스로 갖고 산다는 것이 그때처럼 소중하고 절실하게 다가서서 느껴지던 때는 없었다.
늘 건성으로 듣던 이미자 노래와 달리 팝은 폐부 깊숙이 파고 들었다. 유식한 것도 되고 나만이 갖는 특권이라고 생각도 했다. 나는 한창 그때가 사춘기였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올드 팝.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The Boxer',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Love Me Tender' 그리고 빌리 조엘(Billy Joel)의 'Piano Man' Patti Page의 <Tennessee Waltz>, <I Went To A Your Wedding>, <Changing Partners> Paul Anka의 <Crazy Love>조금은 차분한 The Brothers Four의 <Green Fields>, <Seven Daffodils>, <Try To Remember>, <500miles>, Nana Mouskouri가 부른 <Try To Remember><Over and Over>, <Only Love>....
Adamo가 여자가 아닐까 의심도 하고,때로는 비틀즈의 곡을 논하고 ,Bee Gees의 변신을 아쉬워 하고 ABBA그룹이 연인 사이가 아닌지 수군거리며 지식아닌 지식을 채웠다. 하다 못해 Cat Stevens의 Morning has broken을 어찌 해석하는지 귀를 쫑끗 하였던 때 누군가 가수들의 이면 내력이라도 들고오면 모여들어 정보를 듣고 소식통인 그 아이는 금세 유식한 아이로 등극하여 우상아닌 우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유독 LP 음악듣기를 좋아했다.
요즘 다시 LP판이 부활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서울 종로 세운상가는 1970년대에 불법 복제 음반을 찾는 청소년들로 늘 북적거렸다. 나도 그 중에 한 아이였다. 있는 집 아이들은 '빽판'이라 불린 해적판 LP(long playing) 레코드를 사러 몰려들었다. 우리는 해적판 LP를 들으며 불안한 사춘기를 비집고 나갔다.
CD 시대가 열린 후 자취를 감춘 LP판인데 반갑기 그지없다. LP는 촉감의 문화, 아날로그 시대의 상징이다. 미국과 유럽에선 은은하게 스미는 LP 사랑이 여전한데 다행이다 싶다. 한 음반사가 카라얀이 지휘하고 빈 필이 연주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비롯해 다섯 가지 LP를 최근 내놓았다고 한다.
CD는 소비하는 것이지만 LP는 소장하는 것이란 말. 아르바이트를 하여 겨우 장만한 천일사 전축, 이사 몇 번에 아쉽게 몽땅 버리고 느낌만 간직하고 지냈는데 지금에선 무척 아쉽다. LP는 깨지기 쉬운 데다 자주 닦아줘야 한다. 낡으면 찍찍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잡음에는 흘러간 세월의 먼지가 앉아 있고 그로 애착과 소유의 품격이 있다.
고음질의 CD는 소리가 깔끔하지만 왠지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비인간적이고 차가워서 싫다. " 몸은 50대, 마음은 20대. 크레이지 러브 신청합니다." 그 시절의 목소리가 다시 되어봄직도 하다. 찌든 생활, LP를 통해 옛 음악을 들으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치유되는 기분은 왜 아닐까. 요즘 LP는 구하기도 어렵고 닦아줘야 하고 걸어줘야 하니 내가 노력한 만큼 거기에 대한 가치를 얻는 것도 된다.
크기도 크고 관리하기도 까다롭지만, 표지부터 그 시절을 느끼고 친근감이 묻어난다. LP 소리의 비밀이 잡음에 있다고 설명하는 분도 있다. 평상시 듣던 소리 위주로 실내 울림까지도 다 기록을 하니 친근감이 있고 정감 있다는 말도 들어줄 만한 이야기다.
들으며 생각하는 게 익숙하다. 음악을 들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이내 녹아들고 편안해진다. 음악의 선률 안에는 사랑이 숨어 있으며 잠언같은 믿음이 깃들어 있다. 힘들어도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으면 견딜만 하듯이 음악은 그런 달콤한 마력을 지녔다.
예전엔 밤이 깊으면 고운 아침이 찾아오리라는 어느 희망으로 들었지만 지금은 저녁놀 깃든 서편을 바라보듯 무거운 짐 다 내려놓듯 마음을 씻듯 낮은 집을 향하는 귀거래사의 편안한 마음으로 듣는다.
