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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의 근원지와 시 명칭의 유래(2020.05.09)

안양똑딱이 2020. 5. 9. 01:32

 

안양의 근원지와 시 명칭의 유래

제l절 안빨! 근원지
l. 안양의 근원지에 대한 제셜
안양(安養)의 근원지(根願地)에 대하여는 이승언(李承彦)이 『안양문화a 저13후 「맹 정구역변전사」에서 처음으로 언급했으며 이어 동 저114호 「안양의 유래」와 동 제5호 「안양시 지명유래」에서 각종 문헌과 증언을 토대로 소상히 밝힌 바 있는데 동 논문에 따르면 안양시의 31개 행정동 중 석수123동과 박달1 2동은 금전현(衿川縣 -> 시홍현 -> 시흥군)지역이었으며 그 외 전 지역은 과전현(果川縣 -> 과천군-> 지역D,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발간된 각종 자료가 대부분 안양의 근원지는 금천현이었고 금천현의 중심지는 안양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여러한 오류는 안양와 역사가 일전하기 때문에 향토사에 대한 연구가 없어 어느 한 책자가 그 사실을 기록하면 그 내용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전재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열거한 자료들은 안양의 근원지가 금천현(衿川縣 -> 시흥현)이라고 기술된 논저(論著)안데 금천현은 고구려 때(475) 잉벌노현(仍t.k:ft總) 신라때(757) 곡양현(鍵縣) 고려 때(940) 금주(금川 금천)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정조 19년(1795)까지 금천현(衿川縣)이었고 1795년 부터 시홍현(始興縣) 1895년에 이르러 시흥군(始興都)으로 개칭되었다
• 내고장 전통가꾸기(안양시 1981 2쪽)
934년(고려 태조) 챔川로 개칭되면서 챔川縣으로 청함 1895년(고종 32년) 챔川那에 속하였음
• 겸기도사(京鐵휠史).1 Q) (경기도 1979 1268쪽)
시홍군이란 명칭은 『東與J r與固』에 보여지 않는다 이 명청은 현재의 안양시를 중심으로 한 앨대거 챔川야었고 • Iì시흩의 전통문화;n (시흥군 1983) 『경기도사』의 내용과 강음 톨 『효벅지^I(韓固地誌)(지방펀).1 (국립지리원 1982 574 ,.._, 575쪽) 고려시대 • 대조 23년(940) 금주(함川 또는 웹nD로 고치고 별정 해~~이라함 • r^1방행정지명사(행方行政地名史}.Jl (내무부 1982 188쪽)
저'1장 • 26
안양은 고구려 시대어l 仍比쨌縣에 속했다가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17년(934)에 햄}II로
• fJI호풍물자리지(짧뺑風物빼理志).1 (경민일보 1983 12 13) 야지역 죄고의 기록은 고구려 시대의 仍ft姬縣에 속해 있었다 고려 태조 17년(934)때는 함川이라 칭했다 • r안양문화(安養文化).1 (안양문화원. 1982 25쪽) 오늘의 금천{챔JlI) 시흥군(始興那)엘대는 원래 금전(챔JlI) 안산(安山) 과전(果 JII)의 3군ól 청렴되어 있었는데 얀양을 중심으로 한 얼대가 챔川야였다 • f'ÁI정안내(市政案內).1 (만양시 1981 15쪽) • 고구려 영별노환에 속함 • 757(신라 경덕왕) 곡%판 고져 율진군의 영현야 되었음 • 934(고려 태조) 금주로 개갱되면서 금전으로 장함 • r서울시 위성도시 개발에 관한 연구 , 안양시를 중심으로J (金東찮 학위논문 1976 54쪽) • 고구려 본군은 웬래 쫓鬼과 安山 맞 果川의 삼군이 갱렵하였음 • 742-764 곡양현요로 율진군에 영속시컴 • 940 全川로 