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조선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철도를 까는 일이었다. 경성을 거쳐 평양, 의주를 지나 만주까지 군사와 물자를 보내는데 철도만큼 시급한 일도 없었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에는 경원선, 호남선, 전라선, 중앙선, 함북선 등 국토 곳곳에 터널을 뚫고 철로를 깔아 경제적 수탈과 군사적 지배의 지렛대로 삼았다.
철도가 깔릴수록 종사원도 늘 수밖에 없다. 일제하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가장 거대한 기관이었는데, 1906년 6월 통감국 철도국 시절에는 5400명이었으나 해방 직전 1945년까지 10만6000여명으로 급증했다.
거대해진 기관만큼 ‘철도가족’끼리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각종 후생복지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타 기관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후생복지는 철도 종사원에게 제공되는 주거시설인 철도관사나 철도병원의 의료혜택이다.
경성의 용산, 청량리, 수색이나 부산 초량, 대전, 순천, 평양, 강계, 해주 등 전국 철도 교통 요충지에는 수백 동의 대규모 관사 단지가 조성됐다. 이뿐만아니라 역사의 규모에 따라 중규모 단지, 작은 역에는 소규모 단지를 이뤘다. 역장 관사는 단독 건물로 역과 인접하여 따로 지었다. 이러한 단독주택 주거단지는 요즘으로 치면 '타운 하우스'인 셈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택 문화였다.
현재 일제강점기 내내 얼마만큼 철도관사가 지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오늘날 거의 소멸됐으며 철도관사가 존재했는지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철도관사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단지는 가로세로 구획을 잘 나눴고 주택들은 정남향이다. 초창기에 지은 철도노동자 숙소는 막사형의 연와조 목조 가건물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벽돌이나 콘크리트 벽돌로 벽을 올린 목조단층에 시멘트 기와를 얻은 일본 전통가옥양식의 근대화된 형태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의 전통 난방 시설인 온돌을 가미하기도 했다.
[다크 헤리티지를 찾아] 일제강점기의 '타운하우스' 철도 관사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 또는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는 '부정적 문화유산'을 말한다.
1900년 초에 경부선이 부설되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철도국은 1943년 지금의 의왕시 삼동 192번지 일대를 철도기지화 시킨후 철도국 종사자를 위한 소규모 신도시를 계획하였고 100여동 200세대의 관사단지(官舍團地)를 조성하였다.
용산에 근무하는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부곡관사로 이주해오면서 그들의 통근편의를 위하여 1944년 수원역과 군포역 사이에 철도역을 신설했는데 이 역이 부곡역(2003년 의왕역으로 명칭변경)이다.
부곡역은 경부선 수원∼군포 사이에 있는 역원이 배치된 간이정차장으로 위치로는 경기도 수원군 일왕면 삼리였고 철도 거리상으로는 수원∼부곡은 8㎞, 부곡∼군포는 3.8㎞로 당시 의왕 철도관사촌이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자 자연스럽게 마을이 만들어지고 이후 이후 의왕지역에 철도관련 시설들이 대거 자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부곡역(현 의왕역)은 1964년 11월21일 보통역으로 승격되고, 1967년에는 역구내 인접지역에 남영금속주식회사(한국기계, 현 대우중공업)가 설립돼 의왕시가 철도차량 생산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는 시발점이 된다.
1974년에는 전철이 개통되면서 철도화물기지 준공으로 의왕시 철도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연이어 철도박물관과 한국철도대학(현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철도공사 인재개발원 등 세계적 수준의 집적화된 철도시설이 들어서 그야말로 의왕시가 철도산업의 요충지로 떠올랐던 것이다.
철도 관사촌이 조성된 당시에는 넓은 대로변에 좌우로 규칙적으로 배열되었으나 현재는 도로 폭이 좁아지고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상태로 현재 약 35동 정도의 건축물에는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고, 3동 정도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택들은 시멘트 몰탈 벽도 깨끗하고 복원도 가능한 상태로 이는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시대의 철도관사(鐵道官舍)로 문화재 가치가 높아 시급한 보호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다.
