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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군포장-부천 버스 운행한 소신여객

#군포 #부천 #소신여객 #기록 #기억/ 1930년 합자회사로 출발해 현재도 31개 노선에서 운행되고 있는 경기도 부천의 대표적인 운수회사인 소신자동차부(소신여객)의 1939년 11월 1일 촬영한 모습으로 지금의 부천역 남부,조흥은행 동쪽 건너편이다. 소신여객의 소신은 설립 초기 운행 구간이었던 소사리(素砂里, 현 부천시 소사동 및 소사본동, 신천리-현 신천동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새해 첫날을 기념하여 운전기사, 종업원 등 직원들이 함께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오른편 간판에 버스가 운행하는 신천, 포리, 안산, 반월 군포장이란 글자가 보인다. 출처: 부천시 홈페이지 http://btv.bucheon.go.kr/site/program/board/photoboard/view?currentpage=1..

[자료]1919년 3월 군포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1919년 3월 군포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독립기념관 기록(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056)에 의하면 1919년 3월 31일 군포.안양.의왕 경계지점이며 상업적 요충지였던 군포장(軍浦場, 현재 안양시 호계동 구군포사거리 인근)의 장터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군포장은 시흥군 일대에서 꽤 큰 장(5일장)이 열리던 곳으로 당시 군포장에 모인 2000여명의 시민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경찰관 주재소(현재 군포역앞)까지 약 1.8㎞를 행진했으며 4월 1일에도 군포장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했다. 만세시위지인 군포장 경찰관주재소 터 현 주소는 군포시 군포 1동 750-8(옛주소: 시흥군 남면 당리)로 당시 일본경찰은 군에 보병 출..

[자료]1963년 남한강에서 숨진 안양 흥안초교생들 이야기

50년전 남한강에서 숨진 안양 흥안초교생들 안양과 여주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교명이 바뀌었지만 현재의 안양 남초등학교는 1960년대 흥안국민학교로 불리웠다. 특히 노년의 졸업생들에게 여주하면 슬픈 추억이 서려 있다. 신륵사로 소풍갔다가 남한강에서 익사한 선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63년 10월 23일 안양시 흥안초등학교 5·6학년 학생과 교사, 학부모 총 158명이 여주 신룩사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귀가하던 오후 2시 50분 무렵 여주읍 연양리에서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를 건너다니던 조포나루에서 일행을 태운 나룻배가 침몰하여 학생을 포함한 교사·학부모 등 49명(남학생 15명, 여학생 22명, 교장을 포함한 학부모 12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자료]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꾸며져 있는“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이라고 씌여진 충혼비를 우선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하게 되는데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관계자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가상한지 알 수 있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워싸이는 화단은 어찌 보면 이 연구소 구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가축의 전염병 및 기타 질병의 예방 연구 기능을 하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상 3층 건물로 T자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최병렬]문화유산 안양 소방망루를 아십니까?

소방망루를 아십니까. 통신수단이 귀하던 시절 화재가 났을때 소방차들이 출동할 수 있도록 화재 발생 여부를 감시했던 추억과 역사속 유물이지만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안양소방서 안양119치안센터에는 전국에 몇개 남지 않은 소방망루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요즘과는 달리 예전에는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서면 시야가 넓게 트여 불이 나면 현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하루종일 화재를 감시하던 탑을 '소방 망루'라고 하는데 망루위에는 망루 요원이 24시간 주·야로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징후가 있으면 타종과 싸이렌을 통해 화재발생을 알리고 출동대원에게 이를 신속하게 알리는 역할을 했지요. 기록을 보면 한국역사상 소방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최..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행정구역의 변천] 안양지역의 모체인 시흥군은 고구려시대에 잉벌노현에 속했다가 934년 고려태조때 금주로 개칭되면서 衿川으로 불려왔다. 조선세조 원년인 1456년 과천에 병합되었다가 정조19년에 시흥으로 개칭되었으며 1895년 고종32년에 시흥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3월 1일 시흥, 안산, 과천의 3개군이 통합 시흥군이 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면서 안양은 전원도시로 발돋움해 오다가 급격한 도시발달로 1973년 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었고 86년 1월 1일 과천지구출장소가 과천시로, 반월지구출장소가 안산시로, 89년 ..

[20170317]의왕시 공무원 승진전보 인사

의왕시 인사 6급 승진 및 전직‧전보(3월 21일자) ◯ 6급 승진 △사회복지과 최미선 △행정지원과 원선아 이용승 △도시정책과 이귀숙 △보건사업과 정천익 ◯ 6급 전직‧전보 △회계과 유대현 △기업지원과 이미경 △내손1동 윤정자 - 이상 3월 21일자 의왕시 인사 6급 전보 및 보직부여(3월15일 및 21일자) ◯ 6급 전보 △차량등록팀장 소정영 △기후환경팀장 최명식 △정수팀장 윤창호 △하수정비팀장 박상태 △내손1동 사무장 신미경 – 이상 3월 15일자 △청계복지관팀장 한옥수 - 3월 21일자 ◯ 6급 보직부여 △건축관리팀장 김희수 △독서진흥팀장 이복남 - 이상 3월 15일자

[20170317]의왕 화재, 단독경보형 감지기 효과 톡톡

3월 17일 새벽 3시경 의왕시 월암동 소재 비닐하우스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닐하우스 내부 화훼류, 집기류, 가재도구 등 비닐하우스 3개동을 불태우고 소방서 추산 1천5백만원의 피해가 났지만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비닐하우스 안에 설치된 단독경보형 감지기가 조기에 작동해 관계인의 신속한 대피 및 신고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안양소방서에 따르면 불이 난 비닐하우스는 과거 의왕소방서에서 인명피해 및 재산피해 최소화를 위해 설치해준 단독경보형감지기 3개(각 동설치) 및 소화기 5대가 설치되어있어 소방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해 초기진화 시 적극 활용하여 신속하게 대처가 가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비닐하우스 화재는 연소 확대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자칫 대형화재로 번질 수 있어 위험한데 이번 비닐하..

[자료]1919년 3월 의왕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의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아시나요? "수원군의 의왕면 고천리에서는 삼월 삼십일일 밤에 다수한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경관주재소에 대하여 폭행을 함으로 수원주둔병대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는데 주모자로 인정할 만한 자 46명을 체포하였다가 그 이튿날 41명만 태형에 처하여 방송하였다더라."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 주민 800여명(당시 의왕 주민 수는 2천여 명에 불과했다)은 의왕면사무소(현 고천동주민센터)에 모여 고천경찰관 주재소(현 고천약국 부근)와 지지대 고개까지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주민들과 함께 기독교인들과 천도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와 일본군 육군성에서 1920년 12월 30일 발행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보면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

[기억-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수필 집 문을 열며/ 마음의 고향 시골에는 폐교가 많다. 가르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인데 정말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게임방에 PC방 노래방 만화방 쯤 갖춘 소읍은 나와야 학원도 보이고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렇게 불러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동요를 요즘은 더 이상 찾지들 않는 것도 같다. 내 어릴 적은 응원가가 바닥이 나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이어서 부르곤 했다. 고향의 정서는 결국 고향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동요의 끝머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구절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내 세대는 떠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득하지 않은가 한다. 이 나라 산천이 괄목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