개칭 • r경기연감(京鍵年鍵).1 (경민일보사 1985 430쪽) 안양의 연혁을 찰펴보면 고구려 시대에는 仍t\:;빠縣에 속했다가 서기 757년 (신라) 곡양으로 고쳐 934년(고려 태조) 챔까를 개칭되면서 챔川으로 불리다가 • r안양지역의 산업폐가물처리 및활용방안메 대한 연구'J (앉양상의 1982 15쪽) 고구려 시대에는 앙벨노현에 속했다가 서기 757년 곡양 934(고려 태조) 챔川로 개칭되연서 챔JII으로 청하다가 1879년 또다시 챔川縣으로 개청했다가 1895년 션川휩ß에 속했다가 • r자랑스런 내고장J (경기도 교육위원회 1985 89쪽) 고려 대조 때에 금주로 고져 부르면서 금천으로 불라워졌고 고종 16년 (1879)에 금전현으로 바뀌고 고종 32년(1895)에 금천군에 속했다가 • r신풍토가(新風土記)J (효말일보 1982 7 30) 고구려 때엔 잉밸노현 산라 때엔 곡양 고려 초가엔 함)(1
처”절 • 27
• r써l계백과대사전(世界百科大事典}J (@ (서문당 1975 118쪽) 본래 챔川 安山 果川의 3군여 합군된 것으후 • r행정구역연혁 및 지방관란사려L. (내무부 1987 122쪽) • 삼국시 대 仍t.k:때縣(고구려) • 통일신라시대 흉렀塞〔경덕왕 16년(757) ) • 교려시대 ftJII(태조 17년(934)) - 樹시| • 조선시대 쯤果縣〔태종 14년(1414)) - 쯤陽縣 - 함川縣 • 1914년 始與휩ßf암’11面 • i'안앙시 통계연보.J (안양시 1988 38쪽) • 꼬구려 仍~!lX縣어| 츄함 • 934년 (고려 태조) 해) 11로 개칭확면서 천川으로 갱함 • 1879년 (이조 고종 16년) 함J Illrf으로 징함 • 1895년 (이조 고종 32년) 참川돼얘 속하였융 • 1914 3 함山 강山 始興 3군。l 始與없으로 개갱 • 1914 3 1 빡川01 西二많으로 개갱
이상 열거한 논저 이외에도 안양의 연혁은 거의가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가지 부언할 것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술펀 자호i가 없다는 것여다 ‘ 한 지방의 연혁이 이령게 다를 수가 있 단 발언가 연대와 지명표기는 말할 것 도 없고 요J}(誤字)를 오자인 줄도 모르 고 계속해서 사용하는 웃지 못할 사례까 ι 지 있다 (예 꺾JlI • 쯤山 함JII • 쯤J 11) 대동여지도외 과전의 위지 다음에 열거한 자료들은 안양의 근원지가 과천렐(果川縣 • 과천군)이라고 기술된 논져들언더l 파천은 고구려 때 (475) 율목군(寒木짧) 신라 때 (757) 율진군(뽑轉ß) 고려 때(940) 과주(果셔1) 조선 태종13년(1413) 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과천현 (果JJI縣)야었고 1895년 부터 과천군(果JII那)으로 개칭되었다
• r안양읍 통계연보(安養둠 統計年讀).1 (안양읍 1963 9쪽)
Jtll ,장 • 28
본 안양읍은 원래 과천군에 속하였으나 서기 1914년 2월 10일 군 겨l향으로 • r경기도사(京聽훌史)J(Î) (경기도 1982 386쪽) 과천군의 내력을 고찰혜 보면 %L국시대에는 棄林 등£로 불리웠으나 고종 32 년(1895)에 과천군야 되였는 바 치역은 현내면 남면 안양 등이었다고 하며 • r지명유래집(地名由來集).1 (경기도 1987 81쪽) 안양서는 고구려 시대에는 융목군(뽕木那) 신라시대(757)는 율진군(菜별웹) 고려시대(940)에는 과주꾼(果)11那) 조선 태종 13년(1413)에 과전현{果111縣) 톨 『안양시통계연감(安養市純計年讀).1 (안양시 1995 28 ,.._. 29쪽) •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년) 果木那에 속함 (박탈동 석수동은 쐐械쁨에 속함) •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票{활휩ß(좋렀뚫n) • 940년(고려 대조 23년) 果川(함)I[縣) • 991년(고려 성종 9년) 좁林 또는 富安(果)11의 별호롤 좁林 또는 숨安으루 정하다 ) • 1413년 (조선 태종 13년) 果川縣(챔川縣)
