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1960년대 안양 풍경과 사람들(2)
(안양 시내 2)
우리 집은 닭을 키우는 것 말고도 밭에 작물을 심었다. 앞마당에는 토마토 파 들깨를 심었으며 사육장 빈터에는 감자를 심고 사이사이 콩을 심었다. 나중에 사들인 땅에는 고구마를 심었는데 수건을 쓰고 호미만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엄마를 돕자고 나와 동생은 주말이면 밭에 나갔다. 몇 번인가 수확이 넘쳐나 나와 엄마는 리어카를 빌려 남부시장이라는 농산물을 취급하는 장터에 싣고 가 내다 판 기억이 있다. 댓가가 형편없다고 인상을 찌푸린 엄마의 모습이 여직 흐릿하게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감자에 대해서는 그 시절 꼼꼼이 봐둔 기억이 있다. 감자는 저장중 한쪽에 부패감자가 발생하면 건전한 감자에도 빠른 속도로 병원균이 전염되어 전체가 부패되고 만다
저장하기가 쉽지가 않다.웬만하면 장에 내놓고 마는데 씨감자는 저장에 문제가 많았다. 귀한 씨감자는 절단한 칼을 끓는 물에 소독해 가면서 씨감자를 절단한다. 주변 고추나무와 잡풀들을 미리 태워서 만들어 놓은 재에 자른 씨감자를 굴려서 소독을 해야 한다. 절단면의 상처를 소독해서 아물게 하기 위해서 재를 묻히는 것이다. 이렇게 소독한 씨감자를 직사광선이 아닌 통풍이 되는 곳에 산광에 노출시켜서 싹을 틔운다. 감자는 심고 나서 떡잎이 올라오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감자 씨눈을 틔우는 작업이 상당히 중요하다. 틔우는 동안에도 온도, 습도, 통풍에 신경 쓰지 않으면 감자가 썩어서 씨감자를 버리게 된다.
당시 우리 밭은 동네에 소를와 쟁기를 갖은 사람이 와서 갈아주고 품을 받기도 했고 ,소나 말이 있는 집에서는 고가 이지만 타이어로 된 두 바퀴가 달린 구루마(수례)를 장만하여 유용하게 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진흙을 기와공장에 운반해 주거나 황토 흙을 벽돌공장에 운반해주거나 연탄을 운반해 주고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고, 변소의 똥을 퍼 주고 그 인분은 거름용으로 팔아 돈을 받는 일거양득의 장사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집 밭도 인분을 뒷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돈을 받고 퍼 날랐으며 그 집 돼지우리의 변도 좋은 거름이 되었다.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는 일이 많았던 그 시대에는 초기에 땅을 비옥하게 하는 데는 인분만 한 게 없었다. 당시 외국 대사가 부임을 하러 여의도 공항에 내리기도 전에 항공에서 냄새로 이곳 이겠구나 느꼈다는 것이 바로 인분 냄새 때문 이라고 했다. 그시절 시골에서 여자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삼베나 모시를 짜는 길쌈을 하는 일이었고 가마니를 짜서 내다 팔거나 새끼를 꼬아서 파는 일이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일본은 고부가가치 생산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노동력이 필요한 소비재는 임금이 싸면서 솜씨가 좋은 우리나라에 노동집약적인 일을 시켜 일본으로 들여 갔는데 60년대 대표적인 것이 가발공장과 시보레였다.시보레는 일본 전통의상에 넣는 무늬를 수 놓듯이 하는 작업으로 우리나라 아가씨들이 많이 동원 됐었다.집안을 부흥시킬려면 남자들을 가르쳐야 했고 그 뒷받침은 그 집안의 딸이 해야 했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자들은 돈벌이에 동원돼야 했다. 각종 공장은 물론,식모,다방레지,니나노 술집 색시. 목욕탕 때밀이등 정말 힘든 일,지저분한 일,위험한 일에 우리들의 언니 누나들이 동원 됐었다.
