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37년 안양공립보통학교(안양초) 6회 졸업 기념사진

안양똑딱이 2016. 9. 21. 14:57

 

안양공립보통학교 6회 졸업(1937년) 기념사진으로 도포와 일본식 교복을 입은 학생과 두루마기와 양복에 모자와 나비넥타이, 일본옷을 여교사까지 당시의 의상들을 볼 수 있다. 사진을 촬영한 뒷쪽의 학교 건물은 나무로 지어진 일본식 형태로 보인다.

안양보통학교는 1929년 개교했으며 2015년 86회 졸업생까지 무려 38,186명을 배출한 안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 학교다.
일제강제기 초반에는 안양에 소학교가 없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먼 거리에 위치한 군포보통학교나 과천, 안산까지 등교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학교 건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안양 유지들과 주민들이 기성회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안양산업사 엄기승 사장과 당시 초대 서이면장인 조한구 씨도 학교 건립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자금은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안 동아일보에서 전국에 대대적인 홍보를 해줬다. 전국에 있는 많은 국민들이 성금 모금에 동참했고, 일본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모금운동은 성공리에 이뤄졌다.
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가 개교했다. 현재 안양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처음에는 4년제로 유지되다가 후에 6년제로 바뀌면서 안양 교육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학교 정문이 당초에는 만안로변에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가 자리한 곳은 주접동과 남부동 사이에 있는 교하동(校下洞.敎化洞) <안양5동> 마을로, 구 한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으로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인 일제강점 후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라 한다.
교화동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그 아들이 서당 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노력 끝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직 이곳 마을에 향교를 짓고 우매한 백성을 가르칠 것을 임금에게 아뢰자, 이에 감탄한 임금이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지어주고 敎化堂으로 명명해 주었는데, 그 후부터 이 주변의 마을을 敎化洞으로 부르다가, 1927년 안양국 민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밑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校下洞 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한편 안양초교보다 더 오래된 학교는 과천초교와 군포 초교다. 군포초교는 1919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다음해인 1920년 4월 1일에 군포공립보통학교로 설립됐다.
당시 【매일신보】는 1924년 11월 27일자에서. 군포시는 당시 행정구역상 시흥군 남면에 속해 있었는데 호수가 700호 미만의 작은 면이었으나 일찍이 교육과 산업에 대한 노력이 남달라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열의로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고 그 설립이유를 적고 있다.
특히 일제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당시 대부분의 소도시 초등학교 과정은 4년제로 중학교로의 진학이 어려운 실정이었으나 군포공립보통학교는 인근에서 유일하게 6년제 학교로 설립이 되었으여 이 때문에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려면 6년제 학교인 군포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할 수 밖에 없어 주변지역인 의왕이나, 안양, 안산, 광명, 시흥지역에서 까지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아 1930년대까지도 통학난을 겪었다고 한다 

 

1929년 12월 20일 안양공립보통학교 개교 (설립인가 7월 4일, 2학급 편성)
1931년 3월 16일 제1회 졸업식
1938년 4월 1일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월 1일 안양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85년 9월 10일 병설유치원 개원 (2학급 80명)
1994년 6월 27일 병설유치원 종일반 1학급 개설 (계 3학급)
1996년 3월 1일 안양초등학교로 학교명 변경
1996년 5월 25일 학교 체육관 준공
2013년 9월 1일 제28대 정윤수 교장 취임
2014년 2월 14일 제82회 졸업식(282명) / 총 졸업생 누계 38,186명
2014년 3월 1일 45학급 편성(특수 2학급 포함)
2015년 2월 13일 제83회 졸업식(202명) / 총 졸업생 누계 98,388명
2015년 3월 1일 45학급 편성(특수 2학급 포함)

 

 

“90년의 세월도 나그네길일 뿐 아니겠나”

안양공립보통학교(안양초) 1회 졸업생… 이경수 옹

 

전쟁 뒤 손목시계 하나로 재기에 성공해
“나에게 남은 여생은 교회일 돕고 싶어”

 

