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골목풍경 1447

[20170513]안양, 조선시대 만안교.사찰 등 석재 채취 현장?

#안양 #석재 #돌 #만안교 #안양사지 #중초사지 #채석/ 우리 조상들은 청동기 고인돌 시대부터 돌을 잘라내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방법은 잘라야 할 선에 따라 구명들을 열지어 파고 마른 단단한 나무를 구멍에 박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그 단단한 돌도 쪼개지지요.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건너편 낙원마을 뒤 산자락(안양2동 예술공원 118번길 21-27 뒤)에 오르면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데 일부 바위는 돌을 잘라낸 흔적이 있고 일부 바위는 돌을 잘라내기 위해 구멍을 뚫어놓은 것들도 있습니다. 과거 여기서 잘라낸 석재들은 인근의 만안교를 놓는데 또는 중초사와 안양사의 당간지주, 석탑 등을 만들때 쓰였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 현장은 안양2동 어르신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곳인데 김귀연 전 안양2동주민자치..

[20170517]안양 최고의 단독주택단지로 바뀐 낙원마을

2017.05.17/ #안양 #낙원마을 #안양예술공원 #전원마을/ 안양시 안양2동 안양예술공원 김중업박물관에서 동남쪽 산자락에 보이는 단독주택단지 낙원마을. 아마 안양에서 가장 고급 단독주택단지가 아닐까 싶은 이 곳은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안양시가 지정한 전통마을이 있던 곳이다. 낙원마을은 1950년대만 하더라도 험준한 산골이었는데, 1959년경, 박정원와 안학순 부부가 이 마을에 정착해 식수로 사용하던 ‘화심천’(和心泉) 우물이 건강에 좋다고 소문이 나자 이곳으로 이사오는 사람들도 늘어나면서 ’65년 45호에서 ’70년에는 90여 세대로 늘어나 400명을 육박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우물을 자신들의 생명수요, 어머님의 젖줄이라 생각해 1985년부터 마을합동행사로 ‘우물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평..

[20170517]안양예술공원 낙원마을 뒷산의 쌍무덤과 상석

2017.05.17/ #안양 #무덤 #상석 #봉분 #안양2동 #안양예술공원/ 안양예술공원 낙원마을 뒤 산자락에 있는 무덤. 관리가 안된지 아주 오래된듯한 무덤은 세월만큼이나 나즈막하게 주저앉은 쌍 봉분앞에 큼지막한 상석이 놓여져 있다. 한쪽 봉분위로 참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수령이 50년은 됨직한걸 보니 이 무덤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석의 크기로 볼때 무덤의 주인공이 평민은 아닌듯 싶다. 무덤속 주인공들이 궁금하다.

[20170426]안양 만안도서관의 원태우의사 조형물

2017.04.26/ #안양 #원태우의사 #만안도서관/ 1992년 11월 새안양회에서 세운 원태우의사 조형물.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멩이 던진 원태우의사 대한민국 사람 중에 1909년 중국 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기차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1905년 11월 22일 경기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기막히게 날려 부상을 입힌 안양 출신의 원태우 의사와 민간 항일 운동의 효시라 할수 있는 거사의 현장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많다. 1905년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

[20170420]안양천에 자리한 안일초등학교

안일초등학교(安一初等學校)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로 2001년 04월 13일 설립인가를 받아 2002년 03월 01일 초대 김현경 교장선생이 취임하였으며 2002년 03월 02일 21학급(908명)으로 개교했다. 2015년 02월 13일 제13회 졸업생(5학급, 132명)을 배출했으며 2015년 03월 02일 현재 30학급(특수학급1학급 포함)이 편성돼 운영중이다.

[20170412]의왕 고천동 안골마을

#의왕 #고천동 #안골 #의왕시청 #오봉정사/ 의왕시 고천동 안골은 의왕시청 뒷쪽 오봉산 자락의 전원지역으로 1970년 '새마을운동'때 부터 전기電氣가 공급되기 시작한 두메산골 마을로 납골벽과 납골탑 등 죽은이들의 영가를 모신 오봉정사와 전원주택 서너채, 옛 농가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 등 마치 한적한 시골의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안골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 아침에 흰떡과 복엿을 먹었는데 엿가락처럼 살림이 늘어나서 부자가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또 칠월 칠석날에는 쌀 한 말을 빻아서 칠성시루라 하여 백설기를 만들고, 밀떡을 부쳐 칠성맞이 고사를 한 후 이웃끼리 돌려 먹었다고 한다. 고천동(古川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의 평사천(坪沙川)·고정동(古井洞)·고고리(古古里)·내곡동(內谷洞)이었다가 19..

[20170331]안양3동 대농단지 주변과 골목 풍경

#안양 #동네 #골목 #안양3동 #대농단지/ 안양3동에는 대농단지라 불리우는 대규모 주택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서이면 안양리 약 1만평에 달하는 부지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라는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과 조선견직이 들어섰다. 이는 일제가 섬유공업에 적합한 공업용수를 찾아 전국의 물을 조사해 본 바, 박달동 일대에서 채집한 안양천의 수질이 최상이라는 판정을 얻은 결과였다. 덧붙여 안양리 일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울에 인접한 교통상의 강점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공장 자리에는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화신백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이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20170330]안양 병목안 채석장 철길 남아있는 흔적

2017.03.30/ #안양 #병목안채석장 #철길 #1934년 #안양9동/ 일제 강점기 경부선 복선화공사가 진행될 무렵인 1934년 안양역에서 병목안까지 철길이 놓이고 안양9동 수리산 자락의 커다란 산 하나가 파헤쳐졌다. 경부선을 놓으면서 자갈을 채취하기 위해서다. 해방 이후에도 철도청은 1980년대까지 수도권 일대에 건축용 골재로 제공하기 남포(다이나마이트)를 터트려 산을 깨트렸는데 이곳을 병목안 채석장이라 불렀다. 당시 병목안에는 전국에서 모인 돌 캐는 사람들이 살았음은 물론이다. 1주일에 두세 차례 철도운반 화물열차를 운행했는데 당시 안양9동과 새마을에 살던 중학생 정도의 녀석들은 열차가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화물차 맨 뒷칸에 몰래 매달려 안양시내로 또는 집으로 가기도 했다. 개중에는 어른들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