가내 수공업이라 할 수 있는 양잿물이라 통칭됐던 화공약품을 써가며 비위생적으로 만드는 과자공장에 다니거나 편물이라고 기계로 쉐터를 짜는 공장에 나가기도 했고 양송이 재배소나 통조림 공장에 나가기도 했다. 60년대는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됐던 시절이라 상의 용사가 많았다.성한 몸으로도 벌어먹을 길이 없었고 나라의 경제사정이 좋지않아 변변한 치료나 의료보호장구조차 마련해 주지 못했기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친 상이용사들은 거의가 동냥질로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민들도 삶이 녹녹치 않아 인심이 박할 수 밖에 없게되고 그러다보니 상의 군인들은 오기와 깡밖에 안남아 불량스럽게 변해간 모양이라 우리 어렸을 때 갈쿠리 달린 팔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상의 군인을 보면 무서워서 숨거나 도망을 갔었다.그 때는 거지도 많았지만 병자도 많았다.결핵 요양원이나 고천의 성ㅇ나자로 병원, 고흥 소록도의 나병환자 수용소는 공식적인 곳이었다. 나병은 사람 간을 먹으면 낫는다 하여 동네 어린애들을 잡아 보리 밭으로 끌고가 간을 꺼내 먹는다는 흉흉한 말이 돌아 나병환자가 지나가면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재활용품 수집을 하며 먹고 살아가는 도시 빈민이 많지만 당시에는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바구니를 등에 지고 손에는 길다란 집게를 들고 다니며 폐지와 고물을 줍는 “넝마주의”가 있었다.일명 “양아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즘의 “양아치”는 비겁하고 몰상식한 양심이 없는 껄렁패를 의미하지만 그 때는 종이를 주워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그런데 폐품만 줍는게 아니라 좋은 물건을 동작 빠르게 ‘휙~'’하고 뒤에 진 바구니로 던져버리면 주인은 나중에야 잊어버린 줄 알게 돼 넝마주의는 경계대상 1호가 됐다. 아마도 이런 양심없는 넝마주의들 때문에 '양아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카시미론 이불이 나오기 전 60년대는 목화를 많이 심었고 그 목화는 중요한 방한재로 수확 후 말려서 솜을 뽑은 다음 솜틀집에 가 틀어서 이불을 만들었다.물론 수집상에게 팔면 그 수집상은 방직공장으로 가지고 가 무명실을 뽑고 무명베를 만드는데 쓰이기도 했다.목화는 그 때는 참 중요한 생산물이었다.새색시 시집갈 때 필수품이 이불이었고 가난한 집에서는 아궁이에 불도 못 때고 오로지 이불로만 겨울을 나야 하는데도 솜이불마저 돈이 없어 충분히 덮고자지 못했었다.
구시장에 늘어선 자전거 가게, 자전거는 참으로 귀한 물건이었다.리어카 한 대가 6천원이었고 자전거 한 대는 8천원이었다. 중고가 4천원 했다.자전거는 공무원처럼 고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것으로 지금의 자가용 차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우리들의 부모들은 모든 통제를 가하는 공무원들이 무서웠고 부러웠다. 밀주 단속 나온 세무공무원, 나무 한다고 시비 거는 산감,불법 의료행위 한다고 조사 나온 보건소 직원들 모두가 무서운 공무원들이었다.
그 때는 양복은 무조건 맞춰 입었다. 새시장 건너편 시흥군청이 있던 곳에는 양복점과 양화점이 늘어섰는데 와이셔츠까지 맞춰 입는 사람도 있었다. 양복점 간판은 "ㅇㅇ 양복점"이었고 좀 세련된 게 “ㅇㅇ라사”였다. 여자들의 맞춤옷 가게는 대부분 “ㅇㅇ 양장점”이었다.‘제일라사’’화신라사’’조흥라사’'명품 양복점'등이 있었는가 하면 '뉴스타일 양장점''노라노 양장점'등 양복점이나 양장점 이름은 어디가나 비슷한 명칭이었다. 구두를 만드는 양화점은 주로 외국 도시 이름을 많이 썼는데 얼핏 기억나는 것이 '뉴욕 제화점'이나 '이태리 양화점' 칠성 양화점이다. 그 쯤 전자제품의 편리함을 알게된 국민들 속에서 수요가 늘어나자 수리와 판매를 동시에 하는 "ㅇㅇ전파사"나 "ㅇㅇ 소리사"간판을 단 가게들이 생겨났다. 귀금속 가게는 "정금당""명문당"등 주로 세 글자로 된 간판들이 많았다.
