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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안양이 놓친 국가무형문화재 이봉주 옹 백수(白壽, 99세)

안양똑딱이 2024. 10. 6. 22:03

 

국가무형문화재 77호(방짜유기)로 안양 박달동에 진유공사를 세워 양대유기를 제작했던 이봉주옹(명예유기장)이 국가무형유산 기능보유자 최초로 백수(白壽, 99세)를 맞이해 지난 6월 19일 (사)국가무형유산기능협회(이사장 이재순) 주최로 축하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이다.

 

이봉주옹이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정주군 발산마을이다. 정주읍을 중심으로 발산마을은 5㎞, 유기로 유명한 납청은 10㎞ 떨어져 있다. 북한에서는 방짜를 `양대'라 한다. 납청은 양대의 대표고장으로 전국에서 방짜그릇을 그냥 `납청'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의 출생부터가 방짜와 인연이 깊다.

 

이옹이 정주에서 살던 때 납청 양대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다. 납청 공방에는 `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돈 안 받고 그냥 기술 배우러 들어가려고 해도 안 받아주었다. 사실 양대 기술은 아무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이봉주 옹은 당시 유기행상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납청 유기공장에 자주 드나들면서 방짜유기를 접하게 됐다. 해방 후 38선이 막히면서  22세 때인 1948년에 월남,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이씨는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에서 납청 방짜유기 공장을 크게 하던 동향 탁창여 선생의 양대공장에 입사해 방짜기능을 배운다

 

탁 씨는 38선을 수차례 넘나들며 김찬규.김보근씨 등 납청의 장인들을 월남시켜 방짜유기의 명맥이 이은 남한 유기의 대부격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봉주옹은 29세 되던 1957년에 탁창여 선생으로부터 독립, 서울 구로동에 평북양대유기공장을 설립해 대장과 점주를 겸했다.

 

하지만 땔감이 연탄불로 바뀌고 나서 연탄에서 내뿜는 일산화탄소가 닿기만 해도 그 독성으로 인해 검게 변색되는 방짜유기는 주민들의 밥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는 신제품이던 스테인리스와 프라스틱 그릇이 나오면서 방짜유기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이씨 가정은 막노동과  호떡을 구워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잇는 고달픈 삶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남원의 방짜는 명맥이 끊어졌지만 이씨는 방짜유기를 포기하지 않고 1978년 다시 안양에 공장(진유공사)을 만들어 남들이 보기에는 미련할 만큼 징과 꽹과리 등 전통 타악기를 만들며 방짜유기에 매달려 왔다.

 

특히 유신 정국을 맞아 집회와 시위가 늘어났고 '데모꾼'들이 유기로 만든 꽹과리를 많이 찾게 됐다. 당시 한 달에 꽹과리만 1천500개씩 팔릴 정도로 호황이었다고 한다.

 

1983년 국가무형문화재 77호로 지정된 뒤부터는 탄탄대로였다. 이옹이  방짜유기로 만든 식기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들의 청와대 만찬을 비롯 아셈회의장 등에 만찬용 식기가 공식 납품하면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상도'나 '대장금' 같은 인기드라마의 소품으로 이옹의 유기들이 단골로 사용되는 등 유기장으로서의 최고봉의 위치에 우뚝섰다.

 

1994년엔 지름 161㎝, 무게 98㎏에 달하는 세계 최대 징을 만들었다. 이봉주 옹은 1994년 5월 15일 중국(中國) 천진에 건너가 천진 징공장의 설비를 이용,세계 최대 규모의 `방짜 징'(지름 1백60㎝,무게 1백㎏)을 만들었다.

 

지난 50여년 동안 놋쇠를 두드려 징과 꽹과리 등을 만들어 온 李씨는 생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방짜 징'을 만들어 후세에 남겨줄 꿈을 갖고 있었으나 국내에는 이렇게 큰 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설비가 없어 고심하다 중국(中國) 연변 조선족 민속학회 金旭賢이사장(연변박물관 근무)의 주선으로 대형 설비를 갖춘 천진 징공장과의 합동제작을 추진했다.

