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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숨결을 찾아 의왕 안자묘(安子廟)

안양똑딱이 2016. 5. 5. 18:58
[정보통]역사의 숨결을 찾아 의왕 안자묘(安子廟)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철도대학 뒤편에는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을 처음 전한 고려시대 유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년) 선생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은 원래 순흥(順興) 안씨 후손들에 의해 황해도 장산군 신서면 늘목리 대덕산에 설치됐으나 해방과 함께 국토가 남과 북으로 갈리자 선생의 24대 종손 안재찬(安在燦.84)씨가 1947년 남으로 내려오면서 신주를 서울로 모셨다.

안씨는 이어 1977년 의왕시 월암동에 터전을 잡고 현재의 위치에 사당을 지었다.

사당이 들어선 전체 부지 면적은 1천500평으로 입구에 비석이 있고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팔각지붕에 붉은 단청을 한 3칸 한옥이 나타난다.

사당 가운데 처마밑에는 '안자묘(安子廟)'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현판은 공자의 76대 후손인 연성공 공영이 선생이 썼다고 전한다.

공영이 선생은 1917년 공자의 고향인 중국 궐리를 방문한 우리나라 유림들로부터 안향 선생의 신도비명을 요청받고는 "성인의 도를 밝혀 600여년 동안 빛나게 한 사람은 회헌 안자(安子)다"라며 최고의 자(子)자 호칭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유학사상을 들여와 정립하고 교육사업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던 안향선생은 고려 고종 30년(1243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18세 되던 원종 원년(1260년) 과거시험에 급제, 교서랑이란 관직을 얻어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고려는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된 60여년간의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오랜 전쟁관계에 있던 원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시기로 전래의 미신과 샤머니즘이 성행하고 있었다.

헛된 미신과 괴력에 의지해 어려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안향은 미신타파에 앞장서게 된다.

선생은 상주 판관에 부임했을 당시 무당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민중을 교란하고 일부 지방수령 가운데 이를 동조하는 세력까지 나타나자 무당에게 곤장을 때려 족계(足械:발을 매는 형틀)를 채웠다.

무당이 신을 빙자해가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위협해 주민들마저 두려워했지만 안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벌을 내려 상주지방의 미신을 타파했다.

선생이 조선조 500년 통치이념인 주자학을 도입한 것은 충렬왕 15년(1289년)으로 당시 왕과 공주를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다.

그 곳에서 안향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크게 감명받아 책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돌아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전래된 최초의 일이다.

그는 단순히 주자학을 들여온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고 가르쳐 주자학의 착근에 많은 공을 들였다.

또 백이정, 이제현과 같은 학자들을 원나라로 보내 주자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게 했다.

1303년에 국학부흥운동을 일으키고 김문정 등을 원나라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초상화,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 및 서적 등을 구해오게 했다.

특히 왕에게 건의, 관리들로부터 기부금을 거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킨 뒤 인재양성에 사용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같은 것으로 당시 국자감 운영에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안향은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충렬왕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문성공(文成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은 안향의 고향인 죽계 백운동에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이 서원은 1549년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명종(明宗)의 친필 사액(賜額)이 내려졌는데 이는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안향 선생의 신주가 모셔진 의왕 안자묘에서는 매년 음력 9월12일 선생 탄신을 기념하는 제사가 후손들에 의해 거행된다.

선생의 24대 종손으로 안자묘를 관리하는 안재찬씨는 "선생께서 주자학을 도입했을 당시 고려는 무신집권에 따른 정치적 불안과 불교의 부패,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 안팎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다"며 "이런 때에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보급함으로써 민생을 구제하고 조선조 500년의 통치이념을 제시한 분"이라고 말했다.


2003-05-31 16: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