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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성]수리산의 불쌍한 문둥바위 (1-2)

[03/07/08]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바위이름이 "문둥바위"였다. 무지 무서웠다. 그 바위가 문둥바위여서가 아니라, 도로가 급하게 우로 굽어짐을 준비하는 곳이고, 바위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놓인 엄청 큰 바위 밑에서 식구끼리 잘 살고 있던 자라 몇 마리 잡아 몸보신하겠다고 어느 어른이 자신이 붙인 남포불(Dynamite;니트로글리세린 75%를 규조토 25%에 흡수시켜 만든 폭발약) 에 맞아 죽어자빠진 자리 앞이라서 더 무서웠을까?? 더우기 문둥바위 바로 옆에는 산소가 한 기 턱 버티고 있다. 문둥이는 못보았다. 적어도 거기에선 말이다. 훗날, 무슨 취재차 간 "나자로마을'에선 보았지만, 어린 시절, 적어도 우리 꼬마 녀석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위- 바로 문둥바위였다. 아직도 얼굴에 라고 써..

[임부성]어디까지가 수리산 '병목안'인가? (2)

[03/04/25]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1)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두 개의 다리가 있던 곳부터 시작되는 병목안은 언제 생겼을까? 이땅을 강점한 왜놈들이 금수강산을 유린하며 대륙쪽을 넘보고자 할 때 눈여겨본 곳이 바로 이곳, 수리산 자락의 엄청난 석산이었다. 철도공사에는 수많은 자갈이 쓰이는데 경부선 철길에 깔 자갈을 생산 공급하던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전국각지의 슬프고 고단한 사람들이 부평초처럼 떠돌다 모여들면서 이루어진 동네가 바로 병목안이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장비(크락샤, 함마드릴, 덤프트럭 등)가 없었으므로 망치 하나로 바위를 깨고 또 깨서 먹고 살던 사람들. 면장갑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가진 거라고는 망치 하나, 자갈 걸르는 쇠로 된 얼개미 하나가 전재산인 사람들! 망치 하..

[임부성]어디까지가 수리산 "병목안"인가? (1)

[03/04/25]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서울 사람 둘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어제 말야.. 개고기 잘 먹고 왔어." "어디서?" "거 있잖아. 병목안이라구. 안양에서 유명한 보신탕 골짜기.."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그리고, 등록도 안하고 그냥 읽으시는 "손님"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병목안에는 보신탕집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 多할 것임을 잘 안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병목안의 알파와 오메가를 논해보기로 하자! 안양9동(전에는 3동,더 전에는 안양3리) 프라자아파트 끝부터 창박골 갈라지는 삼거리(시에선 이곳을 병목안 삼거리라고 한다.)까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수리산 골짜기 전체를 병속에 담아두는 우를 범한다. 안양시는 물론..

[임부성]수리산 문둥바위와 독구(dog)

[03/04/16]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독구(dog)" 천지였다. 당시 개이름 랭킹을 보면, 독구-메리-쫑-베스-캐리-워리 순이었다. 길을 가다가 어떤 개가 사납게 덤벼들 때, 우린 이렇게 불렀다. "독구, 메리, 쫑, 베스, 캐리, 워리~" 그러면 십중 팔구는 꼬리 내렸다. 왜? 자기 이름 불러주니까... 왜? 자기를 아는 척하니까... 왜? 혹시 주인집 아드네미 친구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지금 이 발음을 그대로 쓴다면 무지 웃기겠다! "핫.독.구".. 우리 집 멍멍이가 "독구"였다. 크기는 엄청 큰 놈이 몸 전체가 윤기나는 검은 색을 뒤집어썼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인지 나랑 비슷한지 암튼 "독구"는 우리집에서 몇 대째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얘..