"도시와 건축도 생명체처럼 생노병사한다. 의왕시 부곡역은 철도의 메카이다."
건축사로 안양지역 문화찾기와 보존에 관심을 갖고 역사적 사료 발굴과 알리기에 앞장서온 시흥군 태생의 최승원교수(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겸임)는 "건축의 나이도 60살이 되면 축하해 주자"며 오래전 부터 부곡역 주변의 철도 (구)관사의 보존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부곡역 관사촌은 해방동이(1945년)로 태어나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야생초처럼 살아 남아 있다며 태어날 때는 넓은 대로변 좌우로 건축 되었는데 도로 폭을 줄이고 난 개발로 인하여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모습이라고 느낌을 피력했다.
또한 오래된 건축이지만 시멘트 몰탈벽이 깨끗하고 복원이 가능하다며 "건축도 60살이 되면 수리도 해 주고 주변에서 칭찬도 해 주어야 오래 산다"고 철도 박물관이 철도관사의 부분 복원과 연계될 때 철도 관광의 볼거리가 풍부해 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부곡역 설치 이후 100년이 흘렀지만 도시의 유산(물)이 몇 개나 남아 있는가? 묻고 의왕시는 Celebration of Cities에 속한다고 문화사업과의 연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의왕시사에 기록된 철도관사 이야기
의왕역에서 내려 이정표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도와 관련된 많은 시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철도대학, 철도박물관 이정표가 보이고, 철도공무원연수원(중앙연수원)이 있고, 일제시대 때 일본인 철도공무원들의 관사였던 집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인근의 (주)로템은 기관차, 전동차 객차를 생산하는 곳이며, 의왕ICD가 생긴 것도 이러한 철도와 관련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경기도내 철도용지 비교하면, 의왕시가 네 번째로 많은 철도용지(130만 1,975.3㎡)를 가지고 있다.8) 이것은 의왕시 전체 면적(5,395만 3,257.1㎡)의 2.4% 차지하는 면적이다.
그러나 의왕시가 철도와 깊은 인연을 짚은 것은 이 면적에서 보이는 비중이 아니라 옛 부곡역 외에도 철도관사가 있기 때문이다.9) 100세대 200호를 지었던 이 옛 일본철도공무원 관사는 현재 정확히 몇 채가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도 부곡중앙길을 올라가며 좌우로 드문드문 보이는 지붕을 볼 수 있다. 이들 관사는 현재 음식점이나 주점으로, 월셋방을 놓은 다가구 임대주택으로 개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사는 사라졌으나 그 터에 새로 지은 연립주택들이 많고 이 길 끝에 이르면 고층 아파트 단지들을 만나게 된다. 중앙길을 올라가며 왼쪽은 1~50호까지 일련번호가 부여되며, 그 끝에서 다시 내려오며 51~100호까지 이어진다. 지금도 이 옛 일본인 관사에 살고 있는 최재희는 이 관사가 “일본사람들이 피난 와서 살려고 이렇게 지은 거”라고 한다.
1채 지으면 2가구가 살게 된 거, 이렇게 100호를 지어 200세대가 살았어요, 살기는 반반 짤라서 200세대가 살았어. 일본사람들이 대동아전쟁이 나서 서울 살면 위험하니까 피난집이지. 살기 위해서 지은 거야, (전쟁에) 졌으니까 일본으로 간 거고. 그 때 당시 해방돼서 한국사람이 철도에 다닌 사람들이 산거. 돈 주고 산 게 아니고, 한국철도에 다니는 사람이 그냥 여기 들어와서 산거, 배당은 어떻게 된 줄 몰라도 철도의 각 분야 다니는 사람에게 불하를 한 거지. 살지 못한 사람들은 팔아서 나가고, 철도에 개인에게 팔았는데 철도를 관 둔 사람,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팔아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고, 팔아서 빌라 짓기도 하고.10)
일본인의 피난집은 지금 여러 형태로 개조하여 사용되고 있는 모습에서 그만큼의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하지만, 최재희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앞뒤로 있는 연립들이나 빌라들과 달리 그의 집 대문은 장미덩쿨로 아치를 만들고 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한쪽 귀퉁이에는 국화와 장미들이 자라고 우물이 있었던 자리 뒤로는 감나무가 있었다. 또 한쪽에는 배추와 고추들이 자라는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부곡이 공기가 좋아서 선택했는데, 연립, 아파트가 들어와서 공기가 나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 울타리 안만큼은 예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정경이 그대로였다. “이 집에 산 것은 약 50년이 되는데, 그것도 철도 전기계통에 근무하여서 지금의 집을 불하를 받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불하 받을 때 필요한 것 중에 입사증이 있었는데, 내가 산 것만 알지 얼마에 샀는지는 기억이 없어. 철도에는 운전·전기 계통이 있어서 그 분야에 ‘너는 몇 채 갖고 있어라’ 배당 한 후 나중에 불하한 거고. 6·25가 나서 몇 채 없어지고 그 나머지는 빌라 아파트가 들어오고. 이렇게 관사를 왜놈들이 피난집으로 지은 거예요. 이거 짓기 위해서 간이역을 지은 거고. 철도공무원만 출퇴근 할 수 있게.