。l상과 갇이 안양의 근원지가 금천{챔}l1)과 파전(폈)11 )의 두 칼리l로 혼란을 볼러 일오키고 았는데 그 원언은 첫째 한 행정구역(시홍군)내에 안양려란 행정지명。l 둘 이나 였였고 풀째는 금전현 안양리(현 얀양시 석수동으로 시흥군 통면 안양랴였다 가 1963년에 안양읍 선안양리로 개칭)와 과천현 안양려(현 안양시 안양동)가 삼성천 을 경계로 서로 접경자대에 위치해 있였오며 셋째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지리지 읍 지 등의 옛 문헌이 양현(금천 과전)의 안양리(安養里)가 안양리(安陽里) 안양리(安 養里)로 기술되어 았역 더욱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넷째는 전술한 바와 같。l 향토샤 (안양사)에 대한 전문척이고 처l계척인 연구가 전혀 없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2 안양의근원지
안양의 큰원지 즉 뿌리를 밥히려면 무엇보다 금전 안양리와 과전 안양랴에 관한 옛 기록들을 살펴 보아야 동F는데 주지동}는 바와 갇이 안양0] 삼국시대 이푸 고려 조 선을 거치는 동안 독렴된 지방행정(府 救 용ß 縣)야 아닌 소읍(小련)에 불과란 관계로 이렇다할 분헌이냐 지도 등이 없었기 때문에 양현의 읍져나 지려지 등을 흉한 사실
차'1정 • 2(/
규명이 산행해야 할 것으후 생각된다 과천현 안양리에 관한 가록은 영조조의 『여지도서』 이래 조선 말기에 발간된 읍지 나 지려지 중 1871년에 편찬되어 일채강점기 때 별사한 『과천읍지J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와 『호구총수J(규장각 소장) 등 불과 몇몇 문헌 외에는 안양려애 관한 행정지명 이 기술되어 있지 않으묘로 옛 과전의 치소(治所 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 자리)에서 현 안양시의 영역언 만안구Cf西面)와 동안구(上西面}에 해당되는 경계에 판해 기재 된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 Ii며지도서(與地圖홈),n 염조 35년(1759) • 상서면은 과전환 차소에서 서쪽 15라 가점에 었다 (上西面 표縣西十五멸) • 하서면은 과전현 치소에서 서쪽 25려 지점에 었다 (下西面 在縣西二十五里) • Ii[H동7\IÃI(大東i{g펀、)J 고종 원년(1864) • 상서면은 저음이 10ç_J이고 끝이 20라이다 (上西체十원二十) • 하서면은 서남쪽。-로 끝。1 25랴이다 (下西면南終一十五) 톨 『과천읍지(果)11물誌)~ 1871 1910 ~ 1944년메 필사 • 하서면 一써 二洞 道I場里 虎{쫓뿔 石手村 安陽里 後頭尾洞 撥舍洞 a Ii자방행정구역명칭 일합(地方行政區域名稱-훨)J 조선총독부, 1912 • 하서면 一洞 二{폐 道陽里 虎&里 石手t폐 安F졌里 徵쳐尾1떼 t휩內I河 협종舍{펴 톨 『조선전도부문면리동명첨 일람(朝廳全道府뿜面里I템名稱-훨) .. 중앙시장, 1917 • 과천군 하서면의 撥舍里 石f없里 f짧흉尾里 t휩內里 安陽뿔7} 安養里로 통칭 되면서 시흥군 서여면 안양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됨
금천현 안양리는 치소와 인접혜 았을 뿐만 아니라 치소 내에 소재해 있어 행정상 중요시 되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 금전 안양리(현 석수123동)에 관한 자료를 열거 하딴 다음과같다
