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문화논단 <안양의 인물과 교육문화>
‘호계서원(虎溪書院)’관련 문헌 속 흔적을 찾아서...
독암조종경, 창강조속을 배향한 호계서원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 조성현
- 목 차 -
□들어가는 말
□서원(書院)의 개요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
□조속(창강, 趙涑, 1595~1668)
□조한구(趙漢九, 1833~1965)
□문헌 속 호계동과 안양
□독암유고 옛시문 속에 반영된 당시 조선시대 호계일원의 생활상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호계서원관련 문헌자료
□호랑이와 안양(권)
□안양시 호계동의 지명유래(자료제공 안양시)
□타도시 시·군·구 서원 육성 사례분석(인터넷검색 등 인용)
□(안양시)호계서원지 이미지사진
□호계(창강)서원관련 각계의 의견(결론)
□참고문헌
□들어가는 말
호계서원은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지역 교육기관으로 과천현 서쪽 15리(또는 10리)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문헌 속에 전승되어 오고 있다.
안양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인 호계서원의 현위치는 ㈜효성 안양공장의 동쪽으로 서울의 외곽순환도로가 지나는 하부공간의 구,신진자동차학원(안양장례식장 인근)의 북쪽 나지막한 야산지역으로 추정되며 1990년 중반까지도 이곳에서 와편과 주춧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호계서원은 인재육성과 정신적 구심역할을 하였던 안양선비들의 최초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잊혀져가는 안양의 역사(교육사)를 바로 세우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가치 있는 일은 우리의 몫이며 사명이다. 호계서원과 관련된 구술을 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둘씩 떠나가고 호계서원과 관련된 주춧돌, 초석, 와편류 등조차 찾을 수 없다. 또한 호계(창강)서원지의 흔적도 사라지고 관련 사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점 여간 아쉽다. 관련 문헌 및 사료가 있더라도 전문적인 식견으로 자료에 대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대다수의 안양시민은 호계서원에 대해 관심조차 없고, 알 필요성과 가치를 못 느끼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인근 안산시는 잊혀져가는 인물인 일제강점기 최용신 선생을 발굴하여 ‘최용신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녀의 삶과 정신을 살펴보는 장을 마련하여 무한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선생은 꽃다운 나이 지병으로 돌아 가셨지만 농촌계몽운동가의 모델로서 육성한 안산시의 사례는 눈여겨 볼만하다.
또한 인접 과천시는 추사김정희 선생의 흔적을 살려 ‘추사기념관’을 설립하여 교육 및 문화관광자원 콘텐츠로 적극 육성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시도 타도시 사례와 같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상가, 계몽가, 교육가 등 역사적 인물 및 관련 유적지 등을 발굴하여 묻혀 사장되는 역사를 바로 세우고 향토자원으로 적극 육성할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에 배향된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이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섬긴 인물이다. 특히 그는 말년에 자기가 거주했던 ‘호계리, 호계촌사’를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시어로 ‘호계’를 찬미하며 노래했던 지역을 사랑했던 선비이다. 조종경의 선비정신, 지역사랑 정신은 귀감이 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철저한 수양과 도덕으로 무장한 조선유생들의 삶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덕목과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산업화에서 잊혀져가는 유교문화를 복원하여 유교의 가치와 덕목 등 장점을 살려서 지역에 계몽함은 가치 있는 일이며 우리사회가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로 가는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 논고에서는 제한적이지만 문헌검토, 인터넷검색 등을 통해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찾아가서 안양교육 발상지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 위치에서 짚어보고 미래 발전방안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또한 독암선생이 남긴 유고집 속의 시어를 분석 및 가공하여 그 당시의 호계일원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종경이 독암유고집에서 말하는 ‘호계’이외에 더 나아가 ‘호계동의 지명유래’, ‘호계동(안양)의 호랑이’를 포괄적으로 문헌 고찰하여 호계동을 실감 있게 그리고자 하였다.
단 부족한 실력 탓에 안양문화원발간 안양문화11호(3부,‘호계서원’파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요약수준으로 알기 쉽게 발췌 및 재가공하여 정리했음을 밝힌다. 덧붙여 본 노고를 수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도해주신 경기향토문화연구소 김정석 연구위원(문학박사, 수일재연구소 소장)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모쪼록 본 논고가 자료공유를 통한 기억 속에서 멀리 잊혀져가는 지역교육의 발상지와 뿌리를 찾아가는 단초를 마련하고 더불어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사회의 활발한 연구와 관심을 환기시키는 전기가 되길 바란다. 부족하지만 본 논고가 호계서원이 훼철(毁撤)되어 지역에서 점차 잊혀져가는 역사를 재정립하고 미래발전방안을 고민하는 장(場)으로 연결되는 가교(브릿지)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서원(書院)의 개요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의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사림이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관학이 중심이었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이다.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중종38)에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안향을 봉사(奉祀)대상으로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원에는 도동서원(대구광역시소재, 보물 제350호), 옥산서원(경북 경주시소재, 사적 제54호), 소수서원(경북영주시소재, 사적 제55호), 도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170호), 필암서원(전남 장성군소재, 사적 제242호), 병산서원(경북 안동시소재 사적 제260호)등이 있다.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
호계서원 창건 문헌기록:
여지도서(영조 1757년 이후), 서원지(1799), 과천현읍지(1899), 증보문헌비고(1908), 연려실기술(1912), 전고대방(1926), 경기도서원총람(2007)
서원은 학문의 연구와 선대의 명현(선현)을 추모하며 제향을 올리기 위하여 설립한 인재양성기관으로 향사 및 지방교육을 담당해 왔다. 서원은 국립지방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달리 사설적인 교육기관이다.