“일본군으로 갔던 남양군도에서 1년9개월 만에 돌아오던 날이었어. 도쿄에서 하루를 묵고 요코하마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데 구명조끼를 하나씩 나눠주는 거야. 어쩐지 ‘여기까지 와서 죽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
일본군으로 끌려가 2차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던 스무 살이 갓 넘은 이 앳된 청년은 다행히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안양에서는 귀향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너무 슬프면 눈물이 안 나오지만, 너무 기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거야.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서 쏟아지는 눈물이 내 눈으로 보이더라구”


1928년 개교한 안양초등학교(당시 안양공립보통학교)는 안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초등학교다. 이 학교 1회 졸업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이경수 옹(1918년 3월17일 생)을 만나게 된 것은 스톤앤워터(관장 박찬응)의 ‘기억프로젝트’ 덕분이기도 했다. 이윤진 큐레이터는 친절하게 섭외까지 도와주었지만, 막상 이경수 옹을 만나려니 덜컥 겁이 났다. ‘90년 동안 살아온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감히 어떻게 써 낼 수 있을까’


안양공립보통학교가 생겼을 때 전교생은 45명에 불과했다. 11살 이상은 2학년으로 그 미만은 1학년으로 편입됐다. 시설이나 교사수도 부족했기 때문에 4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자 긴 나뭇가지에 가마니를 묶어서 흙이나 돌 퍼 나르는 일을 했어. 운동장 만드는 일도 학생들 일이었거든. 온통 빨간 진흙이 묻어서 옷이니 몸새니 형편없었지 모야”


4학년을 마치고 교장의 추천서로 군포초등학교로 옮기면서 형편(?)은 조금 나아졌다. “안양에 통학생이 나밖에 없었어. 전교생 돈을 모아 안양우체국으로 저금하는 일을 맡으면서 풀 깎고 퇴비 만드는 잡일은 면제가 됐어. 허허” 군포초등학교 14회로 졸업한 이경수 옹은 수리산 끝자락 양짓말에 있는 한글서당에 2년을 더 다니게 됐다. “그때 왜 중학교로 가지 않았나 모르겠어. 아무튼 서당을 나온 뒤로 장사를 하고 싶더라구”


당시 이경수 옹의 아버지는 과자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안양역 철길 조금 위에 다리가 있었어. 지금은 복개해놔서 모르지. 다리 못미처 둘째 집 과자공장이 우리 집이었어” 설탕배급을 맡기도 한 그의 집에서는 눈깔사탕을 나눠주기도 했는데, 그걸 받으려 늘어선 줄이 안양역 로터리까지 이어질 정도로 꽤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6.25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니 그 공장은 폭격을 맞아 다 없어져 버린거야” 모든 가족들의 실의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경수 옹은 가지고 있던 손목시계를 팔아 자전거부터 샀다고 한다.

 

“영등포에 큰 과자도매상에 가서 조금씩 물건을 떼다가 우시장 인근에서 과자를 팔았어. 근데 그 도매상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돈 걱정은 말고 많이 가져다 팔라’고 말하는 거야. 우리 가게를 본적도 없으면서 말이야. 그때부터 조금씩 가세가 일어나기 시작했지” 이후 이경수 옹은 과자도매점 3곳을 가진 것은 물론 롯데라면(현 농심) 대리점까지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게 됐다.


나이 60이 넘어서면서 그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게 됐다. “남부시장에 누가 중국음식점을 해보라고 해서 하게 됐지. 근데 영 술을 같이 판다는 일이 마음에 걸렸어. 교회에 몸담은 장로가 할 일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 했어” 그는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 등에 개척교회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중국을 비롯해 사이판에도 교회 설립을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나그네 같은 인생 마치면 영원한 나라로 가는 것 아니겠나”


안양제일교회 임칠호 장로는 장학기금명감에서 “이경수 원로장로의 발자취를 찾기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크고 확실해서 한정된 지면에 옮겨 쓰기가 오히려 쉽지 않다”고 말할 정도다.
안양초 1~8회 졸업생은 35년 전 동창회를 만들어 지금도 2달에 한 번씩 모이고 있다. 2005년에는 효행상을 만들어 100만원의 금액을 시상할 만큼 활동이 활발하다.


“(기억프로젝트)전시회를 하는데 안양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면서 말을 하라고 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아나. 다만 새로운 문화 때문에 가정문화가 허물어져 가는데 효행이라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손병학 기자 (안양시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