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679

1970-1990년대 안양유원지로 피서온 사람들

#안양 #기록 #안양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여름 #피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지요. 피서 풍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지만 일상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답니다. 안양유원지 계곡에는 물이 참 많았답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말에는 관료들의 피서지였고,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는 계곡을 돌로 막아 안양풀이라 명명하고 유원지입구 철길에는 임시역이 만들어지고 열차가 정차할 정도로 역사도 참 오래되었으며, 1970년대 초에는 한해 여름 100만 인파가 안양유원지로 피서올 정도로 수도권의 대표적인 피서지였지요. 안양유원지 계곡 초입에는 제1풀, 제2풀 공짜풀장이 ..

1970년대 입장료 받던 안양유원지 매표소

#안양 #기록 #안양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여름 #매표소 #국민관광지/ 1970년대 100만 인파 몰렸던 안양유원지 매표소 풍경으로 현재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진입 다리(삼성2교) 오른쪽의 산자락입니다. 안양유원지는 1969년 1월 2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안양풀 대신 안양유원지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열차가 서는 임시 안양유원지역 입구에는 아치모양의 철구조물에 '안양유원지'라는 간판이 나붙고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유원지 관리를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19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발길이 끊깁니다. 더욱이 1977년 사상 유례없는 안양 ..

안양유원지의 어제와 오늘(1997년11월18일자 동아일보)

#‎안양‬ ‪#‎안양유원지‬ ‪#‎안양풀‬ ‪#‎동아일보‬/ 1997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안양풀이 개장했던 1932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는군요. 「경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승지(勝地)는 많은데 수영장은 별로 없다. 안양은 곳곳에 녹음이 무성하여 하기(夏期)는 각 학생의 림간(林間)학교 피서지로 유명할 뿐더러 추기(秋期)에는 관풍습률(觀楓拾栗)의 승지로 이름있는 곳인데 겸하여 수영장이 완성되면 금상첨화로 안양 일대는 관악산 아래에 낙원지가 되어 지방 발전은 더욱 번영하리라고 한다」. 1932년 7월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안양유원지 관련기사이다.

안양풀장에 인파(1935년8월16일자 동아일보)

‪#‎안양‬ ‪#‎안양유원지‬ ‪#‎안양풀‬ ‪#‎동아일보‬/ 1935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안양풀의 옛 모습과 함께 1935년에는 매일 안양 거주 인구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수천명의 피서객이 찾으면서 한달도 안돼 2만8700여명이 찾는 등 삼성산 계곡에 안양풀이 생기고 난후 매년 피서객이 늘어나고 있다는 글도 실려 있네요. 참고로 안양의 인구 변천사를 보면 최초의 인구 자료는 영주 35년(1759년)의 호구조사인데 현재의 안양의 석수동, 박달동을 제외한 나머지 안양지역에 속한 하서면의 인구가 1515명이고, 1912년에는 3412명, 1925년 6165명, 동아일보 기사가 실렸던 1935년 당시에는 8957명, 1941년(안양면 승격) 10000명, 1949년(읍 승격) 20021명, 197..

안양풀장 개장 기사(1932년7월21일자 동아일보)

‪#‎안양‬ ‪#‎안양유원지‬ ‪#‎안양풀‬ ‪#‎동아일보‬/ 1932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안양 석수동에 안양풀이 개장한다는 기사입니다. 「경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승지(勝地)는 많은데 수영장은 별로 없다. 안양은 곳곳에 녹음이 무성하여 하기(夏期)는 각 학생의 림간(林間)학교 피서지로 유명할 뿐더러 추기(秋期)에는 관풍습률(觀楓拾栗)의 승지로 이름있는 곳인데 겸하여 수영장이 완성되면 금상첨화로 안양 일대는 관악산 아래에 낙원지가 되어 지방 발전은 더욱 번영하리라고 한다」

1970년대 100만 인파 몰렸던 안양유원지

1970년대 100만 인파 몰렸던 안양유원지 #안양 #기록 #안양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여름 #피서/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지요. 피서 풍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지만 일상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답니다. 근래에는 해외여행이나 시설 좋은 물놀이 공원에서의 피서가 흔한 풍경이 되었지만, 삶이 궁핍했던 1950-60년대에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달려가 더위를 식혔다. 당시 서울에서 멀리는 대천·송도로 피서를 떠나기도 했지만 가까운 시냇가, 계곡, 한강, 뚝섬 등에서 물놀이를 했지요. 안양유원지 계곡에는 물이 참 많았답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

1930-1960년대 안양유원지로 피서온 사람들

#안양 #기록 #안양풀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여름 #피서/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지요. 피서 풍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지만 일상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답니다. 근래에는 해외여행이나 시설 좋은 물놀이 공원에서의 피서가 흔한 풍경이 되었지만, 삶이 궁핍했던 1950~1960년대에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달려가 더위를 식혔다. 당시 서울에서 멀리는 대천·송도로 피서를 떠나기도 했지만 가까운 시냇가, 계곡, 한강, 뚝섬 등에서 물놀이를 했으며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는 인파가 몰리는 피서지중 한곳이었지요. 안양유원지 계곡에는 물이 참 많았답니다..

1968년 여름 안양유원지로 피서온 사람들

1968년 여름 안양유원지로 피서온 사람들 #안양 #기록 #안양유원지 #여름 #피서 #닐미샬로프/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지요. 피서 풍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지만 일상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답니다. 근래에는 해외여행이나 시설 좋은 물놀이 공원에서의 피서가 흔한 풍경이 되었지만, 삶이 궁핍했던 1950~1960년대에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달려가 더위를 식혔다. 당시 서울에서 멀리는 대천·송도로 피서를 떠나기도 했지만 가까운 시냇가, 계곡, 한강, 뚝섬 등에서 물놀이를 했으며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는 인파가 몰리는 피서지중 한곳이었지요. 안양유..

민주화 거리행진 나선 1987년 6월의 안양 도심

#안양 #기록 #기억 #민주화 #중앙로/ 1987년 6월 안양시 중앙로(중앙시장 동문앞) 거리를 행진하는 시민들. 오늘은 6·10민주항쟁 29주년이다. 1987년 6월의 안양은 정말 뜨거웠다. 6.10일 이후인 26일 오후 11시20분경, 무려 2만명에 달하는 안양시민들은 안양경찰서에서 우체국에 이르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직격탄을 쏘았고 3명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안양에서는 1987년 당시 6월 항쟁 기간인 6월 19일, 6월 23일, 6월 26일 모두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안양에서의 첫 대중 집회인 6월 19일 집회에 대해 시사월간지 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시 30분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대중 집회가 시작됐다. … 약 2시간..

1960년대 연탄 배달 소달구지

#안양 #역사 #기록 #기억 #연탄/ 1960년대 초반 소달구지(우마차)로 연탄 배달을 하던 안양시내의 풍경으로 안양시사료관에서 찾은 자료 사진입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60년대 서민들에겐 겨우 내 쓸 연탄을 빈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이 중요한 월동준비였지요. 또 연탄은 난방용으로 겨울철에만 사용한는 것이 아니라 LPG가스가 없던 당시에는 각 가정과 식당에서 움식조리도 해야 했기에 서민들에게 그야말로 사계절 내낸 필수불가결한 연료였지요. 연탄을 주문하면 연탄광이 커 보관할 공간이 큰 집의 경우 트럭으로 날랐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연탄가게에서 사진처럼 달구지나 리어카로 날랐지요. 너도 나도 연탄을 때던 시절 전국에 연탄공장은 400여 개에 달했고 동네마다 연탄가게 하나씩은 꼭 있었고 안양의 경우 화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