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8/ #기록 #안양 #만안로 #시흥대로 #정조대왕로 #신작로 #옛1번국도 #만안로/
경기 안양시의 북쪽 끝자락인 석수동 안양유교삼거리-연현오거리-원태우지사의거지-석수주유소삼거리-관악역-삼막교-삼성교-만안교옛자리-안양교사거리(안양에술공원입구)-안양교-안양역로터리-명학역-명학육교삼거리-명학육교-호계교-유통단지사거리(호계구사거리)-호계삼거리까지 이어지며 안양도심을 지나는 도로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면서 도로다운 길로 만들어져 시흥로라 불리우고 1950-70년대에는 신작로라 불리웟다. 이 도로는 경수산업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1번국도였으나 그 지위를 경수대로에게 내주고 만안로(석수주유소삼거리-명학대교)와 엘에스로(명학대교에서 호계삼거리)라 불리우고 있다.
안양문화 제7호에 실린 글
만안로(萬安路) 이야기
김행웅 안양문화원장
安養市는 1973년 7월 1일 법률 2597호에 의하여 始興都 安養邑에서 市로 숭격되었다.
그후 1978 安養市 行政자문위원회에서는 市內 主要道路에 이름올 지었는데 中心街 35m도로를 中央路 안양역 앞 國道를 萬安路로 하였으며 이는 石水洞에서 부터 호계동 구사거리까지를 말한다. 관양동앞 모로를 관악로, 이 외에도 많은 道路이륨이 붙어져 있다.
石水洞에서 부터 虎뚫洞(군포 구사거리) 區間의 國道를 萬安路로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로는 水洞 소재 萬安橋가 있기 때문이며, 기념의 뜻으로 道路名이 지어졌다.그러하기 때문에萬安國民學校와주위에 萬安이라고하는 이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1986년 제1회 萬安文化奈로 이름지어진 安養市民 文化, 예술 Yi'. 典도 유서깊은 萬安橋를 기념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한 뜻에서 文化票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萬安橋는 安養市 水洞 270번지의 위치에 있으며, 地方有形文化財 38號로 1973 10 日에 指定되었다,
萬安橋는 一名 孝子橋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孝心의 根源、이 되는 朝蘇王朝 22 正租大王이 萬人의 平安을 寫하여 세운다는 뜻과 聖罵(성가 •임금이 탄 수레)와 慧罵(자가 • 어머니가 탄 수레 • 혜경궁 홍씨)가 편안히 지나갔다가 잘 다녀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으라는 뜻에서 萬安橋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萬安橋에는 다음과 같이 엄힌 由來가 傳하여지고 있다.
남태령(南泰鎭)고개
서울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나루에 이르고, 혹석동(黑 洞)을 지나 강변을 끼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동작동(鋼崔洞) 이수교(첼水橋)를 우편으로 돌아가면 숭방명(협뽑J:ifZ) 석굴암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키로미터 쯤 가면 큰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바로 남태령이다. 이 고개는 예전에 과천(果川)올 거쳐, 수원(水原)으로 가던 옛 국도(國道)였다. 또한 이 길은 삼남
(三南)으로 통하던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대왕(正租大王)의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며 묘소를 참배 가시던 길이었다.
여기에서 정조대왕과 신하간의 대화에 엄힌 일화 한 토막과 남태령 고개로 이름이 불리워지게 된 연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정조대왕의 능행차 행열이 고개를 넘어갈 즈음에 무료해진 대왕께서는 어가를 잠시 쉬도록 멈추게 하고 정조대왕께서는 곁에 있던 신하에게 넌지시 고개 이름을 여쭈어 보셨다. 신하는 대왕앞에서 율 하면서 머뭇거리며 대답하기를 주저하였다. 대왕께서는 재차 물어 보시니 신하는 대답하기를 남태령 고개라고 대답 하였다. 듣고만 계시던 대왕께서는 갑자기 역정을 내시며
호통을 치셨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짐에게 거짓을 고(告)하느냐 ? -----
대궐로 되돌아 오선 정조대왕께서는 남태령이라고 고한 신하를 부르시었다.
