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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전설-뱃사람의 목숨을 구한 망해암 스님

안양똑딱이 2016. 8. 17. 22:13

 

안양시 안양2동에 있는 망해암은 탁 트인 조망으로 안양 시민들의 많은 사람을 받고 있는 안양 8경 중 하나다.

망해암에는 옛날부터 내려오 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그 전설의 내용이 뱃사람과 관련되어 있어 더 재밌다.
바다와 인접하지 않은 안양에서 뱃사람과 관련된 전설 이라니? 어떤 전설이 망해암을 따라 흐르는지 옛 이야기 속으로 들 어가보자.

안양 전설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
 다양한 전설들이 많이 전해 져 오지만 제일 큰 특징을 보자면 산과 우물에 대한 전설이 많다는 것이다 . 그 이유는 안양의 주변에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영산 이라고 할 수 있는 산들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고 ,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찰이 자리하고 있기 에 많은 도인들이 기거했기에 생겨난 것이라고도 한다 .
망해암에 전해져오는 뱃사람과 관련된 전설은 안양 전설의 큰 줄 기인 산과 암자의 이야기이면서 안양과는 관계가 없는 바다의 이 야기가 포함되어 있어 더 특색있고 재미있다 .
신라시대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망해암은 안양 시가지는 물론 멀리 서해 바다를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곳 에 위치한 절이라고 해서 ‘ 망해암 (望海庵 )’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는 삼남 지방에서 조세를 받아 해로를 통해 한양으로 운반했다 . 각 지역의 특산품은 물론 곡물 , 과일 등 다양한 조세가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이동했던 것이다 . 이런 배들은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
이렇게 조세가 운반되던 어느 날 곡물을 실은 여러 척의 배들이 인천 앞바다를 지날 무렵 몹시 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에 선원들은 당 황할 수 밖에 없었고 ,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당황 하여 놀란 뱃사람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정신을 못차리 고 날뛰고 있었다 .
그런 와중 뱃머리에 함게 배를 타고 다니던 뱃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스님이 나타났다. 놀란 뱃사람들은 스님에게 물었다 .
"누구십니까 ?”
스님은 거센 파도속에서도 뱃머리에 흔들림없이 서서 뱃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
'그대들은 너무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을 들으라 . 잠시 기다리면 이 모든 풍랑이 멈출 것이니 잠시 진정하고 있거라 ’
그렇게 말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풍랑이 잠잠해지며 하늘이 맑아졌다 . 어찌된 연유인지 신기하기만 한 뱃사람들은 스님에게 물었다 .
"대사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 어찌되었든 저희를 풍랑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뱃사람들의 질문에 스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뱃사람들은 다시 물었다 .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 ?”
스님은 “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한다.
뱃사람 일행이 한강까지 무사히 닿은 뒤 생명의 은인이요 , 신통 했던 그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가 보았지만 그런 스님은 계시지 않았으며 , 그 스님과 용모가 흡사한 모습의 부처님이 법당 안에 모셔져 있음을 보았다 .
그들은 부처님의 중생 구원의 자비신력 으로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 이를 임금님께 아뢰니 이를 가상히 여기신 세종대왕은 그 후로부터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분부하였는데 , 이러한 공양미는 그 후 400 여 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

 

망해암에 대한 소개


망해암(望海庵)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41-54번지 관악산 동남기슭에 위치하는 조계종 사찰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번 국도를 타고 평촌에 이르기 직전 대림대학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대림대학 정문을 지나 마을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마을이 끝 날 때 쯤 부터 산길로 약 2㎞정도 오르면 된다. 소형차는 망해암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산행삼아 관악산의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2㎞ 정도 걷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망해암에 오르면 구 안양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절은 기암괴석들 사이로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최근에는 앞에 대형 누각건물을 지어 마당공간을 확보했다.
1986년에 새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사찰이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두 스님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는 그 스님들을 계맥하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하였다. 
지금은 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223㎝인데 지금은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안양 상공은 비행기 항로의 광화문 사거리

망해암에서 50여 미터 더 올라간 비봉산 정상에는 1950년대 설치된 관악산 무선표지국이 있다. 이곳은 지상항법 유도장비인 ANYANG VOR(VORTAC)가 있어 비행기들의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
지상으로 자동차, 사람이 다니기 위해서는 길이 있듯이 하늘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지정된 길(항로)이 정해져 있다. 특히 안양은 비행기 항로의 심장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안양상공을 오가는 비행기가 많아 꽤 복잡한 지점이다.
VOR이란 VHF Omni-directional Range 라는 뜻으로 VOR 지상국은 360도 전 방향으로 전파를 방사하여 항행하는 항공기에 방위정보를 알려 주는 장비로 하늘의 길목에도 이를 가리키고 유도하는 등대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일종의 "무선국"이다.
VOR의 주 임무는 항공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공항의 방위각정보, 즉 방향을 제공하는 시설로 선박으로 치면 항해지도에 해당하는 엔루트챠트(En-route Chart)에 군데군데 VOR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주파수 108∼118MHz, 출력 50∼100W의 정현파(正弦波)로 변조한 9,960Hz 전파를 전 방향으로 쉴 사이 없이 발사하고 있어 항공기는 이 신호를 받아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 공항의 방향과 남은 거리 등 정보를 얻게된다. 
안양 관악산 상공은 지도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의 한 가운데에 있고 여러 항로가 만나고 갈라지고 있어 가장 붐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 항로의 간선 교차로가 되는데 도로로 치자면 광화문 사거리 정도에 해당한다.
관악산 정상의 안양 VOR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가면 인천공항이나 중국으로, 동쪽으로 가면 강릉, 일본, 미주로 가는 항로가 되고 남쪽으로는 제주, 광주, 동남아, 호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항로가 된다.
항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항로란 사전에서 보면 항공기가 다니는 비행경로로 공중에 설정된 일정한 폭(이를 보호공역이라 한다)을 지닌 통로로 항공로라고도 한다. 중심선 좌우 폭이 최소 4nm(7.4km)씩 이므로 8nm(14.8km)의 띠 모양의 공간이다.
이들 항로에는 군데군데 VOR이 있어 일종의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즉 비행기는 VOR 상호간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날게되는데 이를 VOR의 첫 글자를 따서 빅터항로(victor airway)라고 부르며 국내 항공로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행기는 항로의 중앙선을 따라 비행하며 동일방향 동일고도를 비행하는 항공기와는 서로 시간차를 두고 같은 방향, 다른 고도의 항공기끼리는 29,000피트 이하에서는 2,000피트 차이를 두어 분리하고 29,000피트 이상에서는 4,000피트 씩 간격차이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