호계서원은 ‘여지도서’ 등 여러 문헌 속에 등장하는 데 기록 속에는 과천현 서쪽 15리(또는 10리)되는 호계리에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한 숙종 42(병신, 1716)년 창건했으나 현판을 내려 받지 못했다.
김계명(金啓明) 등의 상소에 의해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호계서원의 제향인물은 조종경과 조속이다. 기록에 따라 창건연대가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년(병신, 1716)이 등장하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호계서원은 설립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98년 전(또는 333년 전)창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호계서원(虎溪書院)은 과천현 유생의 상소로 (독암)조종경과 그의 증손자 (창강)조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제향(祭享, 제사)을 올리기 위해 안양의 호계동에 창건되었으며, 창강서원(滄江書院)이라고도 한다. 창강은 조종경의 증손자인 조속의 호이다(창강 조속의 증조부는 조종경이다).
서원의 옛 위치는 안양장례식장 부근(구, 신진자동차학원) 동쪽 약 100미터(호계 2동 산 43번지)지점으로 추정된다. 안양시의 지표조사결과 당시 초석(礎石)과 와편(瓦片)이 수습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7년(1870) 봄의 어느 날 폐원(훼철)되었다.
호계서원에 배향되었던 조종경과 조속의 후손들은 호계서원보다는 창강서원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는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조종경 보다는 미술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조속을 더 존경하며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김안로로부터 받은 조종경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조종경의 올곧은 성격을 중시하기보다는 증손자 조속에 대한 평가가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창강은 호계서원(과천), 수곡서원(광주), 건암서원(서천), 백석사(白石祠, 김제) 등 여러 곳에 제향 된 점으로 볼 때 당시 덕망과 실력을 갖춘 유명 선비로 보인다. 한편 조선 숙종 42년인 1716년 창강서원과 비슷한 시기 과천군내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 사충서원(思忠書院)과 함께 지방교육기관으로 과천향교(果川鄕校)가 지방교육의 역할을 분담하며 지역 인재양성을 선도했다.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은 풍양인으로 아호가 독암(獨庵)이다.
조종경은 후대 선비들의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호계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1530년(중종25) 이임(李任) 등이 동궁(東宮, 세자궁)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론(士論)을 일으켜 김안로(金安老)를 다시 중요하려하자 조종경은 반대하다가 중종26년(1531) 심정(沈貞)의 일당이라는 죄목으로 파직 당했다.
조종경은 김안로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조선시대 전한(典翰) 등 관직을 두루 엮임 한 바 있는 인물이다. 김안로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 제2 繼妃 尹氏)를 폐하려다 실각하여 1537년(중종32) 진도로 유배된 이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조종경은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과천현 호계서원에 제향 된다.
독암유고 속 옛시문을 분석해보면 그는 자기가 이미 일찍이 보유했던 대지(부지)가 호계동에 있었지만 관직을 따라 여기저기 각처로 이동하면서 그간 호계동에 터전을 잡지 못했다. 그는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어 36세 관직에서 파직된 이래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안양시 호계일원에 머물며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일반적으로 ‘촌사’는 풍류나 자연을 즐기고자 조성한 공간을 말하며 오늘날 별장에 해당된다. 그는 집 뒤 작은 언덕에 정자(별장)를 짓고 집의 편액을 ‘독암(정)’이라고 했다.
그는 호계촌사 별장에 묻혀 살며 술(酒)과 시(詩)로 시름을 달래며 세상일을 멀리하고 유유자적한 가운데 생을 마쳤지만 그가 남긴 글(유고집)은 후세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안양 호계촌에 묻혀 조용히 살면서 자신의 애틋한 마음과 심정을 담은 주옥같은 한시를 다수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그의 생각을 담은 한시집인 독암유고(獨庵遺稿)저술을 통해 전해온다. 독암유고는 독암 조종경이 은둔하면서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를 말한다. 독암유고는 선조20년(1587) 아들 온양군수 조정추(趙廷樞)가 유고를 활자로 초간 이래 후대 후손들에 의해 3간 된다. 독암유고 속에는 당대 호계지역의 정서와 풍경, 시대상 등을 살필 수 있는 서정시들이 다수 있어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사견)
□조속(창강, 趙涑, 1595~1668)
조속(선조28~현종9)은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중기의 서화가(문인화가)이다.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의 호(號)는 창강(滄江)·창추(滄醜)이다. 본관 풍양(壤)이며, 저술로는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 병조참판에 추증된 수륜(守륜)의 셋째 아들이며 문인화가 지운(之耘)의 부친이고,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朴泰尙)의 장인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했으며 효종때 효행으로 발탁되어 진선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장령(掌令)·진선(進善)을 지낸 적이 있다. 1627년 덕산현감에 임명된 이후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른다. 창강 조속(선조28~현종9)은 사후 숙종21년(1695) 청백리에 녹권 되고 조선 인조때 장령과 이조참판(이참, 吏參)으로 추증된 인물이다.