• r여지도서(짧地圖書).1 영조 35년(1759) • 현내면에서 10랴 거리에 安養里가 있고 5리 거려에 博山里(서울 시흥동 박미)와上뚜里가었다 • r시흥군읍7\1(始興那둠誌).1 광무 3년(1899)
제 l장 • 3(}
• 군내면에서 3려 거리에 박산려가 있고 10리 거리에 安養里(현 석수동)가 었으며 17리 거리에 博達里(현 박달동)가 있다 (都內面博山里츠里安養뿔十里博達里十七里) • r,경기지(京廳誌)J 편자마상 고종조머l 편년 • 위와강은내용엄 • f71전릅지(짧빼돕誌)J 의정부 고종조때 편년 • 위와 같은 내용이나 安養里를 安陽里로 기술함 • f지방행정구역명청 일람(地方行政區域名稱-寶)J 조선총독부 1912 • 시풍군 군내면 합ß內짜 安養里 博達里 • r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 알람(朝蘇全道府짧面里洞名稱-寶)J 중앙시장 1917 • 시풍군 군내면 安陽멸가 安養뿔로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됩

이상과 같이 양현(시흥,금천)에 안양리가 있었기 때문에 혀 계를 정확히 논증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이어서 수치에 걸친 답사와 읍지, 지리지, 지도 등을 토대로 안양의 원로들의 증언과 지리학자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종합 분석한 결과 현계(경계)는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안양유유원지로 흘러내리는 안양천(삼성천 옛 명칭은 安陽J[J 또는 安養J11)을 따라 그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 과전현 안양리(현 안양시 안양1동-9동)이다 말하자면 현 안양시의 지역 (i하域)중 석수동과 박달동은 금천현에 속했고 그 외 전역은 과천현에 속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자면 얀양와 근원지 즉 뿌리논 상성산에서 발원한 삼성전을 현계로 했고 뒤에서 언급하자만 안양의 명칭 유래가 삼성산 소재 안양사(安養좋)에서 유래되었으니 엄밀한 의미에서는 금천현이 안양의 근원지라는 섣이 옳다고 보나 현 안양시의 인구 및 면적은 물론 시청사 등 행정의 중심지가 삼성전 이남의 지역으로 과거 과천현의 치역이였으므로 안양역 큰원지는 과전현이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산에서 발원하여 안0륨원지로 흘러내리는 안양 천(삼성천 옛명챙은 安陽J[J 또는 安養J11)을 따라 그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 과전현 안양려(현 안양 시 안양1동-9동)이다 말하자면 현 안양시의 치 역 (i하域)중 석수동과 박달동은 금천현에 속했고 그 외 전역은 과천현에 속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자면 얀양와 근원지 즉 뿌리논 상성산에서 반원한 삼성전을 현계로 했고 뒤에서 언급하자만 안양의 명칭유 래가 삼성산 소재 안양사(安養좋)에서 퓨래되었으니 엄말한 의미에서는 금천현이 안 양의 근원지라는 섣이 옳다고 보나 현 안양시의 인구 맞 면적은 물론 시청사 등 행정 의 중심지가 삼성전 이남의 지역으로 과거 과천현의 치역이였으므로 안양약 큰원지는 과전현야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체12절 안양시 명칭의 유~H
I λl명칭에 대한제설
안양시 명갱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운 안양의 전통문화를 상칭하는 만안 교에샤 유래되었다는 설과 삼성산에 있었던 안양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으로 대 별되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갇다