“상감마마 거짓올 고한 용렬한 신하를 벌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는 껄껄 웃으시며 “거짓으로 남태령이라고고한사실을 말하여 보라” 하셨다. 자세를 고치며 신하가 대답하기를 “전하 그 고개의 이름은 본시 여우고개 입니다” “여우는 본래 상스러운 동물로서 전하의 능행차에 불길한 말을 입밖에 내지 않으려고 임시변통으로 둘러댄 이름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오! 참으로 가룩한마음의 신하로구나, 짐이 일찌기 여우고개인줄
알면서도 무료함을 달래려고 물어보았거늘·‘----- “짐이 오늘 그대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 하시며 오늘 이후부터 여우고개를 “남태령 고개로 고쳐 부르도록 하라”하시었다. 남태령 고개는 서울 남쪽에 있는 큰 고개라고 하는 뜻에서 지어진 고개 이름이었다.
과천(果川)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연 불 맛이 좋아 정조께서 가자(加資)로 당상(堂 l:) 을 제수(除授)했다는 우물이 있고 그 산(山) 위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아버님이신 사도세자(思掉世子)가 할아버지(英租)에 의해 돌아가실때 협력했다는 김상로(金尙홈1702-1766) 의 형인 좌의정(左議政) 김약로(金若챙 1694 1753) 의 묘소이
다. 곡담을 쌓아 정승묘답게 모두 갖추어진 묘였지만, 정조대왕께선 지난 날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지나는 길 옆에 있는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뒤 안양에 만안교(萬安橋)를 새로 놓고 새 노정(路種)올 태하여 다니게 된 것이 이러한 연유에서 였다고한다.
만안교(萬安橋)
조선 시대 영조(英租)때만 해도 삼남(三南)지방올 왕래하자연 노량진동작동-과천-수원을 잇는 길이 정로(正路)였으나 효도대왕(孝道大王)으로 그 이름이 높았던 正租大王이 水鳳 화산능 참배하는 길 도중에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불길하다하여 路뚫을 노량진-시흥-안양으로 바꾸게 되어 정조 19 (1795) 月에 대연(大餐)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 비약했던 나무다리를 뜸고 길이 31.2 미터, 미터, 높이 6m 갑문이 다섯개인 만안교(萬安橋)를 가설하였다.
다리 앞에는 커다란 거북이 둥위에 “萬安橋”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세워져있으며, 뒷면에는 만안교비송(萬安橋陣뼈)이 적혀져 있다.
만안교(萬安橋)의 비문을 보면 이 다리를 가설하기 위하여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도순찰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서유방(徐有防)이 공사를 총감독 지휘하고 비문(硬文)은 직접 지었다. 또한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조윤형(뽑允亨)이 쓰고 유한지(命漢좋)가 전면(前面)을 썼다.
만안교(萬安橋)는 석수 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1980년 월 국도(國道) 확장의 일환으로 현 위치인 북쪽으로 200 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졌으며, 삼막천(三幕川 • 삼막사 계곡으로 부터 발원하여 삼막골을 경유하여 삼성천과 합류되는 하천(河川))과 삼성천(三聖}!| • 안양 동과 석수 동 소재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안양 유원지를 경유 삼막천과 합류하는 하천으로 그리고 안양천으로 다시 합류하는 河川으로 朝蘇時代에는 安養川 또는 安陽川이라 하였다. 現在에는 萬安橋가 관악역 남방 150 미터 지점인三幕川으로 옮겨졌다.
萬安國民學校는 萬安路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또한 만안교 위치로부터 약 700미터 남쪽 國道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학교가 설립된 해는 서기 1962년 3월 10 일이며, 총 75 학급에 학생수는 3,739 명으로서 안양시에서 두 번째로 큰 학교이다.
안양행궁(安養行宮)은 안양 동에 소재하고 있던 곳으로 정조대왕께서 수원 화산능으로 참배길에 쉬어가시던 집이다. 위치는 안양 동 674-74호이며 지금의 수어장 여관 자리이다.
안양역은 서기 1905년 1월 1일에 셜립되었으며, 만안로(국도)변에 위치하고 만안교로부터 남쪽 1,2 키로미터 지점에 있는데 안양시 교통의 관문으로서 전철이 하루에 216회 왕복하고 있으며, 수도권 핵심도시로서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상고 있다.