조선 숙종 42년(1716)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이 서원을 세우고 제의를 올렸다. 창강은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의 백석사(白石祠)에 배향되었다.
경학(經學)과 문예·서화에 전념하였으며, 영모(翎毛)·매죽(梅竹)·산수(山水)를 잘 그렸는데, 특히 영모는 중국풍의 형식을 벗어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는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사군자와 수묵화조(水墨花鳥)에 능했다. 그는 공필풍(工筆風)의 ‘금궤도(金櫃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남종화풍의 깃든 ‘호촌연의도(湖村煙疑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등을 남겼고, 대표작으로는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매작도(梅鵲圖, 간송미술관소장)’, ‘흑매도(黑梅圖)’ ‘지상쌍금도(枝上雙禽圖)’등이 남아있다. 글씨로는 ‘조회양은렴비(趙淮陽恩廉碑, 扶餘)’ ‘좌찬성이계맹비(左贊成李繼孟碑,金堤)’등이 전한다. 역대 명필들의 서체에도 관심을 보여 금석문(金石文)수집 활동을 시작한 이방면의 선구자로 금석문에도 조예가 깊다. 조선 인조 때 화가인 창강 조속은 미술사학, 특히 미술사 회화사분야의 유명인사이다.
□조한구(趙漢九, 1833~1965)
조선총독부 서이면장을 지낸 조한구(고종20년~1965)는 독암 조종경의의 후손으로 창강 조속의 10대손이다. 조동순(趙東舜)의 셋째아들로 호계동(방죽말 27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행정가로 자는 장일(章日)이요 호는 금운(錦雲)이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西二面)의 초대 면장부임 이래 1927년 1월 서이면(안양면의 전신) 발전을 위해 시가지확장, 안양의 교육시책을 위해 모범사구(私塾, 사설서당, 글방)설치, 농촌진흥을 위해 양잠·축산·임업 등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보통농사를 보급하였다.
1932년 안양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고뢰 정태랑으로부터 1만평의 토지를 기부 받아 조선직물(주)를 현,대농단지에 건설하는데 앞장을 서는 등 안양의 공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안양이 삼성산과 관악산 등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점에 착안하여 1932년 삼성천변(구,고바우식당앞)에 석수동수영장(안양풀)을 설치해 우리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안양유원지(현,안양예술공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지만, 공식적인 안양유원지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해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군수 등을 설득해 삼성천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안양풀)을 조성하고 1933년 수영장을 개장한 되서 비롯되며, 안양유원지가 전국적인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단초가 된다.
안양예술공원 구,고바우식당인근 옛날 삼성천 수영장초입에는 당시 일본어로 ‘(안양 풀 pool)'이라고 세운 표지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자연석으로 된 암반의 거대한 초석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일본연호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 책임자의 이름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조한구서이면장 등 행정가들이 지역의 브랜드가치를 끌어 올리는 등 지역발전에 기여한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군포초등학교와 안양초등학교 설립에도 힘써 지역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안양금융조합장에 재직하면서 안양경제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또한 1936년 4월 1일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상도리와 영등포읍(영등포리, 당산리, 양산리)가 서울시 확장책에 의거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자 당시 영등포에 있던 시흥군 청사를 안양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시흥군청사이전군민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광복이후 시흥군 청사가 안양(현,뉴코리아호텔자리)으로 이전케 함으로서 안양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시흥군 청사가 오면서 경찰서 등 각종 행정기관이 입주하면서 안양1번가는 행정타운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현재 안양1번가에는 당시의 옛,서이면사무소가 복원되어 안양시 행정사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조한구 초대면장이 부임했던 구,서이면사무소(경기도문화재자료 100호)에는 당시 사용하던 행정소품 및 일제강점기관련 안양지역 항일운동사료, 안양지역 독립투사들의 유품,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망라하여 전시·진열되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광복직후 서이면을 우량 면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면서 황무지인 안양발전에 진력하였다. 광복 후 1948년에는 국민회시흥군지부 감찰부장과 시흥군보승회 조사부장 등을 거쳐 1949년에는 초대 안양읍장에 부임하여 격동기 안양건설을 견인하였다. 하지만 1930년 1월 28일 조선총독부 공훈자 명단에 올라가 있고 서이면이 조선총독부 산하기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일제로부터 1933년 6월 30일 한차례 더 훈장을 받아 친일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논란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의 묘지는 호계동 방죽말(일제강점기 방앗간자리 옆 큰 느티나무 부근)에 있었는데 도시화 건설로 1977 충북 음성군으로 이장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가 일제강점기인지라 친일파 논란이 다소 있지만 그는 행정가로서 안양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지역 발전을 견인한 지역의 선배이다. 친일논란은 다소 있지만 안양의 지역선배로서 안양의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라는 점에서 고려해볼 때, 그에 대한 재평가도 조심스럽게 필요해 보인다. 한편 일제강점기 뼈아픈 역사이지만 독암의 후손인 행정가로서 안양발전을 견인하며 근대 안양발전의 기틀을 다진 조한구 서이면장을 안양의 역사 속 인물로 다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
□문헌 속 호계동과 안양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고,
병신년(丙申年) 창건되었다.
