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김미경]역동하는 안양천 이야기(2011.05.12)

안양똑딱이 2024. 9. 16. 08:57

서울 구로구청 디지털콘텐츠에서

https://www.grandculture.net/guro/toc/GC03001885

 

[개설]

안양천은 한강의 제1지류로, 경기도 과천시 소재의 청계산 남서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기도의 의왕시·군포시·안양시·광명시·부천시와 서울특별시의 구로구·양천구·영등포구 남서부 일대를 북류하여 한강에 합류하는 34.75㎞ 길이의 하천이다. 안양천의 주요 지류로는 목감천을 비롯해 마장천, 삼성천, 수암천, 산본천, 당정천, 임곡천, 오전천, 갈현천 등이 있다. 안양천은 또한 관악산, 청계산, 백운산, 오봉산, 수리산, 양지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전체적으로 타원형의 분지 형을 이룬다. 안양천 유역의 기반암은 대보화강암·화강암질·반상편마암 등이고, 토양은 사질양토로 비교적 비옥한 편이다.

안양천은 선사시대의 흔적을 안고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 흐르는 하천이다. 또한 천변에는 이수정, 영벽정, 망호정 등의 정자가 세워져 있는 등 세상사의 티끌을 자연 속에 날려 보내려던 선인들의 의지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안양천은 일제강점기엔 군수 공장 터로, 6·25전쟁 때는 병참로로 수도권 쟁탈의 교두보가 되어 수많은 전상자를 낸 곳이다. 그리고 1970년대 뒤늦은 산업 근대화 과정에서 안양천 주변은 굴뚝 산업의 메카로 공장 폐수와 공해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러나 현재의 구로구는 안양천 변을 따라 함께하는 여러 지역 공동체와 더불어 새로운 생태 도시, 삶과 문화가 함께하는 역동적인 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안양천길의 역사를 더듬다!]

안양천길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안양천 어딘가와 연결된 길이 떠오른다. 그것은 하천과 접한 한적한 오솔길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산업 기술의 표상으로서의 자동차 도로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안양천길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길이와 크기를 망라한 흔한 지명이다.

인터넷 위키백과사전에는 안양천길에 대해, “안양천길[安養川路]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동 철산고가도로 시계에서 양천구 목동 양화교를 잇는 왕복 4~6차선짜리 도로로, 길이는 6.7㎞이다.”라고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1993년 7월 27일에 이름 붙여진 안양천길은 자동차 도로로, 자동차를 타고 한 번 이 길에 오르면 구로구의 철산고가도로-동양공전 사거리-오금교-신목고등학교-신정교-오목교-목동운동장-목동교-양정고등학교-이대목동병원-목원초등학교-양화교에 닿을 수 있다. 교통 정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그러나 우연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곳은 정체가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구간이다] 6분에서 10분이며 지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한 번 정체에 걸린다면 이 길이 안양천 변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그저 빨리 지나쳐 가기를 바라는 회색의 삭막한 도로일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안양천길만이 아니라 안양천로라는 거리명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안양천길과 안양천로? 이것은 같은 말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는 없다. 안양천로는 이제 공식적으로 사라진 명칭이기 때문이다. 1988년 3월 31일 서부간선도로가 안양천로를 대신하면서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안양천로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안양천을 사이에 두고 안양천길 서부간선도로는 나란히 흐르고 있다.

서부간선도로는 성산대교 남단에서 시흥대교에 이르는 10.8㎞의 도로였으나, 경인고속도로 입구가 도로 시점이 되면서부터 길이가 단축되었다. 이 서부간선도로는 목동교-오목교-신정1교-오금교-고척교-안양교-광명대교-철산대교-금천교-안양천교를 통해 양천구 목동·신정동-영등포구 양평동·문래동-구로구 신도림동·구로본동·고척동·구로동·개봉동-광명시 철산동·하안동과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성산대교를 통해 성산로와 연결되어 서울의 강북 지역과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서해안고속국도[고속국도 15]와 연결되어 다시 제물포길·영등포로·경인로·등촌로·남부순환로·가마산길·공단로를 향하고 있다.