 

李옹은 방짜 유기 제조기능 전수자 金문수씨(38) 등 2명과 함께 지난 4월 29일 중국으로 건너가 `방짜 징' 제작작업에 들어갔으나 중국 기능공들의 부주의로 2차례에 걸쳐 실패한뒤 귀국기간을 5일간 연장해 가며 지난 15일 지름 1백60㎝와 1백58㎝짜리 `방짜 징' 두개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李씨가 이들 징을 만들기 전까지 세계 최대규모의 방짜 징은 중국 중경에서 만들어진 지름 1백52㎝짜리였다.

 

지금도 이씨는 1994년에 방짜로 만든 거대한 징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만큼 당시 꽹과리와 징 등 전통 타악기의 걸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요강이나 대야에서 밥그릇이나 악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고, 손망치 대신 기계망치가 대신하고 있지만 유기의 합금 비율과 정성만은 변하지 않았다.

 

방짜는 고온에 달궈, 망치로 치기를 반복해 틀을 잡아나간다. 오롯이 사람 손으로 한다. 한 달 넘는 작업도 숱하다. 생산량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유기는 1980년대 이후 쇠독이 오르지 않고 살균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된다.

 

1978년 이래 줄곧 경기도 안양 박달동에서 작업하던 이 옹은 거듭되는 안양시의 계고장 발부에 1994년 4월말께 안산시화공단에 새로 공장을 지어 이전한데 이어 2003년 무렵에는 경북 문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동아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2012. 4. 25)에 실린 이봉주옹의 회고록과도 같은 글[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에 이옹이 안양을 떠나게 사연이 적혀있다.  

https://v.daum.net/v/20120425135324085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이봉주(86) 옹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26년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그는 광복의 혼란기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고, 전쟁과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v.daum.net

 

1979년 공장을 안양으로 확장해 옮겨 15년간 운영하는 사이, 시에서 시끄럽다며 나가라고 계고장을 세 번이나 보내왔다.

 

"안산 시화공단으로 옮겨 8년간 일하는 사이 안산 공기가 점점 나빠지더니 나중에는 일주일이면 녹이 슬더군요. 여기 문경에서는 몇 년이 되도 말짱한데 말이죠."

 

그 사이 안양시는 전통문화를 우대하는 정책으로 바뀌어 방짜공방을 다시 옮겨오기를 바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북과 방짜 공장을 운영하는 장남이 대신 안양으로 갔고, 그는 3년여 준비 끝에 2003년 문경으로 옮겨왔다. 깨끗한 공기, 널찍한 대지에 기술자도 양성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이곳이 그의 마지막 보루다.

 

이봉주옹은 한때 언론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큰 방짜 징이 우리나라 장인의 손에의해 만들어졌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기네스협회와 접촉하고 장차 안양(安養) 공장터에 방짜 유기 박물관을 세워 우리나라의 방짜 유기 제조기술을 후세에 전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안양을 떠나간 것이다.( 연합뉴스 1994.05.23  https://v.daum.net/v/19940523151500131)

 

통일이 되면 고향인 북쪽(평안북도 정주)에 가서 그 옛날처럼 유기공장을 만들려던 그가 마음을 바꿔 남쪽에라도 기법을 전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키로 하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정착한 곳이 문경이다.

 

이 옹은 전재산을 털어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12만여㎡에 달하는 부지를 마련,  20여명의 직원들과 함께 사라져 가는 방짜유기를 되살리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방짜공장을 만들어 일을 하면서 사택과 기숙사, 교육관, 수련장 등 고향 납청마을처럼 유기공장이 가득찬, 그야말로 마을을 만들고자 이름을 방짜유기촌이라 지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을 현지 주민들로 고용, 이들에게 방짜유기의 제작 기법을 전수하고 있어 앞으로 이 지역은 도자기와 함께 국내 최대의 방짜유기촌이 될 전망이다.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가 방짜유기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씨는 “아쉽지만 수려한 문경에 방짜유기 전수관을 만들었다”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씨는 또 “그동안 만들어온 1200여점의 작품을 모두 대구에 설립될 방짜유기박물관에 기증키로 했다”며 “방짜유기의 맥을 살리기 위해 여생을 받치겠다”고 말했다.

 

유기는 일정량의 구리와 주석 또는 비철금속을 합금해 만든 향동의 질 좋은 놋쇠로서 제품을 일컫는 용어로 제작기법에 따라 안성의 주물유기,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지역에서 만들던 방짜유기, 주물과 방짜를 병행한 순천의 반 방짜유기 등 3가지가 있다.