△서원지(書院誌, 1799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창건: 숙종7년(1681)창건,
제향인물: 조종경, 조속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虎溪洞)의 유래는 예전에는 방축(防築)말(마을), 샛터(新基)말, 안말(內村)일대가 범(호랑이)가 많은 곳이라 하여 호계(또는 범계)라 칭한대서 유래한다. 이곳은 들판과 골짜기 야산이 있어 자연초목이 어우러져 맹수의 서식환경이 양호하여 냇가에 범(호랑이)이 많다하여 범계(또는 호계)라고 칭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 속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바, 당시 기록 속 ‘과천현 호계리’라는 공식지명이 오늘날까지 자연지명(또는 행정지명)으로 계승됨을 알 수 있고, 오늘날 ‘호계’라는 자연지명이 지역의 호랑이서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안로일당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은퇴 후 말년을 과천현 호계리 ‘호계촌사’에 거주하면서 시어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감한 조종경. 그가 남긴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호랑이가 등장한다. 안양과 관련된 지명에 호랑관련 지명이 흔한 편이지만 문헌 속에서 호랑이를 발견하고 안양에 호랑이가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어 반가웠다. 그는 36세 관직에서 파직이후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촌사(村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독암조종경(1495~1535)의 생몰연대를 감안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년 전에는 지역에 호랑이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가 많다(원어: 日出籬邊多虎跡)”는 시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호계촌사(별장) 주변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는 ‘호계동’이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당시 조종경이 거주하던 지역에 호랑이가 많았고, 또한 그가 안양지역(호계동) 거주이전부터 과천현 호계리라는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1757년이후) 등 여러 문헌에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되는 호계리이 있다’라고 기술한 문헌상 정황으로 보아 영조 1757년경에도 지역의 호랑이가 유독 많은 지역만의 특성을 감안한 ‘호계’라는 지명은 사용되었으며 또한 조종경은 자기가 세운 정자의 이름도 호계리의 이름을 차용하여 그의 사저를 ‘호계촌사’라고 부른 연유가 된 것 같다. 문헌 등 사료를 통해 볼 때 지금으로부터 약 479~519년 전인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의 생몰당시 ‘호계리’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호랑이가 지역에 많이 있었고 오늘날 ‘호계’라는 마을지명도 호랑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독암유고 옛시문 속에 반영된 당시 조선시대 ‘호계’일원의 생활상
독암 조종경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금의 안양시 호계동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며 시대상을 그려볼 수 있다. 독암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호계가(원어, 虎溪邊)에 머물며 말년의 여생을 유유자적하며 은일(隱逸)적 삶을 누렸다.
그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머문 별장인 호계촌사 앞에는 하천이 있고 뒤에 야산이 있었다. 부지에는 정자와 연못이 있었다.
한편 조종경의 증손자 조속이 저술한 ‘과천호계농장잡기(果川虎溪農庄雜記)’를 통해 호계촌사의 편린(片鱗)을 살펴볼 수 있다.
집은 서면 호계리에 있고 과천 관문에서 15~16리 떨어져 있다. 동남은 청계산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큰길에 임하여 있다. 독암정은 집 뒤 작은 언덕위에 있는데 언덕위에 서쪽으로 안양평과 금천을 경계로 바라보며 서남으로 수리산, 장항, 명악암 등지를 바라본다.
독암 조종경이 남긴 옛 시문(독암유고) 속에 등장하는 시어 속에서 당시의 생활상 및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조종경은 독암유고에서 남긴 한시 209편 중 약 40여편이 호계일원에서 은거하며 읊조린 작품이다. 조종경은 호계촌사(虎溪村舍, 시냇물이 있는 산골짜기에 지은 별장)에 은둔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읊조리며 남긴 40여편의 한시작품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 특히 그가 거주하던 당시 조선시대 과천현 호계리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의 시풍은 서정적이며 낭만적인 경향이 보이며 자신의 마음을 담아 풍류적인 시어로 노래했다. 그의 옛 시문 속에 시어로 또는 제목으로 ‘호계촌사(村舍)’, ‘호계(虎溪)’라는 자구가 흔히 등장(예시, 吾廬正住虎溪邊, 내 집은 바로 호계가에 거주하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와 연관된 연관단어(溪邊, 山亭 등)들이 많이 등장하는 특징이 있으며 호계 및 연관단어가 실린 한시는 약 40여 편에 이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안양시 호계동)’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계촌사에서 세상을 뒤로하고 풍류를 즐기며 읇조린 한시 집 ‘독암유고‘의 고찰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짚어본다. 독암은 ‘호계(현, 안양시 호계동)’를 사랑했고 이러한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한시가 ‘독암유고’집을 통해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시어 속에서 독암이 그려낸 당시 ‘호계리’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원문참조).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등에서 발췌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산촌에는 기이한 일 많도다.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다.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 계속되는 쌀 구걸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리 떨어져 있다.