안양천길 안양천 물줄기를 따라 쭉 뻗은 역동적인 산업 자원, 국가 경제와 기술 발전의 상징인 안양천길, 서부간선도로[안양천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양천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여러 갈래의 길들 역시 안양천길인 것이다.

 

[생태 하천으로 거듭난 안양천길을 달리다!]

경기도 광명시·군포시·의왕시·과천시·시흥시·부천시와 서울특별시의 구로구·양천구·영등포구·관악구·강서구를 이어 주는 안양천길은 이제 사람들로 하여금 걷고 싶도록, 자전거를 타고 달려 보고 싶도록 유혹한다. 그동안은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으나 이제 사람과 자연을 더불어 생각하는 생명의 근원, 생태 하천으로 거듭나며 ‘걷는 길’, ‘자전거로 달리는 길’로 조성되어 사람들의 관심과 마음을 보듬어 안고 있는 것이다.

길은 간혹 삶을 살아가면서 쌓일 수밖에 없는 온갖 세상의 때를 훌훌 털어 버리도록 한다. 조용히 혼자 걸으며 명상에 잠겨 자신을 성찰하거나 혹은 다른 이와 함께 걸으며 정을 쌓는 새로운 만남의 장이 되는 것이다. 서울시의 한강 변 자전거 도로망의 구축도 이에 한 몫을 하며 안양천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구로구에서는 안양천 한 자락을 대지의 한 폭으로 품어 안고 안양천길에 쌓여진 산업화의 아픈 기억, 지난 세월을 반성하듯 혹은 한껏 위로라도 하듯 콘크리트 옹벽을 걷어 내고 능소화·줄사철·맥문동 등의 수목을 심어 자연에 사람을 더하고 있다. 또한 양천구와의 경계 부근 수문 양쪽에 잡초가 무성했던 삭막한 구간 65m의 부지도 정비하여 사철나무·옥잠화·비비추·맥문동 등을 심었다.

구로구는 그밖에도 ‘여행 가기 전날 밤 뮤직 페스티벌’[2009 10월 31일~11월 1일, 구로구 구일역 1번 출구 안양천 B축구장] 등의 축제를 마련하고, 안양천 변 구로구 공원 안에는 ‘미니도서함’을 구축하며, 환상적인 억새 군락지 조성 등을 통해 ‘걷고 싶은 길’을 마련하고 있다. 엔진 오일을 내뿜으며 쌩쌩 달리는 자동차길이 아니라 삶을 성찰하고 더불어 함께함을 즐기는 ‘걷는 길’, ‘자전거길’을 조성한 것이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난 울어 버렸지…….”

임지훈의 「길을 걸었지」를 흥얼거리며 안양천 변을 걸었다. 날씨는 꽤 추웠지만 바람은 상쾌했다. 솟대 끝에 매달려 있는 날지 못하는 새들을 보면서 비록 날진 못하지만 솟대 끝에 새가 없는 것보단 훨씬 더 운치가 있어 보였다. 제법 갈대와 가을 하늘이 어울린다. 혼자 걸어도 외롭진 않다. 일곱 마리 날지 못하는 새들과 억새와 가을바람이 내 팔짱을 끼고 등을 밀고 가끔 말을 걸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1주일에 두세 시간은 안양천길을 걷는다. 제주 올래,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생각하고 걷는다. 도심에서 느끼는 안양천 억새는 제주 올래와는 또 다른 느낌의 감동을 줄 수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 내년의 가을을 기약하며 마지막 쓰러져 가는 억새 길을 걸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도 가을은 저만치 가고 있다.

자, 안양천 어디서든 출발해 보자. 갈대숲에 삼림욕도 해 보고, 왔다가는 떠나가는 철새도 멀리서 지켜보자. 우거진 숲 풀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삶의 찌든 때를 벗겨 보자. 이제 안양천 변에서 밝은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무기 발톱 자리가 안양천이 되어 흐르다!]