安養國民學校는 1927년 12월 20일에 설립되었으며, 100학급에 학생 총수는 5,187 명으로서 안양시에서 역사가 제일 오래된 학교로서 이 지역 원로 및 40셰 이상은 거의 안양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또한 안양국교는 교화동(敎化洞)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교화당이 었던 마을을 교화동(敎化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후에 안양국민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형제고개는 안양국민학교와 인접한 화측도로 만안로(국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개의 고개가 차례로 사이좋게 놓여 있는데 두번째의 고개는 앞쪽 고개보다 조금 더 높아 의리좋은 형과 아우의 형상같아 형제고개라 불리워졌는데 한일합방후 도로정비 사업으로 인하여 나즈막하게 낮아져 그렇게 높은 인상을 현재에는 주지 않고 있다.
萬安路의 총 길이는 6.9키로미터인데 명학역과 안양경찰서가 인접하고 있으며, 150 미터 남쪽에는 명학동(도로계획 이전에는 명학바위가 있었다)이 위치하며 만안로를 중심으로 東쪽으로는 동양나이론 공장이 있으며, 西쪽으로는 명학국민학교와 중앙병원이 산(山)자락에 위치하고 었다. 조금더 남쪽으로 가면 동창제지공장이 있는데 虎뚫橋를 사이에 두고 금성전선과 금성통신공장이 었다.
虎꿇橋는 1930년까지 답교놀이가 행하여 오던 곳으로 길이 60미터 폭 25미터 교각 8개로 1981년 4월 27일에 콘크리트 철근교로 준공되었다. 조선(朝蘇)時代에는 인근의 주민들이 이 다리위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體橋(답교)놀이를 하였으며 호계동에 있는 다리라고 해서 호계교(虎꿇橋)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옛날에는 농경사회였기때문에 답교(다리밟기)놀이를 하는 것이 민속놀이였다. 정월이되면 초닷새부터 열엿새까지 주로 부잣집을 대상으로 답교놀이를 집마당에서 벌이고 술과 떡국대접을 받고 노는 마을 축제였다. 다리밟기를 하면 풍년이 들고 농사일에 허리와 다리가 아프지 않는다는 풍속에의하여 행해졌으며 16일 날에는 「귀신당날」이라하여 하루 더 놀았으며 날까지 놈아야만 나무가 죽지않아 멜나무도 많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양문화원에서는 잊혀진 민속놀이(전통문화)를 발굴, 재현하고 전승시키는 사업을 전개하므로서 본연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특히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경축 3회 만안문화제(萬安文化聚)의 일환으로 제1차로 시연한 만안답교놀이는 호계지역, 만안교지역 답교놀이가 성행되었음이 입중되었다,
호계지역에서는 최상만(76세)용이 15세를 전후로 하여 답교놀이의 무동역을 하였고, 만안교지역에서는 조재봉(88세)옹이 무동역을 하였던 예능보유자로써 둥장배역과 복색 연회상황둥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어 문화원에서 속놀이인 답교놀이를 발굴 실태조사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안답교놀이는 1920년경까지 놀았으나 그 후로는 사라졌으며, 호계교 답교놀이는 1930 년대에 사라졌다고 한다. 사라진 이유로서는 왜정시대에 일제가 권장도 만류도 않았지만 식민착취가 시작되면서 경제적 여유가 점차 없어지고 인섬도 각박해져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점차 시들어가면서 사라진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안양시 석수 270 번지에 위치한 만안교(萬安橋)는일명 효자교(孝子橋)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만안교가 안양땅에 설치되 게 된 연유와 함께 효도대왕인 정조대왕(朝蘇王朝 22 대)의 능행로(優行路)가 새로이 개통된 후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재 조명하여 보았다.
@ 이러한 사기(史記)를 참고해볼 때 안양이 경부선 철도와 국도변의 도시로 성장한 것은 @ 정조대왕께서 만안교(萬安橋)를 건설하면서 불가분의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만안교는 오늘날 안양시가 발전해온 뿌리요 효시(嘴失)인 것이다,
그뿐만아니라 안양은 충효(忠孝)의 도시로 근원이 될 것이다. 그러하므로 안양시는 후손들에게 충효의 정신과 향토애를 자자손손 꽃피워줄 종합문화제(餘合文化흉)를 制定함에 있어, 그 의의(意義)가 크고 가장 타당성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안양문화원은 지역원로 및 유지들의 중지를 모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지한 토론 결과 「시정자문 위원회」에서는 「만안문화제(萬安文化쯤)」로 명명(命名)하게 되었다.