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창강서원은 210평 정도에 민가가가 6호가 있었으나 관가와 거리가 멀고 또한 산속이라 도둑의 출몰이 극심했다고 한다.
▲독암유고 29쪽 중 일부(‘卽事’편, 즉사, 문득일이 생각나서)
계변인적녹초과(溪邊印迹鹿初過), 개울가 사슴 막지나가 자취 남았고
잠녀촌촌수죽롱(蠶女村村收竹籠), 마을마다 누에치는 아낙네 대바구니 들고
농부처처편춘전(農夫處處遍春田), 곳곳의 농부 봄밭을 휘 젓네
▲독암유고 30~31쪽 중
문외이심연독비(門外泥深燕獨飛), 문밖 진흙 깊어 제비 홀로 나네.
▲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
토박민빈고소전(土薄民貧古所傳), 예로부터 이 땅은 척박하고 가난한 곳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고
초황교외소인연(草荒郊外少人烟), 거친 교외 밥 짓는 집안 적도다.
미인촌맹걸미련(미忍村氓乞米連), 참지 못하는 것은 시골백성의 쌀 구걸
▲독암유고 34~35쪽 중(‘新居’, 신거, 새시골집)
석전하처차우경(石田何處借牛耕) 돌밭이라 어느 곳에서 소 빌려 밭 갈꼬?
▲독암유고 37쪽, 정거삼수 중(靜居三首, 조용히 살며)
춘심청두견(春深聽杜鵑), 봄이 깊어 두견새소리 듣네.
상지제협로(桑枝齊夾路), 뽕나무가지 좁은 길에 가지런하고
견폐소리외(犬吠疎籬外), 울타리 밖에 개 짓고
▲독암유고 38쪽 제호계신거 중(題虎溪新居, 호계의 새집에서)
계변인산어연정(谿邊人散漁烟靜),
시냇가 사람들 한가하고 고기잡이배 연기 고요하내
▲독암유고 57쪽 호계유려 중(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청계산재동근수리(淸溪山在東僅數里)청계산은 동으로 겨우 몇 리 떨어졌다.
▲독암유고 57쪽 야중풍우우서(夜中風雨偶書, 비바람치는 한밤 중 우연히 쓰다)
한계하사강명신(寒鷄何事强鳴晨), 추위에 떤 닭 새벽부터 우는 고
▲독암유고 74쪽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
청계백악개산명(淸溪白岳皆山名), 청계와 백악은 산 이름이다.
▲독암유고 75쪽 山亭日暮(산정일모, 해 저무는 정자에서)
낙일어초속속환(落日漁樵續續還), 지는 해 어부와 나무꾼 속속 돌아오네.
▲독암유고 79쪽 산촌(山村)에서
산촌기사다(山村奇事多)라, 산촌에는 기이한 일이 많다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호계서원관련 문헌자료
호계서원(창강서원) 옛 문헌을 추가적으로 발굴하여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학술연구 작업이 뒤따라야 하겠다. 안양문화원간행(2012년 12월 발간) ‘안양문화 11호(53~66쪽 참조)’를 열람하면 번역되지 않은 ‘창강서원중수통문(滄江書院重修通文)’, ‘상량문(上樑文)’등 많은 미번역 문헌자료들이 있다. 조종경이 남긴 ‘독암유고’ 옛시문도 다수 번역되지 않아 누군가 전문가의 손길로 한시 번역을 기다리고 있다. ‘독암유고’와 ‘호계(창강)서원’관련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논의기구가 있으면 좋겠다.
□호랑이와 안양(권)
△안양지역 관악산과 삼성산 및 호계동에는 호랑이가 있었다
삼성산이 감싸고 있는 안양과 시흥 등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흔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산과 연결된 관악산의 남태령쪽에도 험준한 고개에 호랑이의 잦은 출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양시 관양동 수촌마을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안양 및 안양 권에는 호랑이(범)와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이 남아 있고 호환을 방지하고자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도당제 제례의식이 아직까지 계승되어 내려오는 정황 등으로 볼 때 안양지역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독암유고의 옛시문 속에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자취 많다(원문,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안양지역에는 호랑이가 여간 많았음을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랑이(虎患)와 관련된 민속신앙 – 수촌마을 도당제
관양1동 수촌마을에서는 도당제(都堂祭)가 매년 추수 후 늦가을 관양동 현대아파트 뒤 관악산중턱 제당에서 열린다.
도당은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공간으로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얀 제례의복을 갖춰 입은 제관은 단앞에 자리를 깔고 산위 웃당(당집)과 제단석이 있는 아랫당 두 곳의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마을 앞 당나무(성황나무, 신목)인 느티나무(수령 540년, 보호수)에서 제사를 지내 모두 3당에서 마을제사를 지낸다. 도당제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도당제은 호환(虎患)을 방지하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례의식으로, 도당은 마을사람을 수호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관장하면서 마을의 대동단결을 돕는 존재로 여겨진다.
△범고개이야기 전설
범고개는 박달2동에서 시흥시 목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예전에는 고개가 험하고 으슥하여 강도나 도둑들이 득실거려 ‘도둑놈 고개’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고개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조선조 중엽 범고개 마을의 윤씨성을 가진 한 부자의 시종(하인)을 호랑이가 물고 고개를 넘어 간데서 전래됐다는 설과 고개 중턱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고개 길을 보고 있는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고갯길이 험하고 나무가 울창해서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해서, 고개를 넘어가려면 어른 5명 이상이 모여야 지나갔습니다.