안양시를 관류하기 때문에 안양천이라 불리는 이 하천은 경계 짓기가 쉽지 않다. 안양천은 경기도 과천시 청계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안양시를 거쳐서는, 서울특별시 구로구로 북류하며 양천구와 영등포구 사이에서 경계를 지우며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위적인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 많은 이야기를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곳에 우뚝 솟은 용왕산의 동쪽 산줄기 끝이 바로 안양천에 닿아 있고, 이것은 다시 안양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양천구와 구로구의 경계 지점에 작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표고 78m의 용왕산은 일명 엄지산(嚴知山)으로도 불린다.

이 산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 어느 때인가 이 산 아래에 살던 박씨라는 노인이 죽어가며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었다고 남에게 알리지도 말고, 염을 할 때 몸을 띠로 묶지도 마라.” 하였다. 하지만 노인의 자식들은 이것을 무시해 버렸다. 그 후로 마을에서는 노인이 죽어 가며 이상한 유언을 남겼다는 소문이 퍼졌고, 마침내 관원들이 무덤을 파헤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무덤 속의 관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이 주변을 살펴보니, 용이 띠에 묶인 채 꿈틀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고 기겁을 한 관원들이 용을 잡아 죽이고야 말았다. 그 후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퍼져 나갔는데, 죽은 박씨가 승천해서 왕이 되려고 했지만 자식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해 결국 용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엄지산을 용왕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각편[이본]에는, 옛날 용왕산에 박씨라는 사람이 죽어서 왕으로 환생하려고 온갖 선정을 베풀고 죽어 이 산에 묻혔지만, 그만 어렸을 때 걸인을 박대했던 단 하나의 업으로 인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용왕산과 안양천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많다. 그 중 하나가 하늘의 천관(天官)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옛날 하늘의 천관이 지금의 선유봉 자리에 살고 있던 아가씨에게 홀딱 반하여, 옥황상제의 뜻을 어기고 아가씨와 몰래 혼인하여 용왕산에 숨어 살았다. 옥황상제는 이 사실을 알고 극도로 노여워하며 이들을 벌하였다. 이로 인해 천관은 용왕산의 이무기로 변하고 아가씨는 선유봉이 되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용왕산의 이무기로 변한 천관은 아가씨를 잊지 못해 선유봉으로 달려갔으나, 옥황상제가 꼬리를 밟고 있어서 이무기의 양 발이 지금의 양화동에 닿았다가 발톱 자국만을 낸 채 다시 용왕산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무기가 흘린 눈물이 바로 안양천이 되었고, 옥황상제가 밟고 있던 발톱 자국이 깊게 파여서 비만 오면 고랑이 되었다는 사연이다.

그런데 훗날 이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해 듣고 옥황상제의 마음이 동하여, 이곳이 사람이 살 곳은 못 되나 많은 사람이 오가면서 밟아 주고 다듬어 준다면 그들의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단다. 그래서인지 이 고랑에 양화교에 가설되어 오가는 사람의 행렬이 끊임이 없다는데, 선유봉 아가씨와 용왕산 이무기의 재회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물에 잠길 것이라던 이무기 발톱 자리는 결국 안양천이 흐르는 수로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안양천의 범람과도 관계있는 것으로, 서울특별시역사편찬위원회에서 1985년에 발간한 『한강사』에 따르면, 안양천 개수 공사를 실시하면서 안양천 수로가 변경된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풍류와 풍경이 하나가 되는 안양천 이수정]

