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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군포의왕과천의 선사(先史)·고대(古代)시대 이야기

안양똑딱이 2020. 6. 12. 01:21


선사.고대와 원과천


 

과사모 추천 0 조회 24 06.02.26 16:0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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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선사(先史)·고대(古代)와 원과천(元果川)

 

현 과천시 지역에 관련된 선사나 고대의 유적은 아직까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왜냐하면 과천 신도시를 개발하는 데에 있어 고고학적 조사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택지를 개발하거나 댐 등을 건설하는 데 반드시 그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사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사후의 처리에 대하여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천의 경우는 이러한 조사 및 보고서의 작성이 없이 신도시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신도시지역 내의 선사나 고대의 유적들이 개발과정에서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산본이나 평촌에서 신도시를 개발할 때 나온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이 지역에 적지 않은 문화 유적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곳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현 과천 지역에서도 선사나 고대의 문화 유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아쉽게도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주】1) 다만, 원과천이었던 현 서초구 원지동과 양재동 일대 및 안양시 평촌 지역, 그리고 군포시 산본 지역의 경우에 비추어 과천 지역의 선사와 고대 유적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원과천으로 분류된 지역들은 삼국시대의 율목(栗木)·율진군(栗津郡)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고려시대의 과주(果州)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과천현(果川縣)의 관할에 속하고 있었다. 이후 대한제국기에도 과천군 상서·하서면(안양시 평촌)·남면(군포시)·동면(서울시 양재동·우면동·신원동)이 있었던 이 곳들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에서 분리되어 각각 시흥군 하서면(평촌)과 남면(산본), 그리고 신동면(원지동·양재동·우면동)으로 관할되게 된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에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우리 역사로 볼 때 그 시기는 매우 적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으므로 여기에 소개해도 큰 지나침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불행히도 현 과천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선사 및 고대 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은 위의 지역 사이에 위치했던 현재의 과천 지역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제1절 평촌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2절 산본지역의 선사·고대유적
○ 제3절 기타 지역에서 조사된 지석묘

 

▣ 제1절 평촌지역(坪村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주】4)

○ 1. 개관
○ 2. 평촌마을 지석묘군
○ 3. 신촌마을 지석묘군
○ 4. 기타 지석묘
○ 5. 귀인마을 백제 주거지

 

▣ 1. 개관

현재 안양시에 편입되어 있는 평촌 신도시 개발지구는 1914년 과천이 시흥군에 폐합되기 이전까지는 삼국시대 이래 행정구역상 과천의 일부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의 상서면(上西面)과 하서면(下西面)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 지역은 현재의 과천이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의 협소한 지형인데 비해 비교적 넓은 개활지로 선사시대인들이 주거지로 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평촌의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에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부터 5월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주】2) 두 차례의 조사는 평촌지구가 대규모 택지개발로 인하여 지표의 원형이 변형될 수밖에 없어 실시된 것으로, 주택단지 조성에 앞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진행되었으므로 그나마 원과천 지역의 선사유적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선사유적으로는 지석묘가 모두 13개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것들은 평촌산(坪村山) 동북쪽 논에서 발견된 6기, 신촌(新村)마을 입구의 구릉 정상부의 5기, 평촌산 남서쪽 기슭의 1기, 귀인(貴仁)마을 안쪽 구릉의 1기이다. 그리고 귀인마을에서 조사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住居址) 유적이 있다.
아쉬운 것은 신도시의 택지개발을 위해 실시된 조사였으므로 조사 후에 유적들을 현장에 복원하여 보호하지 못하고, 지석묘 중 일부는 경기도에서 건립중인 도립박물관의 전시용 유물로 옮겨 가고, 귀인마을 지석묘는 명지대학교로 이전 복원되었으며, 신촌마을 지석묘는 평촌신도시내의 중앙공원에 복원되도록 결정되어 지석묘와 그 유구(遺構)의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산본 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山本里)로 불리웠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서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했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과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리된 이 지역들은 비록 오늘날에는 다른 행정구역으로 속하여 있지만, 유구한 역사에서 그 시기는 매우 짧고 대부분의 시기는 행정구역상 과천에 속해 있었다. 불행히도 현 과천 지역은 아무런 대책이 없이 신도시개발을 하였으므로 유적이나 유물이 사라져 갔으나 원과천 지역에 선사 및 고대시대의 유물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현재의 과천 지역에도 상당수의 선사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 2. 평촌(坪村)마을 지석묘군

이곳의 지석묘는 인덕원(仁德院) 4거리에서 군포(軍浦) 방향으로 약 1㎞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의왕시(儀旺市) 포일(浦一) 주공아파트단지 서쪽 약 200m 지점에 6개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에는 안양천의 지류인 학의천(鶴儀川)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해발 약 80m의 구릉지가 있다.
【지도】평촌마을 지석묘군 위치도

