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박두진 시인
[2007/10/26]시인
[2007/10/26]시인
박두진 시인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은 1916년 안성 출생으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시인의 유명도에 비해 안양과의 연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에 ‘안양시사’ 발간을 위한 자료정리와 ‘안양의 자랑거리’ 선정위원회에서 박두진 시인이 화두에 올랐던 터라 안양 관련 부분을 정리·소개해 보고자 한다.
박두진 시인은 1942년 8월에 일가족 5인이 안양으로 이주하고 금융조합의 사무원으로 취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일가족은 안양중앙교회에서 1944년 8월에 세례를 받고, 1948년에 장로에 장립되었다.
“안양으로 온 뒤로 그간 이렁성 하는 중에 아직 아무 것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악 못 미처의 풍광은 매우 가려하고 안정되어 있으나, 아직 주택 구하지 못하고 두어 간 세 얻어서 지냅니다. 한 30분이면 도보로 통근되오며, 저녁이면 석유불 밑에서 겨우 눈을 밝히고 있습니다.(중략) 벗이 그리움에 관악산 <연주암>을 고쳐 나의 <연우암>이라 불러야겠습니다”
위는 박두진 시인이 ‘소향(素鄕·이상로 시인)’에게 1942년 9월25일자로 보낸 편지의 일부다.(이상은 박용산 목사의 ‘안양중앙교회 55년사’ 참조)
박용산 목사는 당시 박두진 시인이 시작뿐만 아니라 ‘북치고, 나발불고, 행진하면서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던’ 노방전도에 함께 나섰던 일을 그립게 회상했다.
한편 박두진 시인은 1947년 말부터 구 삼덕제지의 서무과장으로 근무했지만, 1950년 초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중앙교회와 삼덕제지는 물론이요 안양과의 인연도 끊어진다.
박두진 시인이 8년 동안 안양에 거주하면서 남긴 두 가지 문학적 업적이 있다. 그 하나가 한국시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청록집’의 출간이고, 또 하나는 ‘안양문학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청포도’의 간행이다.
박두진·박목원·조지훈 시인의 합동시집 ‘청록집’이 간행된 것은 1946년, 곧 박두진 시인이 안양에 기거하던 때다. 그러니까 시인은 ‘청록집’에 수록된 12편의 주옥같은 시들을 안양에서 탈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양은 박두진 시인을 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안양문학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청포도’의 발행에 대해서는 1947년 8월30일자의 동아일보 신간 소개란의 기사로 확인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인들의 면면이나 활동내용, 특히 ‘청포도’ 동인지가 남아 전해지지 않음은 웬만한 문학적 유실이 아닐 수 없다.
창간 주역인 정귀영 평론가 자신도 “8·15광복 직후에 안양에 「청포도」라는 동인지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안양문학의 효시였다고 생각한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러 당시의 동인들 이름도 박두진 외에는 기억에서 되찾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두진 시인이 안양 최초의 동인회와 동인지의 창립·창간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안양문인협회에서는 그분들이 ‘안양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청포도’를 창간한 1947년을 기점으로 「안양문학60년사」의 편찬계획을 세운 바 있는 터에 안양시에서도 삼덕공원의 조성과 함께 박두진 시인의 일터였던 그곳에 기념시비의 건립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두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연세대 입학 직후 박두진 교수님 댁을 찾은 적이 있다. 1학년이어서 교수님의 강의는 없었지만, 안양과의 연고를 들은 바 있고, 또한 시인 지망생으로서는 당연히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교수님은 “나도 안양에 살았었지…” 하시며 운을 떼셨지만 그 이상의 말씀은 없으셨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마 후 대학을 떠나셨고, 조병화 시인이 강의를 맡게 되었다. 편운 선생과의 관계는 여기서 새삼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박두진 시인의 생존시에 자주 찾아 뵙고 안양에서의 문학생활을 자상하게 여쭙지 못한 점, 그리고 좀더 일찍 시비건립을 추진하지 못한 점이 못내 죄스럽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은 1916년 안성 출생으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시인의 유명도에 비해 안양과의 연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에 ‘안양시사’ 발간을 위한 자료정리와 ‘안양의 자랑거리’ 선정위원회에서 박두진 시인이 화두에 올랐던 터라 안양 관련 부분을 정리·소개해 보고자 한다.
