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공지]안양탐사대 180차 탐방(20200523)_안양3동 양지마을과 대농단지

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안양탐사대 180차 여정_골목이 남아있는 안양3동 양지마을과 안양공고 주변

5월 23일(토) 오후 3시/ 집결_안양3동 주민자치센터 앞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20년 전반기 탐사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2020년도에는 재개발로 안양에서 하나 둘 사라지는 동네와 도심 골목 탐사를 통해 삶의 흔적들과 사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할까 합니다.


안양탐사대가 2020년5월 22일 180차 여정으로 찾아갈 곳은 안양3동 양짓말(양지마을)로 대농단지 동네입니다. 안양3동 양지마을은 탐사대가 2013년 3월 2일(5차) 이후 여러차례에 찾아가 당시 풍경을 기록으로 전하기도 했는데  안양의 동네와 골목이 재건축,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옛 골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지요.
이곳은 개개발이 추진되지는 않지만 도시생활형 원룸주택들이 글목마다 들어서면서 모습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이날 탐방에서는 그동안 알마나 변했는지  안양3동 주민자치센터 앞애서 출발해 연성대학교와 안양예고, 안양외고, 안양공고 주변 , 안양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 동네. 우성아파트 뒷길, 요즈음 뜨는 댕리단길(대농단지) 까지 골목 골목을 들어볼 에정입니다.

 

 

■양지마을(양짓말) 이야기

 

양짓말은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예로 부터 '양짓말'로 불리우다 행정명칭인 양지동(陽地洞)으로 지금은 안양3동이라 불리우지요.
안양시사 등 기록을 보면 이 마을에는 조선조 제 2대 정종의 7남인 수도군(守道君)의 증손 이공(지제부수) 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이래 원주 원씨 등이 세거했답니다. 마을 명칭 에 대하여 양지(陽地), (陽智), (陽知), (陽至)등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양지동(陽地洞)이라고 표기함이 옳다는군요.
이곳은 1928년에 지금의 안양3동 부근에 안양산업사(安養産業社)란 안양 최초의 공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직전 일제강점기에는 아사히학교가 설립 되었고, 광복 직후에는 안양중학교(1948), 안양공고(1949)를 개교해 산업 역군을 배출하던 학교를 유명세를 날렸으며 이후 안양서초, 안양예고, 안양여상, 안양외고, 연성대학교 등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들어서 안양에서 학교들이 가장 많이 운집한 지역으로 안양교육의 요람지라 할 수 있지요.
양지동은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 김대규(金大圭1942-2018)의 출생지이며, 방송작가 이서구(李瑞求1899-1981),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4-1950), 시인.평론가 정귀영(鄭貴永 1917- ), 시인 성기조(1934- )등 문인들이 살며 문학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특히 1938년 <조선일보>에 '탁류'를 연재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풍류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전북 군산의 대표적 작가인 채만식이 1940년 이곳으로 이사와 살다가 1941년까지 살았는데 당시 이곳에서 살던 얘기를 쓴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가 매일신보에 발표되기도 했지요.
현 안양과학대학 자리에는 절이 있었으나 빈대를 잡으려고 붙인 불이 원인이 되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928년에는 엄기승이 안양3동사무소 부근에 안양 최초의 회사인 안양산업사를, 현 대농단지에는 1932년에는 조선직물이 들어섰고 광복이 되자 그 자리에 금성방직이 설립되었는데, 조선직물은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던 곳으로 해방직전인 1944년에 군수공장으로 운영되어 프로펠러 전투기 생산에 나섰다가 조립과정에서 폐망하며 문을 닫습니다.
수암천 건너편의 현 성원아파트 자리는 일제 때 일본인이 내하목제회사를 운영하다가 해방 후 삼영하드보드회사로 바뀌어 건축자재를 생산하던 곳으로 당시 수암천물은 펄프찌거기가 쌓여 주민들이 이를 말려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여.
안양은 예전에 안양포도로 유명했는데 그 이전에는 밤나무가 참 많았다고 합니다. 안양예고 자리는 노적봉이라 불리우던 산이었는데 1932년 조선일보신문에 전국 부녀자 밤줍기대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답니다.

 

■대농단지 이야기

 

대농단지는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조선견직이 들어섰던 대규모 공장이었지요. 이 곳에는 1938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화신백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이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만주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징용자들이 차출되었다고 합니다.
1945년 5월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 중에 있었고 평촌 달안동에는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드러나는 등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로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아마도 안양은 일제의 전투기지가 됐을 것입니다.
해방이후 이 부지는 1948년 10월 5일 안양1동에 금성방직을 설립한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성곤 씨가 인수해 1949년 3월 10일 섬유 공장을 준공합니다.
1960년대 사진을 보면 안양역에서 금성방직 안양공장안까지 철길이 있어 화물열차가 들어올 정도로 그 규모가 컸으며, 담장 둘레만 십리라고들 했습니다.
또 공장안에는 천연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있었지요. 1960년대 당시에는 잔디구장이 전국에 3개 밖에 없었는데 한국 국가대표팀이던 양지선수단을 비롯 공군사관학교 축구부, 실업팀 등이 이곳에 와서 연습경기를 했답니다. 당시 만안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시멘트블록 담장 중간 중간에 난 구멍으로 이회택 등 국가대표선수의 볼 차는 모습을 보며 축구의 열정을 불태운 덕에 안양중,안양공고가 전국 축구를 재패하던 것도 이 무렵이고 이는 축구하면 안양을 떠올리던 부흥기였지요.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게 된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이는 금성방직의 시초이다.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성곤은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도 인수하여 공장 확대에 나서는데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을 겪자 금성방직이 인수하지요.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당시 3천여명의 여성근로자들이 근무해 월급날에는 안양 일번가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상경한 여성 근로자들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올라오는 배경으로 인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아닐가 싶습니다.
금성방직은 1967년 10월 안양 1동에 자리한 태평방직(현 레미안 아파트)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1977년 일반에 640여개의 단독필지로 분양된 안양 최초의 대규모 주택단지로 대농단지로 불리워 오고 있는데 농사를 짓던 평촌벌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까지 안양에서 주택가격이 가장 비쌌던 주택가였지요.