이 고개는 1976년 안양에서 수원, 인천 간 도로 포장공사 때 아스팔트가 깔렸으며, 1991년에 박달로 확장공사로 4차선이 되었습니다.
△남태령과 호랑이
남태령은 서울에서 경기도 과천으로 넘어 가는 고개 길이다.옛날 관악산 호랑이가 나오는 고갯길로 유명한 곳. 옛날 한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여서 넘었다는 험한 고갯길이다
(출처: blog.naver.com/55072381/22000668619)
남태령 호랑이의 전설(동네방네이야기)
불과 수 십년 전만해도 남태령 고개는 비포장도로에 차들도 많지 않던 시절...
그 이전부터 동네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있으니 남태령 호랑이에 관한 전설이다.
호랑이는 민첩하기로 유명하고 몇 미터씩 뛰어넘는 재주가 있으며 주로 밤에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란다. 남태령 인근에는 범바위, 호랑이굴(관악산쪽) 등 호랑이에 대한 이름이 유독 많았었는데 그 흔적은 호랑이의 배설물과 발자국으로 짐작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눈이 오는 겨울철에 남태령 고개 주변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많이 발견되었었다. 호랑이의 발자국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난히 크다.
옛날에 사냥꾼이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 산길을 따라 올라가게 되었는데 한쪽은 관악산과 이어져 있고, 또 한쪽은 우면산을 지나 청계산에 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참을 따라가 보면 발자국이 끊겨져 있어서 허당을 치기 일수 였다. 생각해 보건데 멀리 넓이뛰기를 하거나 뒷걸음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무꾼이 간혹 깊은 산속에서 나무하다가 호랑이를 목격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관악산 쪽에서 암놈이 서식하고, 청계산에서 숫놈이 서식하여 남태령에서 조우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호랑이가 급격한 산업화로 차량이 많아지고 포장도로가 생기고 군부대의 철책이 들어서는 등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동통로가 막히는 바람에 호랑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야생동물들이 멸종해 가고 말았다. 남태령 고개 도로 근방은 과거 야생동물의 시체가 엄청 많았었지만 이마저도 요즘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출처: blog.daum.net/lineme/10596936 남태령 전원농장 블로그 내 검색
농부의 지혜 2007.02.05 23:32
△지명 속에서 호랑이 관련성을 보이는 지명
▲안양시 - 호계동(虎溪洞), 범계동(평촌),
호현(虎現)마을 및 범고개(박달2동), 호암초교
▲금천구(시흥동) - 호암산(湖巖山), 호압사(虎壓寺), 호암로
호암산성(虎巖山城, 사적 제343호, 통일신라6~7세기, 문무왕 12년경 추정)
범계는 호계(虎溪)의 호(虎,호랑이)를 순 한글 말로 표기한 것이고 계(溪.골짜기)는 골짜기를 의미하므로 호랑이가 많은 골짜기를 ‘범계’로 풀이할 수 있다.
△문헌(독암유고) 속 등장하는 호랑이
조종경의 독암유고 34쪽 ‘촌사즉사(村舍卽事)’편에는 “이곳에는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원어: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
△문헌 속 등장하는 호계리지명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 되는 호계리에 있다.
△서원지(書院誌, 1799년)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0리에 있다.
△과천현읍지(果川縣邑誌, 1899)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 되는 호계리에 있다.
△경기도서원총람(2007, 백남욱 등)
위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171번지일대
□안양시 호계동의 지명유래(자료제공 안양시)
△호계 1동- 덕고개(德峴), 덕현마을
군포신사거리에서 과천방면 약 400미터지점 흥안주유소 일원으로 예전에는 큰 고개가 있어 이 일대를 덕고개(德峴)라 불렀다. 오늘날 주변에 덕현초등학교가 있는데, 이는 덕고개(덕현)에서 따온 학교이름이다. 이 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라 현,호계시장 북쪽 100미터지점에 방풍림을 조성하여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 데, 지금도 이 지역 자연마을 지명을‘수풀아래’라 부르는 연유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2일 마을의 중앙에 있던 우물에서 정제(德峴井祭, 덕고개우물제, 마을제, 민속신앙)를 지내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대한그리스인회보’에 다르면 허대진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양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로 추정된다.
