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산이 금천현의 진산이 되기 전 금천현의 진산은 삼성산(三聖山)이었다.
삼성산에는 많은 절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절은 왕건이 창건하고 조선시대 중기에 폐사가 된 안양사(安養寺)였다. 안양사가 있던 마을을 절이름을 따 안양리(安養里)라고 하였고, 안양리에서 지금의 안양시(安養市)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나저나 삼성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절은 아마도 삼막사(三?寺)일 것이다. 삼막사는 삼막사(三幕寺)로도 쓰는데 사실 절이름으로 삼막사(三幕寺)를 쓴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당연히 삼막사(三?寺)로 써야 하지만 지금은 절에서도 삼막사(三幕寺)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절에 가서 삼막사라는 절의 유래라고 적어 놓은 글을 보면 가관이다.
글쎄 이 절이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이 암자를 짓고 수도를 한 것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산이름인 삼성산도 이 세사람 때문에 생긴 거라고 적어 놓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퍼저서 지금은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두산백과사전>>을 보아도 버젓이 같은 내용이 올라 있고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정말 무책임한 이야기이다.
조선 현종(顯宗) 때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금천현(衿川縣)>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삼막사가 삼성산에 있다. 고려 말에 서역승(西域僧) 지공(指空)과 이름난 중 나옹(懶翁 ) 무학(無學)이 이 산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 절에 세 중의 화상(畵像)이 있다.
이렇게 분명한 기록이 있는데도 애초 원효 의상 윤필을 거론한 것은 아마도 포교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지공이나 나옹 무학보다는 원효 의상 등이 더 그럴 듯한 스님들이지 않은가? 그래서 어느 절이건 의례 원효나 의상이 창건한 절이라는 이야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 의상 스님이 지은 절이라고 하는 절들을 다 지으려면 그 스님들이 지금까지 살아 아직 절을 짓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 짓지 못했을 거라고들 한다. 어쨌든 삼막사 스님들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이건 환부역조(換父易祖)에다 결과적으로 절에서 버젓이 사기를 치는 것이다.
영등포문화원에서 실시란 <영등포의 역사와 지명이야기>에서 발췌한 자료다
<영등포의 역사와 지명이야기>는 영등포와 옛날 영등포가 속해 있던 고을인 금천현의 역사와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강좌로 2017년 창원대학교 민긍기 교수가 강의했다.
영등포문화원 자료에서 발췌
http://www.ydpcc.co.kr/board/view.asp?idx=256&page=7&Cates=history
[경기 천년 고찰②] 안양 삼막사 > 뉴스 | 더코리아 (thekorea.kr)
안양시 삼막사三幕寺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478 (석수동)
삼성산(三聖山)에 위치한 전통사찰 제9호인 삼막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후,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하였고, 서산대사 (西山大師)등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스님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바로 그 위치에 삼막사가 지어졌다고 하며,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觀音寺)로 부르다, 사찰이 융성해지면서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삼막사로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다. 근대에는 지운영(池雲英)이 이곳에 백련암(白蓮庵)을 지어 은거하였고 현재 조선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望海樓)와 명왕전(冥王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자료 제60호)이 있으며 고려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인 일명 살례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과 사적비(事蹟碑)(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25호), 삼막사 남녀근석(男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 삼막사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 외에도 삼귀자(三龜字), 감로정(甘露井) 등 다수의 비지정 문화재가 있어 삼막사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삼막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성인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이라는 이름도 이때 지어졌다고 한다.
그후 도선국사[827-898]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로 부르다 사찰이 융성해지며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의 삼막사를 닮아 삼막사로 불리다 언제부터인가 삼막으로 바뀌었다. 고려 충복왕 4년[1348] 나옹대사와 인도 승려 지공이 이곳으로 오니 선풍이 크게 일었고, 조선초 무학 대사에 의하여 동쪽에 불암사, 서쪽에 진관사, 이후 태종 때 대중창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시 왜구가 침범하여 불을 질렸으나 법당 건물이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근대에는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이 이곳에 암자 백년암을 지은 것이다.
-출처: 문화지킴이
삼막사 사적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1707년(숙종 33)에 건립된 사적비로 장방형의 대좌는 윗부분이 모깎이 형식으로 다듬어 그 위에 비신을 끼웠으며, 비신 위에는 지붕돌이 씌워져 있다.
비문은 다소 마멸된 부분이 있으나 신라 때 원효(元曉)가 처음 터를 잡고 띠집을 지어 수도 정진하던 것이 이 사찰의 시초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뒤 통일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새 절을 지어 관음사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고려시대 말기에는 지공(指空)·나옹(懶翁) 등의 선사들이 이곳에 머물러 선풍을 진작시켰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삼먁사·삼막사 등으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지붕돌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네 귀의 추녀 끝은 반전하여 위로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이 비석은 소박하고 평범한 조선시대의 석비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삼막사의 내력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취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근석과 여근석.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인공을 가하지 않은 화강석 2기로 남근석은 높이 150㎝이고, 여근석은 높이 110㎝이다.
속전(俗傳)에 따르면,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원효(元曉)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바위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 두기를 원하고 순조로운 출산과 일가의 번영, 무병 및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등 이른바 깨끗한 날이면 경향 각지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을 켜고 또 삼색 과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다. 이러한 성기숭배 풍속은 선사시대 이래 현재까지도 무속·풍수신앙·동제·미륵신앙의 전통 속에 어우러져 이어지고 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막사 감로정 석조.
삼막사 감로정 석조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478, 삼막사 내 종무소 앞의 삼층석탑 아래에 위치한 귀부형의 석조이다. 2018년 7월 16일 안양시의 향토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석조: 석조(石槽)는 큰 돌을 파서 물을 부어 쓰도록 만든 석기이다. 큰 절에서 잔치를 하고 나서 그릇 따위를 닦을 때 흔히 쓴다.
-출처: 위키백과
삼막사 삼층석탑三幕寺三層石塔.
높이 2.55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현재 삼막사의 선실(禪室) 앞 축대 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법당과 떨어져 있어 현재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사찰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1232년(고종 19) 12월 16일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몽고장수 살리타[撒禮塔]를 화살로 쓰러뜨린 기념으로 이 탑을 세웠다고 하나 전설로 전해올 뿐이다. 현재의 석탑은 1979년에 보수한 것이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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