 

■안양3동 출신 시인 文鄕 김대규

 

김대규 시인은 1942년 4월 20일 안양시 양지동 946번지에서 태어나 2018년 3월 24일 타계하여 26일 화장을 통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시흥시 논곡동 선영에 묻히기 전까지 살아 생전 70여 평생을 태어나신 곳 안양 양지마을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아왔다.

시인의 아호인 “文鄕(문향)”은 삶과 문학의 고향인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학과 고향을 사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하면 ‘김대규 시인’을 말하고, 김대규 시인하면 ‘안양’을 생각나게 할 만큼 文鄕 김대규 시인은 詩와 함께 안양사랑의 한길을 평생 걸어왔다.

김대규 시인은 1960년 첫 시집인 「靈의 流刑」을 상재하여 등단했으며, 1976년에 저술한 「흙의 사상」과 1985년에 발간한 「흙의 시법」을 통해 많은 독자들로부터 “흙의 시인” 이라 불리웠다.

1977년 평생의 스승이신 고 조병화 시인과 함께 출간한 「시인의 편지」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간 진솔한 편지글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으며, 1989년 한겨레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사랑의 팡세」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한 유명세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중앙문단의 다양한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안양에 남아 여러 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안양지역 문학 역량들을 모아 안양문인협회와 안양문화원, 안양예총 창립을 주도 하는 등 후진양성과 안양지역 문학의 토대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뿐만 아니라 안양지역 문화예술 발전과 언론, 상공기업 시정발전 등 다양한 부문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등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김대규 시인이 고향인 안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문안 작품들은 안양시 곳곳에 퍼져 있다. 먼저 안양시청에 설치된 “안양시민헌장비”를 비롯 안양5동 현충탑에 새겨진 “현충탑 진혼시”, 자유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독립유공자 기념탑 헌시”, 평촌도서관 옆 공원에 설치된 “6·25 참전공적비 헌시“, 석수동 ”만안각기“, 안양예술공원 ”안양정기“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품들이 있다.

또 ”안양시민의 노래“와 ”안양시 로고송“ 그리고 애향 동요인 ”여기가 안양이다“와 ”새처럼 별처럼“을 작사했으며 호성초를 비롯 안양시 초, 중, 고, 대학 등의 교가는 물론, 캐피코(주)를 비롯한 안양시의 대표적인 기업들의 사가(社歌)들도 작사했다. 또 김대규 시인의 대표시인 ”엽서“, ”가을의 노래“, ”사랑 잠언“등 다수의 작품들은 노래로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 보기: https://anyangbank.tistory.com/3829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삼덕제지 이야기

 

양지마을 옆에 있는 삼덕공원에 자리했던 삼덕제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삼덕제지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인 1941년 일본인 고토우가 설립한 삼왕제지가 있었는데 일반 종이류의 제조 및 가공 판매, 제지업 관련 투자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자본금은 49만 원이었으며 최초 12만2500원이 불입되었는데 모조지 생산에 주력했답니다.
경영진은 사장 이하 4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삼왕제지의 설립 후 일제 패전 시까지의 경영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내용을 잘 알기 어렵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이 떠나고 삼왕제지는 귀속기업체로 미군정에 접수되었고,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되었다가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관리인이었던 조경묵(曺庚黙)에게 174만 환에 불하되지요.(안양시 연표에는 1945년 11월 25일 설립. 좀 더 확인해야 할 사안 )
조경묵은 회사명(社名)을 삼덕제지(三德製紙)로 바꾸고, 운크라(UNKRA) 원조자금을 받아 시설을 개선하여 모조지와 선화지를 생산하는 등 본격적인 경영을 시작하였으나 회사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고, 1950년대 말에는 경영난에 직면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1961년 조경묵은 개성 출신의 전재준(全在俊)에게 경영권을 넘겨 이후 2003년 삼정펄프주식회사에 흡수·합병될 때까지 경영을 지속하였는데 삼덕제지는 신문지와 함께 국내 제지업계의 양대 축이었던 백상지(모조지) 생산 분야의 선두기업으로 자리잡지요.
삼덕제지에서는 공장 수암천으로 종이슬러지가 흘러나왔고, 갈수기에는 삼덕제지 아래쪽 하천이 이 슬러지로 뒤덮일 지경으로 오염되기도 하였으나, 모든 물자가 귀하던 1960년 이전에는 인근주민들이 이 슬러지로 땔감으로 쓰기도 했는데 병목안 철길과 천변 뚝방은 물론 인근 집등 마당에는 슬로지를 말리는 풍경이 펼쳐졌지요.
삼덕제지는 2003년 7월 폐업합니다. 기업주인 전재준 회장은 11월 3일 공장부지를 공원으로 만들 것을 조건으로로 안양시에 기부하였는데 일방적인 굴뚝 철거와 지하주차장 조성 등으로 시와 기증자간에갈등을 빚기도 하다가 2007년 7월18일 공원 조성 공사를 착공해 2008년 11월에 삼덕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역사를 남긴 공원이 만들어지지요.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