1) 만얀교 원용설(萬安橋 援用說)
~

~‘
끊N ‘ *짧
• Ii'효단국져지(韓國地誌).n CD 건설부 1983 575쪽 안양은 조선의 정조 임금이 父主인 사도 얘 세자의 수원 화산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안 양에 r만안교I를 놓았는데 요도의 다리로
알혀진 이 다리 이름에서 ’安r자를 취하고 또 그 정성을 길이 일깨워 잘련다는 뜻에서 r찮r차를 취하여 ’安養’여 되었다고 함
• r효택지방행정지명사(韓國地方行政地名 史).1 내부부 1982 188쪽 만안교비 (1990년대) 정부기관등의 문한틀이 대부분은 안앙의 시명의 유래를 안안쿄원용이라고 밝01고 있다 조선 정조 19년(1795) 9월 표성이 극진
한 청조가 父君 莊敵世子(사도세자)의 수원 화산능 輩路를 위하여 놓은 /만안교r 에서 l安/지흘 사용댔을 것으로 풀이되며 정조가 父君에 대하여 身命을 바쳤던 바 와 강이 인륜의 근본인 부모엑게 표도하는 돗을 더욱 살리고 얼깨우며 그 뜻을 걸 。1 천하기 위하여 /養f~}를 사용하여 r安養r으로 칭하채 되였음 톨 『댐정구역 연혁 및 지명관련 사려b 내무부 1987 122쪽 f安r자는 조선 정조 19년(1794) 9웰 표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인 莊敵世子 (사도세자)의 수완 화산능 養路를 위하여 놓은 r만안교/에서 따온 것이며 정조가 父君에 대하여 선명을 바쳤던 바와 같이 언륜의 근본인 부모에게 표도하는 뭇을 더욱 살리고 일깨우며 그 뭇을 걸이 전하기 위하여 ’養’자플 사용하여 r安찮’으로 칭하게 되었음
처1I장 • 32
2) 얀양샤 원용설(安養좋 援用說)
• r신팔도기(新八道記)J 동아일보 1978 12 1 안양의 유래는 생어안주(生F安住 편히 사는 곳에서 따온 것 금주 과천 금천 안산으로 불려지던 시홍군의 한 둠애서 벌어져 나온 이곳을 安養이라 이름 젓기까지엔 손한 사연01 깃들어 있다 시내 한 복판에서 서울쪽으로 우뚝 솟은 상 성산에포 ’安íí'와 관련된 사연이 많다 • rJI호풍물지리지(鍵l행風物繼활좀、)J 감대규 겸언밀보 1983 12 13 안양야란 말은 원래 붕교어lλ.~ ,마음을 팬하게 지니고 폼을 쉬채 동}는 극락정토 (極樂폐土)플 딴컨는 말이다 안양계(安養界) 얀양보국(安월월며) 안양세채(安 養世界} 등이 모두 갇은 뜻을 가진 말들이니 시명(市名)이야 말로 더 말한 냐위 없이 빼어난 자랑거려가 아니겠는가? • r고향때 살다」 김대규 동아일보 1984 9 18 원래 불교에서 r마음을 편하게 지니고 몸융 쉬게 하는’ 극락청토(極樂f爭土}를 안양계(安효:뿜) 안양보국(安養寶國) 안양세계(安義世界)라 부르눈 바 안양이 바 로 그 佛界어] 통하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빼어난 여름인가? • r신풍토기(新風土記}J 정진규 효백일보 1982 7 30 얀양이란 지명이 1941년에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갱되면서부터 쓰여 진 것으로 연혁에 나타냐 있어 그 명장을 고찰할 셈으로 찾은 안양사(安養좋) 석 수동 산27) 경내 법당 앞에 남아 있는 궈부(龜많)정도에서 그 옛 사찰의 향훈을 느껴 볼 수 았을 따름여다 육당(六堂)의 『대동지명(大東地名)J사전에 의하면 안 양에 대한 지명풀이는 따로01 없고 안양λ}(安養좋) 제하에 재금전상성산(在챔’I[ 三뿔山 금천은 고려초기의 이 지역 명칭)요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칭할 때 야 사찰의 。l륨윤 원용(援用)한 켓으로 짐작펀다
2 안양시명칭의논거
