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32년 안양 양짓말에 건립한 조선직물

안양똑딱이 2016. 9. 17. 14:10

 

#안양 #양짓말 #안양3동 #조선직물 #금성방직 #대농/ 1932년 안양 양짓말(현 안양3동 대농단지)에 건립한 조선직물 주식회사의 조감도로 안양의 원로이신 장배순님이 소장하신 자료 카피본입니다. 
안양은 안양천, 학의천, 수암천 등 곳곳의 하천으로 풍부한 수량과 맑고 깨끗한 물로 굴뚝공장 특히 섬유와 제지공장이 많았지요.
시간을 거슬러 일제강점기로 가면 안양3동에는 비행기 생산시설이, 박달동에는 9개 부락주민을 내쫓고 탄약과 만주로 부터 오가는 물자를 저정하던 군용지가, 안양9동 병목안에서는 경부선 철도 복선화 가설용 자갈 채취를 위해 채석장을 만들고 운반용 레일을 가설하는 등 군사기지나 다름 없던 곳이지요.
사진속의 공장은 1932년 안양3동 양짓말(현 안양공고 북쪽)에 건립한 조선직물주식회사로 담장의 길이 십리나 될 만틈 규모가 거대했는데 이곳에서는 옷감 용도의 광복을 생산했지요. 
이 공장은 숨은 얘기가 많은 곳입니다. 1945년 광복을 앞둔 1944년 화신그룹 총수 박흥식이 조선충독부의 요청으로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시제품기 1.2호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그야말로 항공기산업을 시작한 엄청난 자리이지요.
안양의 원로건축가 최승원 교수의 자료수집과 연구에 따르면 안양 중앙로의 안양우체국-안양여고사거리를 50M로 계획한 것은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안양~과천간 철도계획, 一洞里와 二洞里에 전기를 먼저 가설, 안양읍 飛山里일대 비행장 건설 착공 및 철도 계획 45만평 등도 당시에 계획했다네요.
또 광신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1944년 11월부터 1717명 광주에서 기본훈련후 나고야 만주로 보내 실습후 안양공장 만주공장 배치)
군포역 인근에도 비행장 건설에 착수(개성에서 학생들이 기차로 와서 노력 동원) 하였다네요.
박흥식은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 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이 곳에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에는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차출된 징용자들이 대부분이지요.
이 때는 태평양전쟁이 절정단계에 이르렀을 때임에도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 제출하고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설립허가를 받은후 10월 2일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하여 설립에 나섭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1944년 3월경 박흥식이 일본에 직접 가서 기술과 자재의 지원을 요청하고 중일전쟁 폭발일인 7월7일 항공제조사업 허가서 제출하는 등 전쟁 막바지에 군수품 생산을 꾀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서울시가 기록한 서울6백년사의 '조선비행기공업'과 화신그룹사 등의 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흔히 박흥식이 안양에 건설한 조선비행기주식회사에서는 전투비행기 시제품만 생산했을뿐 일제패망으로 비행기는 생산하지 못하고 그만둔 것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19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기록을 통해 드러납니다.
또 박흥식은 자신이 경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 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을 통해 새로 밝혀지는 등 실제로 전쟁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안양에서의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공장에서는 건축가 김중업씨가 일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는 일제 패망이후 미군에 의해 생산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한 채 무죄판결을 받은 박흥식은 조선군사령부로부터 조선비행기에 투자한 금액과 격려금까지 받습니다.이후 비행기생산공장은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에 의해 방직회사로 다시금 변모하게 됩니다.
자료를 보면 이 공장은 1948년 10월 금성방직이 인수하고 1967년 대한농산(대농)에 매도된 뒤,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어 안양에서 첫번째 대규모 주택단지로 바뀌게 된다. 지금도 이곳을 대농단지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네요.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는 것이 금성방직 안양공장의 시초이지요.(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는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을 인수하는 등 공장 확대에 나섭니다.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으로 금성방직에 인수되었다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농에 매각돼 아파트단지(현 안양1동 주공아파트)로 바뀌었습니다.
사진출처/ 최승원 교수님 블로그 http://blog.daum.net/archvisu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