박두진 시인은 1942년 8월에 일가족 5인이 안양으로 이주하고 금융조합의 사무원으로 취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일가족은 안양중앙교회에서 1944년 8월에 세례를 받고, 1948년에 장로에 장립되었다.
“안양으로 온 뒤로 그간 이렁성 하는 중에 아직 아무 것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악 못 미처의 풍광은 매우 가려하고 안정되어 있으나, 아직 주택 구하지 못하고 두어 간 세 얻어서 지냅니다. 한 30분이면 도보로 통근되오며, 저녁이면 석유불 밑에서 겨우 눈을 밝히고 있습니다.(중략) 벗이 그리움에 관악산 <연주암>을 고쳐 나의 <연우암>이라 불러야겠습니다”
위는 박두진 시인이 ‘소향(素鄕·이상로 시인)’에게 1942년 9월25일자로 보낸 편지의 일부다.(이상은 박용산 목사의 ‘안양중앙교회 55년사’ 참조)
박용산 목사는 당시 박두진 시인이 시작뿐만 아니라 ‘북치고, 나발불고, 행진하면서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던’ 노방전도에 함께 나섰던 일을 그립게 회상했다.
한편 박두진 시인은 1947년 말부터 구 삼덕제지의 서무과장으로 근무했지만, 1950년 초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중앙교회와 삼덕제지는 물론이요 안양과의 인연도 끊어진다.
박두진 시인이 8년 동안 안양에 거주하면서 남긴 두 가지 문학적 업적이 있다. 그 하나가 한국시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청록집’의 출간이고, 또 하나는 ‘안양문학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청포도’의 간행이다.
박두진·박목원·조지훈 시인의 합동시집 ‘청록집’이 간행된 것은 1946년, 곧 박두진 시인이 안양에 기거하던 때다. 그러니까 시인은 ‘청록집’에 수록된 12편의 주옥같은 시들을 안양에서 탈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양은 박두진 시인을 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안양문학동인회’의 결성과 동인지 ‘청포도’의 발행에 대해서는 1947년 8월30일자의 동아일보 신간 소개란의 기사로 확인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인들의 면면이나 활동내용, 특히 ‘청포도’ 동인지가 남아 전해지지 않음은 웬만한 문학적 유실이 아닐 수 없다.
창간 주역인 정귀영 평론가 자신도 “8·15광복 직후에 안양에 「청포도」라는 동인지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안양문학의 효시였다고 생각한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러 당시의 동인들 이름도 박두진 외에는 기억에서 되찾을 수 없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박두진 시인이 안양 최초의 동인회와 동인지의 창립·창간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안양문인협회에서는 그분들이 ‘안양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청포도’를 창간한 1947년을 기점으로 「안양문학60년사」의 편찬계획을 세운 바 있는 터에 안양시에서도 삼덕공원의 조성과 함께 박두진 시인의 일터였던 그곳에 기념시비의 건립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두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연세대 입학 직후 박두진 교수님 댁을 찾은 적이 있다. 1학년이어서 교수님의 강의는 없었지만, 안양과의 연고를 들은 바 있고, 또한 시인 지망생으로서는 당연히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교수님은 “나도 안양에 살았었지…” 하시며 운을 떼셨지만 그 이상의 말씀은 없으셨다. 교수님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마 후 대학을 떠나셨고, 조병화 시인이 강의를 맡게 되었다. 편운 선생과의 관계는 여기서 새삼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박두진 시인의 생존시에 자주 찾아 뵙고 안양에서의 문학생활을 자상하게 여쭙지 못한 점, 그리고 좀더 일찍 시비건립을 추진하지 못한 점이 못내 죄스럽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2007-10-26 17: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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