여기에 부록으로 萬安橋의 전경사진과 萬安橋陣 初本(만안교비 탁본) 및 萬安橋陣 歸譯文(만안교비 번역문)을 참고적으로 게재한다.
이글을 마치면서 도움말을 주신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협조기판 : 1. 안양시, 2. 안양역, 3. 안양국민학교 4. 만안국민학교
참고문현 : 만안답교놀이(안양문화원 발행) 3p.
만안교비송병서(萬安橋障뼈井序)
남현(南玄)의 주치(州治) 남쪽 20 리에 안양천(安養}||)이 있으니 바로 화성(華城)으로 가는 연료(훌路)이다. 우리성상께서 해마다 원침(園寢 : 思掉世子陸)올 전알(성묘)하려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봄에도 자가(慧、罵 ;혜경궁 洪民)를 모시고 이 내를 건녔으니 이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모든 행행지(幸行地)에는 하천이 있기 마련이고 하천마다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았다가 왕의 행행이 지난 뒤에는 바로 철거하였다. 이로써 얼음 풀리때나 장마가 질 때에는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올 하였다. 전 도신(前道톰) 서용보(徐龍輔)가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돌로써 대체하려 하였으니 이루지 못하였다, 천신(體톰)이 명을 받고 취임하여 맹추(굶秋)에 이 일을 착수하여 三개월만에 준공하니 길이는 15장이요, 폭은 四장이며, 높이는 三장이요, 갑문(聞門 : 다리구멍)은 다섯개이다. 상께서도 이 일을 아시고는 감독하는 사람과 공쟁에게 차둥있게 상을 내리고 특별히 만안교란 이름도 내리셨다. 신(몸)은 생각컨대 왕자가 다리로 편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漢) 나라의 장안교(長安橋)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도강(徒 : 徒步로 건널수 있는 다리)과 여량(與梁 : 수레로 건널 수 있는 다리)은 성주(成周 : 西周)때에 이루어졌으나 돌로 만들어 만세에 전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 다리는 다행이도 화성(華城)연로에 었으니 성가(聖罵)는 一年에 한번, 자가(慧罵)는 十年에 한번씩 육룡(六龍)에 멍에를 메이고 팔란(방울)을 울리면서 편안히 지나갔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만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편의는 만백성에게까지 미쳐 원조의 짐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이제는옷을걷거나험한길로돌아서 갈걱정이 없어졌다.이로써 만만년토록 성은(聖恩)을 입게 되고 자덕(慧德、)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참으로 성(盛)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사를 처음 시작하였을 때 하천가에서 들을 채별하는데 과연 돌이 나와 경비를 반감(半減)할 수 있어 마치 신이 도운 것 같았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몸)은 배수계수(拜手擔首)하고 그 일을 기록하고 송(뼈)을 달기를 왕께서는 해마다 한번씩 원침(園寢)에 행행(幸行)하시오니 이 다리 건너시걸 만번을 하시옵소서, 복록과 함께 이게 되리니 아래에 는 (JI 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가(慧罵) 를 모시고 만년통안 만안(萬安)하소서, 혜가 에 니 마음 놓고 건념에 환성 올리도다. 천년 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노 . 서유방(西有防) 삼가 지음.
[만안로를 기록한 사진들]
'이야기보따리 >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617]안양박물관 소장 유물 천하지도(天下地圖) (0) | 2025.06.17 |
---|---|
[20250614]안양시사(2008) 지도로 보는 안양 자료(PDF파일) (1) | 2025.06.14 |
[20250610]6월 항쟁 20주년(2007년) 안군의 행사 기록 소환 (1) | 2025.06.10 |
[20250602]안양 옛 국립수의과학검역원 건물 배치 지도 (2) | 2025.06.02 |
[20250522]김중업 탄생 100주년 기념책 <김중업, 그 유산과 미래> (1) | 2025.05.23 |
[20250523]안양 명학역 보도육교 2011년 설치공사 기록 소환 (0) | 2025.05.23 |
[20250518]대한민국 민주주의 상징 "광주의 오월이 돌아왔습니다" (0) | 2025.05.18 |
[20250518]110년전 의왕 하우현 교우촌 사람들 농사짓는 모습 (1) | 2025.05.18 |
[20250517]100년전 조선 기록한 영상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3) | 2025.05.17 |
[20250515]제2회 "이곳만은 지키자" 금상 수상 <명학공원> 기록 소환 (1) | 2025.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