 

방짜로는 주로 징이나 꽹과리 같은 타악기를 만들며, 독성이 없기 때문에 식기류에도 사용된다. 특히 악기는 방짜 기술만의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기물로 손꼽힌다. 1천300도 이상 고온에서 놋쇠를 수천 번 두드리는 전통 기법으로 방짜 유기를 제작하기에 휘어지거나 잘 깨어지지 않고 완제품에도 메자국이 은은히 남아 있어 수공예 제품의 멋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보통 방짜는 구리 78%와 주석 22% 비율로 섞어 만든 합금을 너댓명이 동시에 메질을 해서 만든다. 원대장을 중심으로 앞망치대장, 가질대장, 네핌대장, 겟대장 이 역할을 나눠 구리와 주석을 용해하고 일정한 모양의 덩어리를 만든 뒤 다시 불에 달구고 망치로 쳐서 그릇을 만들고 담금질을 통해 변형된 재료는 바로잡는 벼름질과 깎아 내는 가질, 윤 내는 작업까지 거치면 비로소 반짝반짝 빛나는 그릇이 된다.

 

방짜는 분업이 아니라 완전한 협업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꾀를 부리거나 딴전을 피우면 그날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 철저한 협동의 정신이 최상의 유기를 만들어낸 비결일지도 모른다. 

 

이봉주옹은 1984년 눈에 놋쇠 파편이 튀는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됐음에도 팔십이 넘도록 방짜 작업의 원대장 일을 맡아 현장을 지휘했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 전통 방짜기법은 이봉주선생의 아들인 이형근 선생과 손자 이지호씨에 의해 기술이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지난 1983년 국가무형문화재 77호로 지정받은 국내 1호 방짜유기장(2013분터 명예방짜유기장)이봉주 옹에 이어 아들인 장남 이형근 선생이 2015년 국가무형유산 유기장 보유자로 인정됐고, 손자 이지호 이수자를 포함해 3대가 방짜 유기의 맥을 이어가며 작품 활동과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또 둘째 며느리가 서울 인사동에서 유기 판매업을 하고 있다. 

3대가 현직에서 유기 전통을 잇는 가문은 이씨네가 유일하다.  이봉주 선생은 2018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방짜유기 제작은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납청 마을에서 발달하여 여기에서 만들어진 유기를 납청 양대유리라 한다. 이곳의 유기장들이 6·25전쟁 때 월남하여 경기도 안양에서 계속 생산하여 왔다. 부친 이봉주 옹이 1994년 안양을 떠났지만 국가무형유산 유기장 보유자로 맥을 잇던 아들 이형근 선생이 1995년 안양 박달동에 납청유기(納淸鍮器) 이형근 공방을 새로 설립한다.

 

이형근 공방에서 제직한 방짜 유기들도 국내외 정상들의 만찬에서 많이 사용됐다 2002년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시 청와대에서 국빈 만찬용 식기로 사용된데 이어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미대통령 방한 시에도 청와대 국빈 만찬 식기를 제작 납품하는 등 예술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봉주옹에 이어 이형근 선생도 안양을 떠난다 안양 박달동에 있던 이형근 공방은 지난 2022년 공장을 경경북 문경시로 공장을 이전한다. 이형근 공방은 2022년 4월 28일 문경시청에서 문경시와 공장 설립을 위한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한다. 이  MOU 체결로 이형근공방은 40억 원을 투자해 제조시설과 방짜유기 디자인센터 등을 문경에 신설했다.

 

 

안양에 있으면 좋을것만 같았던 이봉주옹이 제작한 작품들과 수집품들을 전시한 공간(박물관) 역시 대구에 설치된다.  

 

대구방짜유기박물관은 수려한 풍광으로 유명한 팔공산 자락에 2007525일 개관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유기장 이봉주가 평생 제작 및 수집한 방짜유기 1,489점 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지하 1, 지상 2(대지면적 17,880건축연면적 3,758)의 규모로 전시동의 유기문화실, 기증실, 재현실, 기획전시실 등의 전시실과 야외공연장, 체험의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시동에는 유기 역사와 유기를 계승하는 사람들의 장인 정신 등 개괄적인 소개를 하는 유기문화실, 방짜유기장인 이봉주의 작품이 보관된 기증실이 있다.