△호계 2동- 방축말(방죽마을, 房築洞)
방축말은 안말과 새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 과천군 하서면의 관가가 있었고 그후 1914~1917까지 시흥군서이면사무소가 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조선시대 물 피해를 막기 위하여 둑(제방)을 쌓았는데, 그 주변이 취락지이므로 방축말(제방이 있던 마을)이라 부른 연유가 되었다. 숙종때 발간된 이천읍지(異川邑誌) 제언조(堤堰條)에 호계제언재현서남문18리(虎界堤堰在縣西南門十八里)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지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연대는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고, 광무 3년(1899)에 발간된<<異川邑誌>> 제언조(堤壙條)에 호게리경자제언일고재현서남간18리(虎溪里競子堤堰一庫在縣西南間十八里)라하여 방죽은 호계에서 호계리경자로 되었고, 이어 일제 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다가 1974년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으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고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 길일을 택해 방축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군웅제(群雄祭)’를 지내오다가, 1970년대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효성안양공장외곽 도로(호계도서관 방면)에 도로명으로 ‘방죽로’, ‘방축사거리’가 있는데 이는 자연마을지명인 방축말(방축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 안양의문화재, 자료제공 안양시, 참고:안양시지 )
△호계 3동- 포도원
구,군포 동쪽으로 의왕시 오전 동 성나자로 마을과 경계에 있다. 이곳은 1950년대에 이르러 ‘경향포도협동조합’이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자 주변일대가 포도단지로 변모되어 한때 안양포도산업을 선도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도시화 바람이 불어 주택지로 변모했다.
□타도시 시·군·구 서원 육성 사례분석(인터넷검색 등 인용)
△호계서원(虎溪書院), 경북 안동시소재
조선 선조 6년(1573)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다가 광해군 12년(1620)에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2분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되었다. 숙종 2년(1676)에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졌다가 7년 뒤에 강당만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3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평면상으로는 一자집인데, 지붕의 양쪽 끝이 정면을 보고 있는 ㄷ자형의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은 방이다. 해마다 1번씩의 당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현재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각각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 칭 호계서원 (虎溪書院)
경상북도유형문화재제35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73.08.3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84-3번지 , 84-4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호계서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문화예술과 054-840-5230
자료제공 문화재청
△도봉서원(道峯書院)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서원.
도봉서원터는 서울(도봉구 도봉동)에 위치한 유일한 서원으로 꼽힌다. 도봉서원터는 1573년에 창건, 조광조의 위패를 모셨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도봉서원의 모습은 등산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도봉산 등산로 계곡 한편에 사당만 남아 있다. 건국대박물관 소장, 도봉서원도 그림을 통하여 창건초기의 도봉서원 모습을 알 수 있다.
1573년(선조6)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동시에 ‘道峯(도봉)’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송시열은 1723년(경종3) 중앙의 정치세력 변화로 출향(黜享)되었다가 1775년(영조51)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배향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8)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이 설치되어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오다가 6·25사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유도문(由道門)이라 편액된 신문(神門), 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등이 있다. 사우의 오른쪽에는 조광조의 위패가,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700여평 등이 있다.
[네이버지식백과] 도봉서원 [道峯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 전기
성격 교육기관, 서원
건립시기·연도 1573년(선조 6)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282-329
자료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고서원(臨皐書院), 경북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3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据) 등의 사람들이 칭송하여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하여 재사액(再賜額) 받았으며, 인조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封)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에 서원철 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封)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 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齎), 서재는 함육재(涵育齎),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및 경외에는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출처: 포털 바로가기 임고서원 http://imgo.yc.go.kr)
△물계서원(勿溪書院), 경북 창녕군 소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었던 서원.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 성삼문, 성담수, 성수침, 성운, 성제원, 성혼, 성윤해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2년(숙종 38)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성송국(成松國)·성삼문(成三問)·성담수(成聃壽)·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성혼(成渾)·성윤해(成允諧)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여환(成汝完)·성희(成熺)·성수경(成守慶)·성문준(成文濬)·성람(成灠)·성여신(成汝信) 등을 추가 배향하고 1814년(순조 14) 성안의(成安義), 1857년(철종 8) 성준득(成準得)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95년에 복원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형 유적
시대 조선/조선 후기
성격 서원
건립시기·연도 1712년(숙종 38)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정의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었던 서원.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물계서원 [勿溪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출처: 디지털광명문화대전
[정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조선후기 서원 터.
[개설]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에 역대 명현을 모시고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함께 지닌 지방의 사설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는 전학 후묘의 배치를 지니고 있으며, 인재 양성과 유교적 향촌질서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원은 붕당의 정치적 이해를 지닌 역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1865년(고종2)부터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의미에서 서원의 강제 철폐령을 내렸고, 이에 47개의 대표적인 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충현서원 역시 이 시기에 함께 철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오리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퇴해 살면서, 처음에는 이곳 금천현의 촌로들과 상의하여 강감찬과 서견을 기리는 이현사(二賢祠)를 세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1658년(효종 9)에 이 고장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면서 이원익도 함께 배향하여, 삼현사(三賢祠)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1676년(숙종2) 왕이 사액(賜額)을 하였다 이후 정조 때 사액서원으로 충현서원이 건립되었고, 1856년(철종7)에 개축되었다. 현재 서원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 일부만 남아 있다. 충현서원이 위치했던 지역은 이원익의 구택이 있던 곳으로, 서원 터 아래에는 ‘탄금암(彈琴岩)’이라는 글씨가 있는 바위가 있으며, 이전에는 관감정(觀感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황]
현재 민가 형식으로 지어놓은 기와집 건물 바깥채에는 관감당(觀感堂)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다. 관감당 뒤편에는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세기경에 건립되었다는 오리영우(梧里影宇) 1동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이다. 서원 터에는 예전에 강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와 함께 초석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으며, 후손들이 복원 사업을 하면서 위쪽으로 삼상대(三相臺)와 풍욕대(風浴臺)를 건립하였다. 충현서원지는 1985년 6월 28일에 경기도기념물(제8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왔으나, 2010년 경기도기념물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오리 이원익을 배향했던 서원지이다. 주변에는 이원익의 유품과 정신을 기리는 전시관이 함께 있어 이원익의 숭고한 정신과 사상을 잘 간직한 장소라 할 수 있다.