지금은 자취조차 사라져 버린 이수정은 안양천 변[옛 염창탄(鹽倉灘)] 증산[옛 도당산]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치했던 정자이다. 이수정은 조선시대 이덕연(李德演)[1555~1636]과 그의 아우 이덕형(李德泂)[1566~1645] 형제와 관련 있는 곳으로, 이들 형제는 조선의 격동하는 정치사를 함께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 극단적 파벌 정치로 전국이 혼미 상태에 빠져 그 누구의 삶도 안정되지 못했을 때 소북 계열에 속해 광해군을 도와 정치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군주인 광해군이 율곡학파인 서인이 주도하고 퇴계학파인 남인이 묵시적으로 동조한 인조반정을 통해 몰락하자 이들의 운명도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이들 형제의 광해군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심에 감동한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이들을 포섭하고, 이들은 계속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세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상황에서 이들 형제는 이수정을 짓고 언제라도 떠날 채비를 했다. 이수정 터는 이들 형제의 5대 조모인, 효령대군의 외동딸 비인현주(庇仁縣主)에게 하사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풍랑의 역사를 그대로 안고 살았던 이덕연·이덕형 형제가 마음의 위안과 안정을 기원하며 지은 이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이태백(李太白)[701~762]의 시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登金陵鳳凰臺]」에서 따온 것이다. 이태백의 시는 다음과 같다.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

봉황대상봉황유(鳳凰臺上鳳凰遊: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더니)

봉거대공강자류(鳳去臺空江自流: 봉황은 가고 대는 남았는데 아래로 강물만 흐르네)

오궁화초매유경(吳宮花草埋幽徑: 오나라 궁 화초는 오솔길에 묻히고)

진대의관성고구(晉代衣冠成古丘: 진나라 의관들도 옛 무덤이 되었고야)

삼산반락청천외(三山半落靑天外: 삼산은 푸른 산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 이수는 백로주로 나뉘는구나)

총위부운능폐일(總爲浮雲能蔽日: 이 모든 것 뜬구름이 해를 가리매)

장안불견사인수(長安不見使人愁: 장안은 보이지 않고 나그네 수심에 젖게 하네)

이태백의 시를 통해 바로 이덕연·이덕형 형제의 이수정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허무한 정치적 운명, 덧없는 인간사를 자연에서 읊고 있기 때문이다. 수심에 젖은 나그네 같은 이들 형제는 한때나마 이수정에서 세상사를 잊고 쉬고자 했을 것이다.

이수정의 흔적은 진경산수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1742년경에 그린 「이수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740년(영조 16)부터 정선은 5년 동안 양천현령으로 재임하면서 한강 변의 모습을 그렸고, 두 폭의 이수정 그림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한편이 1742년경 33.3×24.7㎝의 비단에 실재하는 경관을 그대로 묘사하는 진경산수화이다.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오르며 바라보는 경치를 그렸다고 한다. 여기서 이수정이 있는 두미암이 안양천 변 가파른 절벽에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염창탄이라고 불렸던 잔잔한 안양천과 대조를 이루는 가파른 산세가 마치 이수정을 품고 있는 듯해서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다음으로 안양천과 관련되어 소개할 문학 작품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이다. 임을 잃은 슬픔을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이 작품은 국문학사상(國文學史上) 가장 오래된 서정시이다. 진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공무도하가」의 무대가 바로 안양천, 옛 양천현의 양화도라는 기록이 1899년(고종 36) 양천군수 박준우가 지은 『양천군읍지(陽川郡邑誌)』에 나오고 있다.

공무도하(公無渡河: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공경도하(公竟渡河: 임은 기어이 물을 건너셨네)

타하이사(墮河而死: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당내공하(當奈公何: 이제 임이여 어이할꼬)

악곡명을 따라 「공후인(箜篌引)」이라고도 하는 이 노래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조선 때 뱃사공이었던 곽리자고가 하루는 강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백수광부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들고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 세차게 흐르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그 뒤를 따르던 그의 아내가 그것을 만류했으나 백수광부는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물에 빠진 시신을 보면서 그의 아내는 공후를 뜯으면서 바로 이 노래를 애절하게 불렀다. 아주 구슬펐다. 노래가 끝나자 그의 아내 역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것을 목격한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서 아내 여옥에게 들려주었더니, 여옥 또한 슬퍼하면서 공후를 뜯으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안양천과 관련하여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물이다. 물은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창조의 원천, 재생과 부활과 정화를 상징한다.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의 애달픈 죽음이 바로 이 물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들 죽음 역시 또 다른 부활을 약속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흐른다 - 안양천과 함께]