전술한 안양시 명칭유래 중 1)의 반안교 원용젤은 『통국여자송람'J r여자도셔』 동 만얀교 가설 여전의 문헨에 r안양’이란 지명여 기채되어 있요므로 절득력이 부족하 다 특히 1)의 설은 억지 춘향식의 인조어 (A造語)인상이 걷게 풍긴다 안양여란 지명 은 김대규가 지적했듯이 불계의 극략정토(極樂{爭土)에서 나온 말로 그 기원은 선라
제2첼 • 33
효공왕 4년(900)에 고려 돼조 왕건이 금주( 챔川 시홍) 과주{果川 과천)) 등의 제 지역을 청별하기 위하여 상성산을 지나다가 능정(能正}이란 스닝을 만난 인연으로 그 자리에 안양사(安養춤)를 창사한 것으후부터 시작원다 안양사의 원용절을 주장하는 논거논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삼성산 안양사 인근에 있는 상막사{三幕춤) 장막전(三幕)1 [) 삼성천(三聖
J 1 [) 안양천( 安義川 현 상성전) 삼막동(三幕洞) 얀양교(安養橋) 얀양전석교(安 養川石橋) 안흥사(安興좋 염불암) 호압셔(虎뺑춤) 불성사(佛l生츄) 망해암(望{홉 魔) 염불암(;웅佛魔)등의 사명 (좋名) 저명 등이 모두 불교와 깊은 관련0] 있고 툴째 상성산 안양사와 위치가 금전현 안양라(현 석수동)에 속해 있오며 셋해 안양유원지 일대의 떳 져형야 안양동 또는 칸양골oì라 칭댔다는 안양 원로 들의 증언과 옛 문헌둡。l 이률 뒷받침하고 있는데다가 넷째 안양사 0]전에는 안양이란 문헌이 없으며 다섯째 삼성천(안양전)을 경계로 하여 현계플 구획댔다는 사설과 서로 다플 행정 구역(금선현 과천현}이면서 안양려(安養里)란 지명을 택댔ri-는 것은 우연0] 아닌 펀 연야었던 것으로 추청되며 그 주변 일대를 불심(佛JL、)으로 안양색계(安養世界)플 여 룩하려고 댔던 선조들의 깊은 뭇이 내도되어 있었읍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기 때문 이다
3. 안양시 멍청와 유래
안양이란 시명이 단생된 것윤 통일 신라 말기였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18세 때 (895) 아벼지 왕융 (王隆)을 따라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23 세 때 (900) 금주(챔)11 • 금전 • 시 흉) 과주(果) 11 • 과전) 등의 지역을 정 별하기 위하여 안양시 석수1동 소재 암 성산을 지나다가 삼성산에 구름0] 5가지 빚으로 채색을 이루어 이상하게 여겨 사 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나 능정(能正) 이란 늙은 스념을 만나 자세한 이야거를
제l 장 • 34
고려 태조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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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야 보니 왕건의 못과 참으므로 이곳(석수동 산27 일대)에 안양사란 사찰을 건립하 였는더] 이 연양사로 인하여 I안양(安養)'이란 시명이 탄생되었다
1) 안양(安劃의 뜻
안양01란 서방극락국{西方極樂國)의 。1명 (異名)으로 『무량수경 (뾰量壽햄}J 下어l 의하면 ”제붕(諸佛)이 보삼에게 말하여 안%뽑(安짧해)을 찾아보거l 하였다”고 기술되 어 있으며 의적소(義寂就}에는 /마음을 편히 하고 몸을 양(養)합윤 안양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좀 더 설명을 붙이면 안양은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십만억불을 지나간 곳 에 있다는 아마다뿔(阿鋼댄佛의 정토로 아미따불의 전신인 볍장구니(앞歲ltiÍ)의 이 상을 설현한 국토인데 지금도 겨l시어 향상 설법하시여 모든 일이 원만구족하여 즐거 움만 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줍고 안락한 이상향(理想鋼야다 그 밖에 안양은 얀양계(安養界) 안양교주(安養¥εt) 안양락(安짧뽕) 얀양세계 (安養世界) 극락세계 (極樂世界) 안양정 업 (安養{爭業) 안。