최재희에게 피난집으로 각인된 이 관사는 1960년대 후반, 개인에게 불하되었는데 이것을 관장한 곳은 수원세무서였다. 평당 1000원에서 2000원으로, 1가구가 보통 130~140평이었다. 1946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부곡으로 내려와 관사에 살았던 단창욱도 당시 관사의 내부에 대해, “관사 1가구는 목욕탕이 있었고, 다다미방이랑 온돌방이 두개 있는 19평짜리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1호가 두 가구로 46년 당시 전기, 목욕시설, 문화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어요. 일본사람 사용하던 거 그대로. 아침 출근시간엔 역사에서 싸이렌을 울려주곤 했어요”라고 하였다. 이 관사가 생김으로써 간이역이 생겼고, 해방 후 역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은 부곡이 중심지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때 관사는 철도공무원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목욕시설과 전기, 전화시설을 갖춘 ‘문화시설’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관사가 하나의 생활권으로서 예를 들면,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부고장을 집집마다 돌리는 게 가능하였고, “몇 호집이냐?”라는 식으로 묻는 것이 가능하였다. 체육대회가 열릴 때에도 관사를 중심으로 귀속의식이 있어서 중앙길을 중심으로 ‘남관사(1~50호)’, ‘북관사(51~100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철도가 생겨 전기·전화가 들어오면서, 부곡은 중심지가 되었고, 부유층은 관사에 살기도 하였다.11)
1943년 건립된 이 철도관사는 당시 교통국의 중추인 용산·경성지구의 배후기지로서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부곡관사의 형태는 집 한 채에 두 가구가 살도록 설계되어 있고 현관이 측면으로 되어 있다.12) 그리고 서너집이 공동우물을 있었고, 집 앞으로는 작은 도랑을 내어 하수가 빠져나가도록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철도청의 허가를 받아 철도관련 종사자들이 내려와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대체로 객화차 사무소 직원, 철도 전기수선공, 선로보수 관계자, 기차역 근무자, 기관사 등이었다.13)
지금은 여러 가게들과 월세방으로 변해버린 철도관사는 그래도 기와를 올린 지붕과 시멘트를 바른 허름한 벽이 옛 모습을 알게 해준다.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서 지어졌지만 실제 60여 년 동안 부곡 주민의 주택으로서 버텨왔으며, 의왕지역 최초의 근대적인 주택단지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따라서 사라져가는 관사의 옛 모습은 일제의 잔재로서만이 아니라 한국민이 겪은 근대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물로서 근대문화 유산의 의미가 있으며, 한국철도사와 깊은 인연을 가지며 그 시설이 집적되어 있는 의왕시에서 이는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1부) 중앙로 남쪽
https://blog.naver.com/kgh19941061/220498320565
의왕 철도관사촌 - 부곡동 철도특구의 유래(2부) 중앙로 북쪽
https://blog.naver.com/kgh19941061/220519040520
의왕 철도관사 탐행기(상편) 중앙로 남쪽
https://m.blog.naver.com/kgh19941061/221076489708
의왕 철도관사 탐행기(하편) 중앙로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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