요즘의 커피숍이 당시에는 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름도 어느 지역이나 거의 같았다.”역전다방””중앙다방””터미널 다방””장미 다방” .그 때 다방에서는 쌍화차가 제일 비싸게 팔렸고 아침에 마시는모닝 커피에는 어김없이 날계란을 줬다.저녁에는 “티”라고 하면서 양주를 한 잔씩 넣어 팔았다고도 한다.그 때는 인건비가 싸서 그랬는지 여자 값(?)도 참 저렴했다. 차 한잔만 시켜주면 다방 아가씨들 가슴을 만져볼 수 있는 시대였으니 말이다.국민소득과 인건비는 비례한다. 특히 여자 값은 더더욱 밀접한 것같다. 그나마 다방 수는 이용객과 비례하기에 도심에 몇군데 있었으나 일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많았으니 다방 한 개소에 여종업원이 대여섯씩 있었다.
그 중 얼굴이 제일 예쁜 아가씨를 홀에 고정으로 앉혀두고 좀 못생긴 아가씨는 배달 전문으로 뛰게 했다.70년대에는 산업화로 돈을 버는 인구가 많아져 유흥업소도 비례적으로 늘었지만 60년대만 하더라도 다방은 정말 사치스러운 곳이었을 것이다. 두서 없이 쓴 이 글은 내 집부터 안양시내로 내려오며 펼쳐진 광경들을 잡화상처럼 열거하여 꾸민 것이다. 60년대 초에는 어림도 없던 풍경들인데 60년 대 말 부터 해서 늘어서더니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었다.
그런 모양새는 어느덧 또 40년이 훌쩍 지나 당시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잊혀질 망각의 대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시장통에 70년대식 상가로 남은 것들이 별로 없다. 자전거, 구두, 양복점, 다방이 이제는 추억의 향수로 아득히 멀어져 가고 말았다. 그래도 살아남은 국밥집에 몇몇 음식점을 보자면 물론 이 또한 파자집에 색다른 음식집으로 대부분 변하였지만 그래도 먹는 풍속은 어절 수 없지 싶고 그 시절 같은 친근감을 갖게도 한다.
나는 그 시절의 엄마를 말하자면 곱다란 모습 보다는 그시대의 척박함 처럼 억척스런 모습을 먼저 연상한다. 그 시절 고구마에 감자를 싣고 당당히 시장을 향하던 우리 엄마, 나는 끈질긴 엄마의 인고 덕분에 오늘을 편히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웬지 우리 엄마가 그 시대를 그대로 닮아 척박한 모습으로 변한 것도 같아 못내 아쉬울 때도 있다. 우리 집은 돈 한 푼도 꼼꼼이 따지는 경제 관념이 투철한 엄마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곤곤했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그시대를 산 부모들은 대개 돈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한 경우가 많다. 이는 그 시대가 대신 말을 한다 싶다. 한 시대를 가족을 위해 맨 몸으로 산 엄마는 그 시절의 중노동 탓인지 허리를 거의 쓰지 못한다. 그러니까 엄마의 끊어질듯 아픈 허리는 그 시절 내가 좋아하던 팝송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곡이 전하는 의미와도 같은 고귀한 희생인 것이다. 하지만 감미로운 그 팝의 첫 소절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나는 여직 이를 제대로 실천도 못하고 꾸역꾸역 나이만 먹고 있다.
"당신이 지쳐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낄 때,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내가 그 눈물을 닦아드리겠습니다.살기 힘들고 친구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순간에내가 당신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고 최근에는 역사에세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를 펴냈는데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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