문화재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80호
문화재 지정일 1985년 7월 29일
소재지 주소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84 [오리로347번길 5-6]
이칭/별칭 삼현사(三賢祠),충현사(忠賢祠)
유형 유적/터(지정면적 450㎡)
시대 조선/조선 후기
건물 건립시기/일시 1658년
소유자 충현문화재단
집필자 김지석 안양시문화재전문위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양시)호계서원지 이미지사진, 사진제공(자료제공): 안양시
선현의 배향과 교육을 담당하던 호계서원의 터전은 호계동 ㈜효성안양공장 뒷산에 있는 호계근린공원 매봉광장 아래쪽 고가도로 하부지역이다. 구,신진자동차학원 동향 1백여 미터 지점에 자리했던 안양지역 유일한 서원인 호계서원은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생기면서 공사로 인한 추가적인 멸실로 서원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 사정이다. (소재 :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산43번지)
□호계서원관련 각계의 의견(결론)
△최갑환(崔甲煥, 2014년 94세)옹- 지역원로(안양원로회 회원)
안양시 호계동 방죽마을에 거주하면서 호계서원 주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최갑환원로는 “호계서원터에 안양교육의 발상지로서 상징을 담은 표석(팻말)이라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에 널린 와편과 주춧돌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매우 안타깝다고 토로하면서, 호계서원터에 넓은 공간과 밤나무 5~6그루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석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수일제연구소장)
(문학박사, 다음카페 ‘수일제’ 운영자)
퇴색되는 도덕과 숭조사상(崇祖思想)을 가르치는 안양유교문화교육의 장이 필요하다. 체계적 사료의 정리와 함께 안양유일의 서원인 호계서원을 옛터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올곧은 선비의 정신 및 유교사상을 계승 및 육성하는 요람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
호계서원지에 담긴 일화를 구술할 수 있는 세대가 하나 둘씩 떠나감으로서 그 문화적, 역사적 발자취도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 최소한 서원지를 알 수 있는 표지석(表石)과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표석과 안내판이라도 최소한 설치하고 향토문화자원 컨텐츠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관련 사료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이 필요하고, 노출된 자료 중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사료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사료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점 있다. 안양 유일의 서원지에 있었던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오늘날 혼탁한 시대에 있어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며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성현 안양시문화유산해설사(김중업박물관 뮤지엄패밀리)
서원은 명현의 제사와 교육기능을 지닌 지방사립교육기관이다.
독암 조종경과 창강 조속을 배향했던 호계서원(또는 창강서원)은 안양지역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말년 안양에 살았던 독암 조종경은 ‘호계’와 관련된 글을 다수 남긴 분으로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지금의 안양시 호계동)’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분이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과 관련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점 여간 아쉽고 유감이다. 학문을 강론하던 건물이 사라지면서 지역에 호계서원의 실존을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와편과 주춧돌 등 서원유적 관련 유구가 발굴 조사되긴 했지만, 이후 아무런 후속대책 없이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경에 있던 서원이지만 체계적인 자료정리와 연 구성과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아쉽다. 호계서원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이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논의기구인 ‘(가칭)호계서원 연구위원회’를 발족하여 창강(호계)서원관련 옛 문헌자료를 추가적으로 발굴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한시번역 등)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연구위원회 설립이 어렵다면 안양향토문화연구소, 안양학연구소 등 지역사회 연구단체에서 이 분야에 대한 추가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안동에 있는 한자동명의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비롯하여 다수의 지방서원이 향토관광자원 및 시민 유교교육의 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부 시군구에는 폐서원지에 버젓한 서원을 복원하여 시민교육 및 역사관광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안양의 호계서원은 초라한 수준이다. 선비의 정신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호계서원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안양시청 홈피 등에 호계서원의 발자취를 게재하여 시민들과 더불어 함께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안양의 호계서원 관련 추가적인 연구 성과 결과물을 도출해야 한다. 한편 호계근린공원과 연계 창강서원지(호계서원지)를 지역의 사랑받는 유적지(또는 문화공간)로 가꿀 필요가 있다. 향후 기회가 되면 서울특별시 도봉서원 복원사례(1972 복원) 등 타시군구의 서원복원사례를 벤치마킹하고 민관이 함께하는 ‘(가칭)호계서원 재건위원회’기구를 발족하여 안양의 잊혀진 서원교육의 역사복원을 추진하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고려해 볼 수 있다. 호계서원에 대한 관심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이며 발전방안에 대한 지역사회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참고문헌
1.안양문화(安養文化) 통권 제11호 2012년 12월
안양문화원발행(편집위원장 김정석)
2. 안양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1.08.25.인쇄 안양시, 단국대매장문화재연구소
3. 안양문화사랑, 안양문화원 (199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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