 1) 제1호 지석묘

  화강암인 덮개돌(蓋石)의 크기는 150×85×30∼40㎝이고 장축(長軸)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3개의 성혈(性穴)이 있으며, 사방에는 매끈하게 다듬어 치석(治石)을 한 흔적이 있고, 남동쪽 모서리는 정(釘)으로 깨뜨린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의 유구(遺構)는 할석(割石)들이 결실되는 등 훼손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형을 찾아 복원한 결과 유구의 길이는 약 230㎝이며, 폭은 40∼50㎝의 규모로 성인(成人)을 신전장(伸展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하부에 토광(土壙)의 흔적은 없었다.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북쪽 2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그 크기는 220×150×30∼40㎝의 규모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2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의 유구는 석관(石棺)으로 55∼80㎝의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판석(板石) 6매(枚)를 깔아 놓았다. 부장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생토(生土) 위에 판석으로 된 석관을 구축한 후 덮개돌을 덮은 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평촌마을 제2호 지석묘 하부구조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북쪽 약 2.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6개의 지석묘 중에서 유일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다. 덮개돌 위에 170×110×25∼40㎝의 석괴가 얹혀 있었는데, 이 석괴는 제5호 지석묘의 덮개돌로 추정되고 있다. 제3호 지석묘의 덮개돌은 440×210×40∼50㎝의 대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에는 하나의 성혈이 있었으며, 하부 유구로 3개의 석곽이 발견되었다.
  주석곽(主石槨)으로 보이는 제1호 석곽은 덮개돌을 받치는 4개의 지석(支石) 사이에 있었는데 할석을 연결시켜 벽석을 만들고 내부를 작은 할석으로 채웠다. 크기는 250×60㎝ 정도로 성인을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곽의 남쪽에 있는 제2호 석곽은 크기가 135×55㎝ 정도로 판석을 장축 방향으로 양쪽 벽석에 걸쳤으며, 양쪽 끝은 판석 2장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석곽은 크기로 보아 아동용이었거나 세골장(洗骨葬)과 같은 특수한 매장법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첫번째 사례이다. 덮개돌의 동북쪽에 있는 제3호 석곽은 크기가 140×45㎝이며, 할석이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가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제2호 석곽과 같이 세골장용이었거나 아동용 석곽으로 보이며, 제4호 지석묘 쪽으로 흘러 들어간 할석 사이에서 간돌화살촉[磨製石鏃] 1점과 민무늬토기[無紋土器] 파편이 몇 점 발견되었다.
 【사진】평촌마을 제3호 지석묘 하부구조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의 하부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370×290×40∼50㎝ 규모로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4개의 매장터가 발견되었다.
  제1호 유구는 덮개돌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100×40×50㎝의 규모로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규모로 보아 세골장을 했던 유구로 추정된다. 제2호 유구는 제1호 유구의 동쪽에 있는데, 토광을 판 후 그 위에 할석을 얹은 모습으로 토광의 크기는 길이가 120×50∼70㎝, 폭이 40∼50㎝의 규모이다. 제3호 유구는 제2호 유구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는데 토광을 판 후에 할석을 덮은 모양이나 덮개돌에 눌려 원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제4호 유구도 토광의 규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 제4호 지석묘는 하나의 덮개돌 아래에 유구가 여러 개 있는 구조로서 가족들이 사망한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한 세골장식 가족묘로 추정된다.

  5) 제5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약 4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75×50×15∼20㎝ 정도로 작은 규모였으며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4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을 들어낸 후 할석들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구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덮개돌도 그 규모로 보아 유구 위의 덮개돌이 본래의 것이 아니고, 제3호 지석묘 덮개돌에 올라가 있던 석괴가 여기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6) 제6호 지석묘

  제1호부터 5호까지의 지석묘가 밀집해 있는 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00m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인접하여 송유관 등 시설물이 있어 유구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7) 출토 유물

  평촌마을 지석묘군에서는 몇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형토제품(原形土製品)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직경 4.4∼5㎝, 두께 1.4∼1.5㎝의 크기로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나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민무늬토기 조각들은 제3호와 4호 지석묘 사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앞으로 더 연구가 진행되면 이 곳에 있는 지석묘의 연대 추정에 자료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간돌화살촉도 제3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 6㎝, 폭 1.2㎝의 크기이다. 날의 한쪽은 떨어져 나갔으며, 가운데가 도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제6호 지석묘의 덮개돌 하단에서 발견된 숫돌은 길이 12.1㎝, 폭 7.2∼4.1㎝ 크기로 땅에 박아 놓고 사용하던 숫돌로 추정된다. 돌도끼는 제6호 지석묘에서 2개가 출토되었는데,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길이가 11.1㎝, 폭 5.5∼8.5㎝, 두께 0.6∼1.4㎝의 크기이며 몸체의 중앙부에 자루를 고정시키는 홈이 있다. 같이 발견된 돌도끼 조각은 한쪽 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사용으로 인한 마모가 심하게 나타난다.