안양천은 청계산·삼성산·관악산 등지에서 발원하지만, 경기도 안양시의 중앙, 특히 안양동 앞으로 흐르기 때문에 안양천이라 붙여진 하천이다. 이 안양천은 한반도의 역사와 함께 흘러 내려왔다. 평촌과 관양동과 인덕원의 선사시대 유적들을 통해 고대부터 인류의 삶의 근거지를 형성했던 안양천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석수동의 중초사와 안양사 등을 통해서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함께 했던 안양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양천은 조선 전기에는 대천(大川), 조선 후기에는 기탄(岐灘)으로 불렸다. 1486년(성종 17)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금천현 편에 서술된 안양천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대천은 현의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로 흘러 들어간다.” 『동국여지승람』양천현 편에는 “현의 남쪽 14리에 인덕원천(仁德院川)이 있고, 현의 서쪽 19리에 학고개천(鶴古介川)이 있다.”고 전한다. 이로써 안양천의 상류는 인덕원천과 학고개천이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861년(철종 12)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기탄’으로 표기되고 있다.

1795년에 정조 안양천에, 하단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이 완전한 반원을 이룬 만안교를 가설하였다. 길이 31.2m, 폭 8m의 이 다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소인 화산릉을 참배할 때 연(輦), 즉 왕이 거둥할 때 타고 다니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가설한 교량으로, 안양시 석수동 관악전철역 남서쪽 약 3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철종[1831~1863]은 조선왕조의 몰락과 왕실 권위 추락의 전조를 보여 준 왕으로, 강화도에서 살다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갈 때 바로 안양천 뱃길을 이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에는, “철종이 왕위를 잇기 위해 양화도에 이르렀을 때 주위 언덕에 있던 많은 양의 떼들이 몰려와 맞이하는 것이 마치 사람들이 문안드리는 모습과도 같아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인 1925년[을축년] 7월에 유래 없던 대홍수가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한강 개수 기본 계획을 세워 하구를 안양천에서 염창동 쪽으로 내려붙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안양천의 수로가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일제는 안양천 변에 전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고자 하는 야욕을 불사르기 위한 대동아전쟁 군수 용품을 조달하는 군수 공장을 지었는데, 왜냐하면 이곳이 바로 공업용수를 얻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안양천은 남과 북이 갈라져야 하는 민족의 비극을 겪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는 경인 간의 병참로로 수도권 쟁탈의 최후의 교두보가 되었다. 이 때문에 피아간에 수많은 전상자를 낸 곳이기도 하다.

1970년대 안양천 주변은 굴뚝 산업의 메카로, 성장의 부산물인 공장 폐수와 공해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이는 구로구에는 동쪽으로 영등포구와 경계를 이루면서 도림천이 흐르고 있고, 서쪽으로는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면서 안양천이 흘러 한강에 유입하는 교통상의 이점에다, 풍부한 물줄기와 풍부한 노동력, 공장을 지을 땅값 등이 주변 지역에 비해 싸서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안양천, 구로구의 신 허브!]