요즘 애착이 제법 가는 러시아 풍 음산한 겨울 음악. 다소 무겁고 장중하지만 내게 더욱 고혹한 것은 우중충한 낙망함 조차도 따스하다고 여겨서 그럴 것이다. 디지털 음반에 밀려 벽장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LP 음반. LP 판을 통해 흘러나오는 명곡. 유난히 눈이 많은 올겨울,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아날로그 추억 속에 빠져 토스카니니, 칼 뵘의 지휘봉이 춤추던 거장(巨匠)의 시대에 귀를 담가 보는 것도 겨울의 호사(豪奢)가 아닐까 한다.
그런 지금의 나의 정서를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면 음악을 좋아하고 글을 만지작대는 나의 정서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내 어릴 적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로 버티어 지내던 우리 집엔 이렇다 할 분위기나 정서는 거의 없었다. 학교에 들어서서 책장도 아닌 책꽂이 란 것을 겨우 갖추었을 정도니 책상에는 교과서와 전과라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전축을 하나 사들였다. 그렇다고 정품은 아니고 당시 안양공고 학생들이 호마이까 전축을 만들어 팔 때 싸게 장만을 한 것이었다. 기념으로 아버진 LP판을 몇 장 샀는데 그때 들었던 연주 음악 중간 ‘떼킬라’라고 소리치는 댄스곡을 지금도 신나게 기억하고 있다. 가족들이 즐거워 하니 아버지로선 아마도 꽤나 거금일 것인데 뜻밖에 ‘우리나라 가요 전집’을 사셨다.
국민학교 6학년 그 나이 난 그때 시 라는 것이 짧은 구절이지만 예쁘고 슬픈 의미란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전집에 딸린 해설집에 펼쳐 논 사연 많은 해석들이 너무도 애틋하였다. 한 개인의 굴곡진 생도 그러하고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나 이 세상의 한숨이 그대로 느껴졌다. 사오십년 시대의 가요처럼 아픈 그 시대를 잘 대변한 가요가 있을까 싶다.
지금도 생각나는 몇이 있다. 한하운의 보리피리와 윤용하의 보리밭. 이 후 줄곧 난 문예반을 자청하였다. 어린 놈이 청승맞게 호마이까 전축 앞에 엎드려 판을 틀어 놓고 나그네 설음 부터 듣고 싶은 노랠 자주 따라 불렀다. 선창, 황성옛터, 찔레꽃, 신라의 달밤, 울고넘는 박달재등등 셀 수 없이 많다. 그 덕에 나는 전주곡만 들어도 무슨 노래인지를 잘 안다. 나는 그 중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와 애수의 소야곡 그리고 고복수 노랜 특히 더 좋아하였었다.
전축은 거의 내 차지였다. 바늘을 들어 판에 올리려 하면 턴테이블 가장자리에 분홍색 등이 온화하게 먼저 퍼졌다. 분홍 빛이 퍼진 작은 공간과 짧은 시간 속에서 나의 소유를 느꼈다. 연인을 알고 고독이 어떨 것이란 것을 짐작했었다. 이별이 사랑 때문에 생긴다는 것도 그때 느꼈고 따스하고 고귀한 인생의 느낌을 그때 비로소 알기 시작했다.
나중엔 구닥다리라고 남들은 버리라고 하였지만 난 버리지 않았다. 들었던 음악을 자꾸 듣는 자폐 같은 행위가 멋으로 느껴졌다. 나중엔 반복을 해 많이 들어선 지 잡음투성이가 되어 버렸고 음반이 튀는 바람에 살짝 건너뛰기도 하여 다른 곡에 열중하다가 아껴서 이제 딱 한번만 듣는다는 심정으로 맨 나중에 아주 촘촘한 느낌으로 새겨듣고 바늘을 아쉬움으로 내려놓곤 하였었다.
훗날에도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 턴테이블 쪽을 개비하여 계속 지냈는데 결국 이사 갈 때 큰 짐이 되어 아깝게 버려야만 했다. 난 지금도 그 때 가요전집의 해설집 5권과 그 음반의 소중함을 잊지 못한다. 우리 집 정서에 전혀 안 맞는 호마이까 전축이 그 당시 없었다면 나의 마음의 창에 아마도 글을 껴 넣을 수는 없지 않았나 싶다.
진정한 배고픔은 스스로 느껴지는 절실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간절함이 아닐까. 황폐함은 가을바람 찬 기운에 젖어드는 빈 마음이 아닌 느낌 없이 사는 목석연함이다. 그러기에 살갑게 그려보는 그 시절의 서정은 분명 진정한 나의 배고픔의 발로로서 호마이까 전축에 밴 어느 묵시적인 감흥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내 마음의 풍경과도 같은 것이다.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고 최근에는 역사에세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를 펴냈는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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