 

방짜유기의 제작 과정을 1:1 인물모형과 작동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방짜유기 재현실, 자체 기획적을 위한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도 영상교육실, 기념품점, 수장고, 자료실 등이 있다. 야외 체험의 장에서는 제기차기, 투호던지기, 고리던지기, 윷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인사동 납청놋전]

 

납청놋전은 인사동 골목길 한가운데에 있다. 10(33)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황금빛 천지가 펼쳐진다. 좁고 긴 매장 가운데에 방짜 유기 그릇이 전시돼 있고, 벽에는 방짜 징과 꽹과리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가게는 이형만(57) 사장이 아내와 함께 운영한다. 20여 년간 대기업을 다니던 이 사장은 방짜 유기 기능 보유자인 아버지 이봉주(2024년 현재 생존 99·중요무형문화재 77) 옹의 둘째 아들로 가게를 물려받았다. 가게에서 파는 제품의 90는 이씨의 아버지와 방짜유기장인 큰형이 두드려 만든 것이다.

 

납청놋전이 만드는 방짜 유기는 귀한 몸이다. 2002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청와대 만찬에서 이 가게 식기를 사용했다. 이 사장은 "부시 대통령이 방짜 유기 식기가 아름답다며 감탄했다고 전해 들었다""사용한 방짜 유기 반상기 세트를 청와대로부터 선물로 받아 미국으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2003년 방영한 인기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그릇과 수저도 대부분 이곳에서 대여했다. 이 사장은 "주변에선 드라마 간접광고(PPL)인 줄 알고 방송국에 얼마를 줬느냐고 묻는데 실제로는 1000만원을 받고 빌려줬다"고 했다.

 

가게 초창기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부인이 유일한 큰손이었다. 1987~19893년간 놋수저 1000 세트를 선물용으로 사갔다. 이후엔 불교 단체나 절에서 종교의식 행사용으로 값비싼 좌종을 주로 구매해 갔다. 1990년대에는 집회와 시위가 늘어나 '데모꾼'들이 유기로 만든 꽹과리를 많이 찾게 됐다. 한 달에 꽹과리만 1500개씩 팔기도 했다. 2000년대 중·후반 들어서 방짜 유기가 살균 작용을 하고, 독물이 묻으면 변색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놋그릇 열풍이 불었다. 이때부터 가게 살림이 피고 납품처가 늘었다. 한때는 한 해 매출액이 120억원에 달했다.

 

방짜 유기의 매력은 외국인 고객에게도 통한다. 지난해 12월 미국 시애틀대학 교수 이만 마즈드가 이 가게에 왔다가 500만원짜리 대형 징이 맘에 든다면서 그 자리에서 결제했다.

 

단골손님 중에는 '소리'를 안다는 음악인이 많다. 울림이 청명하고 깊어 음악인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명기(名器)로 통한다. 사물놀이 원조격인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납청놋전의 꽹과리나 징을 10여 년째 구매하는 오랜 단골이다. 세계적인 드럼 심벌 생산업체 '질지언'의 사장단이 1982년 이봉주 선생이 운영하는 공장을 찾아와 방짜 징과 꽹과리 제작 방식을 견학하기도 했다. 당시 이 회사 경영진은 방짜 징소리를 듣고 "마법 같은 소리"라며 감탄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납청놋전에 깡마른 영국 남성 5명이 와서는 주물 좌종을 크기별로 20개를 샀다. 판매원이 왜 이렇게 많이 사가느냐고 물어보니 "우리는 영국의 록밴드 그룹인데 연주할 때 보조 악기로 쓰려 한다"고 했다고 한다. 강서구 염창동의 한 유명한 무당도 "굿할 때 이만한 소리를 내는 꽹과리가 없다"며 가게를 찾는다. 이씨는 "납청놋전은 아버지의 장인 정신이 담긴 걸작품"이라며 "이 가게에 남은 인생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글쓴이 : 이벌찬

 

[남대문놋전]

 

남대문놋전 방짜유기 전문점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 방짜유기장님 그리고 대를 이어 보유자로 지정받은 이형근 방짜유기 제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전시장으로 다양한 방짜유기 제품을 구입할수 있다.

 

위치정보 안내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2가길 6-8

본동 수입종합상가 1 11호 남대문놋전

 

영업시간 안내

매일 오전 10 ~ 19시까지(단 일요일은 18시까지 영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