안양천에 쏟아지는 집중 호우는 이 지역에 상습적인 수해를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과 6·25전쟁 이후에 가속화된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안양천은 하천 유역에 건설된 대규모 공단에서 유출된 폐수로 심각한 폐해를 입었다. 그런 안양천의 역사가 새로이 바뀌고 있다. 근대 산업화로 잃어버린 사람과 자연이라는 인류의 대전제가 다시금 일깨워진 것이다. 안양천 변에 위치한 구로구를 포함한 여러 지역 단체와 시민 단체에서 최근 벌이고 있는 다양한 ‘안양천 살리기’ 운동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안양천은 폐수와 오염이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이 함께하는 생태 하천의 이미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마치 안양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양한 물고기와 새들과 벌레들이 각자의 부단하고 고단한 노동을 통해 안양천의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벌이는 자연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공간을 영원히 점유하거나 영원히 소유할 수 없음을 압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구의 한 귀퉁이를 일시적으로 빌려 쓰거나 빌붙어서 삽니다. 우리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석수시장 내 빈 점포를 일시적이며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이유는 사람 상호간의 공통과 차이를 나누고, 지역 주민의 삶과 공동체적 꿈과 희망에 결합하고, 미래의 주인인 아이들과 소통하며 ‘공공 예술의 습지-안양’을 조성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이상을 향한 작은 몸부림에 불과할지라도 우리 삶이 진부하지 않게 진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아주 소중한 ‘삽질’이었습니다.”

이것은 문화·예술과 함께하는 습지를 복원하는 세계 예술인들의 ‘우정의 삽(SAP)질’을 위한 2008 SAP석수아트프로젝트 실행위원장 박찬응의 설명이다. 안양천의 역사를 복원하는 ‘삽질’ 그 자체였던 이 행사는 일본 토리데아트 프로젝트[TAP] 작가 3명이 석수시장에 입주하면서 시작되었다. 문화·예술 담당자들과 자원 봉사자들이 주민들의 후원과 참여를 유도하며 이루어진 이 행사에서는 뉴질랜드에서 온 월리엄스의 「기억으로 재생되는 종이블록 위크숍」 등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워크숍은 1970년대 안양천 변에 살았던 주민들이 삼덕제지에서 흘러나온 종이 슬러지를 어떻게 재활용하였는지를 재현하는 의미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러 안양천 프로젝트 가운데서도 꼭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 ‘안양천 살리기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2004 안양천프로젝트 Flow이다. 이 프로젝트의 주제는 식물[Flower], 대지[Land], 오브제(Object), 벽[Wall]으로, 각각의 이니셜을 본떠 ‘FLOW[흐르다]’로 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안양천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주최 격인 스톤앤워터가 안양 지역의 21개 민간단체를 모아 결성한 ‘안양천 살리기 네트워크’는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에 접근하는 새로운 운동이다. 2004년 9월 18일부터 10월 17일까지 여러 단체의 힘을 모아 마련된 공연과 전시의 공간은 스톤앤워터갤러리, 안양대교 근처, 삼덕제지 공장 터, 석수역 근방의 연현마을 생태공원 등으로 안양천을 따라 흘러가듯 조성되었다.

이 행사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거론하자면, 유동조의 「물 퍼포먼스」, 이인경 외 4인이 공동으로 작업한 「자라나다」, 박용국의 「수상조각」이나 이칠재의 「생기 선물」 등이다. 유동조의 「물 퍼포먼스」는 방둑에 ‘물’이란 글자를 그려 넣은 것으로, 수면에 글자가 반사된다. 하천에 물이 많아진다면 이 작품은 가라앉겠지만 반대로 하천이 최적의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인경 외 4인이 공동으로 작업한 「자라나다」는 강둑에 심어진 나무 밑동에 간단한 화분을 그려 넣어 유머와 동시에 “인간이 자연에게서 원시성을 빼앗아 자연을 길들여 오지 않았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박용국의 「수상조각」, 이칠재의 「생기 선물」은 안양천의 수질 오염과 생태에 대한 심각성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주는 장치이다.

이러한 행사의 체험을 통해 환경 문제를 피부로 느끼게 하며, 삶과 예술을 통합하는, 항상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새가 날아들고, 물고기가 서식하며, 아이들이 뛰노는 정감 있는 모습이 바로 안양천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는 현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바로 구로구가 위치하는 것이다.

 

구로의 밝은 미래, 역동하는 안양천 - 디지털구로문화대전

[개설] 안양천은 한강의 제1지류로, 경기도 과천시 소재의 청계산 남서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기도의 의왕시·군포시·안양시·광명시·부천시와 서울특별시의 구로구·양천구·영등포구 남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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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