&청 찰(安養l爭중IJ) 안양정 토(安養{爭士) 안양즉척광(安觀願光) 안양지족(安짧H足)이란 뜻£로도 풀야된다 • 참고문헌 세계성전간맹협화 『망월불교대사전J 1954 한국불교편잔위원회 『한국불쿄 대사전.! 1982 이숭언 「안양의 유래」 안양문화 4-1985 이송언 「안양시 지명퓨래」 안양문화 5-1986
2) 얀양(安養)의 장엄(莊嚴)
톨 안양은 망이 칠보(七寶)로 되어 광~H7} 빚냐고 기묘하여 청정하기가 시방세계 야l 뛰어냐고 국토의 넓이가 한량없오며 땅이 평딴하여 산 구령 골짜기 바다 강야 없다 톨 안양은 바와 눈아 없고 혜와 달이 없£냐 항상 밝고 어둡지 아니하여 밤과 낮이 없거니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으로 낮을 삼고 꽂이 지고 새가 쉬는 것으로 밤을 삼으며 기후가 차고 더운 것이 없어 향상 봉파 갇이 온화하고 밝으며 상쾌하다 I 안양은 땅위에서 허공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는 여러가지 보배와 백천 종류악 향(香)오로 되였으며 장엄한 것이기 묘하고 절송하며 광채가 휘황하가 그지없다

l 안양은 여러가지 보배로 된 보망(寶網)이 그 냐라를 덮었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보배나무도위에는보망이 덮히었고 그주위에는보배 난깐(爛千)이 풀려져 교묘하게 꾸미고 광채가찬란하다 또 바람야 약간 불면 보배나무와 보배그물에서 미묘한 법읍(å2룹)이나며 꽃다운 향겨가 퍼지고 나무에샤 나는 소리가 백장 종류의 음악소리와 같다 l 안양은 바람。l 불면 꽃이 흩어져서 전국에 가득차고 하늘에서도 꽃비가 오는데 쩌l각가 그 빚을 따라 쌓이고 섞이지 않 o 며 부드럽고 고와 찬란한 광채와 꽂다운 향71가난다 • 안양은 칠보로 된 연목에 팔공덕수(八功德水)가 가득 갔는데 목욕할 때는 물이 럽고 잔 켓과 늘고 주는 마웅대로 된다 l 안양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각색 보배그릇01 마음대로 앞에 오는데 그 가운 데어l 백마(百味)가 구존(具存)한 음식여 잠겨져 있고 먹은 뒤에는 자연히 녹아 흘러서 남는 찌꺼가가 없다 • 안양온 모든 사람들이 지혜가 있고 마음오로 생각하는 것이 도덕 아닌 것이 없으며 업으혹 말하는 것이 바른 얼 아닌 것이 없고 서로 사광하며 공겸하고 마워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오며 제각기 질서를 지키고 에긋나는 일이 없어서 움직야는 것이 예의(禮橫)에 맞고 화목하기가 형제 칼으며 말야 진실하고 서로 가르져주면 기뿌게 받아 어검이 없오며 신7l(懶)가 고르고 고요하며 처l질이 가볍고 맑다 l 안양은 락(樂)만 있고 쟁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이 없나니 태어날 때는 고통이 있으니 성화(花生)하는 떼는 연화에 확생하므로 생고(生苦)가 없으며 4계철이 없고 절가가 바뀌지 아니하며 기후가 항상 온화하여 노고(老苦)가 없으며 화생한 몸。1 미묘하여 향기롭고 정결하므로 병을 앓아 고생동}는 일이 없고 수명야 한량이 없으므로 사고(死苦)가 없다 •

참고문헌 홍인표 『연종집요.1 1970 세제성전간행협펴 『망월불쿄대사전J 1954 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펴 r한국불교대사전J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