[문원식]몽당(蒙堂)선생 한항길(Ⅲ)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6.25사변은 안양직물공장을 운영하면서 기업가로서 순탄한 길을 가던 선생의 인생에 또 한번의 전기가 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시흥군의 민보단장(民保團長)겸 군촉탁(軍囑託)이었던 선생은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계시던 호계리 본가 뒤꼍에 땅굴을 파고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땅굴생활로 얻은 더부룩한 수염을 구태여 깍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계속해서 기르게 되는데, 이 수염이 이후 선생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에 선생은 수염과 관련하여 “부산 피란시절 기자로 재직할 때나 혹은 기술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때도 수염 때문에 한결같이 남의 이해를 받은 바 있고, 또한 외형이 두드러져 나쁜 일을 하다가는 남의 눈에 잘 띄게 되므로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근신하게 되어 후진들..

[임종득]치열했던 모락산.수리산 전투

특별기고- 6.25전쟁,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51년 1월 유엔군이 대규모 반격작전 중 일어난 전투 전적기념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주민들도 모르고 있어 글을 시작하며 2003년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6.25전쟁은 북한 공산정권이 한반도의 적화를 위해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 발발하였다. 이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힘을 합쳐서 공산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였다. 6.25전쟁 이후 지난 50년간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가 속출한 대변혁기였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던 소련이 70년 역사를 끝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갔다. 이로써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는 붕괴되었고, 우리와 줄곧 적대관계를 이뤄왔던 중국과는 국교정상화..

[문원식]몽당(蒙堂)선생 한항길(Ⅱ)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3.1 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전 생애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간 가슴속에 응어리진 반일감정을 한꺼번에 쏟아 학생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대가로 3년간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고, 출옥 이후에도 요시찰인물로 낙인 찍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사소한 사회활동조차 일경의 감시·감독 하에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더하여 심리적 압박과 좌절감은 신경쇠약증을 골수에까지 깊게 해 거의 폐인이 될 지경이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품었던 청운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허탈에 빠진 나는 오랜 동안의 정신적 방황을 해야만 하였다”고 이때의 심경을 유고집에서 토로하고 있다. 결국 자기완성과 경제적 자립만이 실의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는 자..

[자료]수도.안양.신필림과 근대 한국영화사 이야기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3 - 이필우 (1) + 열여덟에 일본으로 건너가 촬영과 현상기술 익혀, 한밤 촬영소에서 도둑실습도 이필우(1897∼1978)는 최초의 한국인 촬영기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촬영·녹음·현상·편집에 두루 걸쳐 있는 그의 이력에서도 살필 수 있는 것처럼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공헌자이다. 열여섯살부터 우미관에서 영사기술을 익혔고, 열여덟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사카(小阪) 촬영소에서 촬영과 현상기술을 연구했다. 영화산업의 기초가 세워지고 있던 일본에서 닛카쓰(日活), 쇼치쿠(松竹)의 신인기사로 활동했다. 귀국 직후인 1924년에 제작한 은 감독만 ..

시공초월, 인터넷 통해 보는 1960년대 안양모습

[03/02/28 시민연대] 인터넷통해 태평양 건너온 1960년대 후반 안양모습 미국인이 개인홈페이지에 올린 사진, 시공초월 확인 석수동과 안양역.유원지.안양시내 등 생생한 기록들 남겨 ▲Neil Mishalov's씨의 홈페이지 메인화면 60년대 후반 안양시 석수동에 자리한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미군병사가 우편전령으로 서울과 인근 도시를 오가며 찍은 당시의 풍물과 생활상이 담긴 수백여장의 사진을 인터넷을 통해 소개하고 있어 시공을 초월해 지난 과거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Berkeley)에 거주하는 닐 미샬로프(Neil Mishalov)씨의 개인홈페이지(http://mishalov.com)에 담겨있는 이 사진들은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1968-69년 근무지에서..

[문원식]신교육의 요람, 낙영학교(樂英學校)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안양지역에서 서당식 한문교육이 아닌 서구식 근대학문을 최초로 가르친 교육기관은 호계동 호계도서관 바로 앞에 있던 낙영학교(樂英學校)이다. 낙영학교의 설립시기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 안양초등학교의 설립시기인 1926년보다 17년이나 앞서고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교육구국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설립된 사학(私學) 중의 하나였던 낙영학교는 구한말 참판을 지냈던 조 용하 선생의 사랑채에 설립되었다. 당시 설립된 사학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약 3,000에서 5,000여 학교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의 사학들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가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후에 부천대학의 설립자가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