 

  ▣ 3. 신촌(新村)마을 지석묘군

  신촌마을은 안양남국민학교에서 평촌 신도시 건설지구 쪽으로 약 500m 쯤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지석묘는 발굴·조사 후 평촌단지내에 들어설 중앙공원에 이전·복원될 계획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는 모두 4개의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도】신촌마을 지석묘군

  1) 제1호 지석묘

  신촌마을 지석묘 중에서 제일 큰 것으로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340×250×30∼40㎝ 정도이며, 성혈이 하나 발견되었다. 지석묘가 위치한 구릉은 지표밑 10∼15㎝ 아래에 부식 암반층이 깔려 있었는데, 여기에 하부 구조가 시설되어 있다. 덮개돌 밑의 주 유구 외에도 덮개돌 주위에서 유구가 2개 더 발견되었는데, 서쪽의 석관유구는 형태가 완전하였으나, 석관 남쪽의 유구는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석관의 규모는 80×60㎝에 깊이가 30㎝정도로 성인을 신전장(伸展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덮개돌 아래의 유구는 형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부장된 유물은 없었으나, 덮개돌 주위에서 민무늬토기의 바닥조각과 간돌화살촉, 숫돌이 발견되었다.
 【사진】신촌마을 지석묘 유적 개석 노출 상태

  2) 제2호 지석묘

  제1호 지석묘의 서남쪽 약 5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의 크기는 174×110×30∼40㎝로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5°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할석을 이용해 석곽(石槨)을 만들었던 것 같으나 훼손되었다.

  3) 제3호 지석묘

  제2호 지석묘의 남동쪽 약 3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언덕 정상부에 덮개돌이 거의 노출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185×155×20∼30㎝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6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위에 3개의 성혈이 있었으며, 사방에는 치석한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돌 밑에는 90×30㎝정도 크기의 반월형(半月形) 판석 2매가 놓여 있는데, 이외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지석묘는 매장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4) 제4호 지석묘

  제3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약 6m쯤 떨어져 있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205×190×25㎝이고 장축은 동-서에서 북으로 약 1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산의 경사에 의해 덮개돌이 미끌어지면서 하부구조는 훼손된 듯 하며 30㎝ 정도 크기의 할석 2개만이 남아 있었다.

  5) 출토 유물

  간돌화살촉은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는 약 7.7㎝로 날과 날개 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숫돌은 역시 제1호 지석묘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길이 5.7㎝, 폭 3㎝, 두께 1.5㎝의 규모이며 사용으로 인한 마모흔적이 뚜렷하다. 민무늬토기의 바닥 조각은 민무늬토기 제작양식상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바닥에서 그릇의 배쪽에 연결되는 부분이다.

 

  ▣ 4. 기타 지석묘

  평촌마을 및 신촌마을의 지석묘균 외에 평촌지구 발굴조사에서는 2기의 지석묘가 더 발굴되었다.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귀인(貴仁)마을 지석묘

  평촌동 365-3번지 뒷산의 정상부에 있는데 주민들에 의해 ‘신선바위’라고 불리웠으며, 덮개돌의 크기는 175×110×20∼30㎝ 규모이고 7개의 성혈이 있었다. 지석묘는 산 정상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덮개돌 밑에서 아무런 시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지석묘는 현재 명지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2) 갈산(葛山)마을 지석묘

  경수산업도로에서 군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안(大安)여중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여 m쯤 떨어진 산기슭의 밭에 지석묘가 있다. 이 곳은 신도시 중앙공원의 끝자락 일부이기도 하다. 덮개돌의 크기는 200×105×20∼25㎝로 장축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30˚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덮개돌 밑에서 유구 등 하구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 5. 귀인(貴仁)마을 백제 주거지

  평촌 신도시 개발을 위한 명지대 박물관의 조사에서 지석묘들과 함께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발견되었다.【주】3) 이 주거지는 귀인마을 지석묘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3m 쯤 떨어진 산의 능선에서 발견되었는데, 지표조사시 타제(打製)석기가 흩어진 채 여러 점 발견된 곳이었으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조사과정에서 백제주거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백제시대 주거지는 온돌구조를 하고 있는데, 온돌은 할석들이 4줄의 석렬(石列)을 형성하고 있다. 석렬 사이의 골에는 숯가루가 깔려 있고 돌에는 불을 땐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아궁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솥을 걸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판석이 발견되었고, 아궁이 북쪽으로 부엌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백제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갈색토기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당시 집을 세웠던 기둥자리와 함께 저장고(貯藏庫)로 보이는 시설도 확인되었다.
  이 귀인마을의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데, 지표면으로부터 30∼50㎝ 정도 깊이의 움을 판 후 온돌시설·부엌·저장고 등을 갖춘 것이었다. 바깥 기둥내의 집은 지름 4.5m 정도의 원형이며, 면적은 25.25평방m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3점으로 초기 백제시대의 토기로 보이는 승석문토기의 파편 1점과 곁면을 마연한 흑색토기 파편 1점, 그리고 돌도끼 1점이다.
 【사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지도】귀인마을 백제주거지 평면도

 

  ▣ 제2절 산본지역(山本地域)의 선사(先史)·고대유적(古代遺蹟)

  산본지역은 조선시대의 과천현 남면(南面)의 산본리와 금정리 일대이다. 산본은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산저리(山底里)로 불리다가 고종 때부터 산본리로 불리었으며, 1914년부터는 과천에서 떨어져 나가 시흥군의 남면에 속하였다. 수리산의 남쪽지역에 위치한 구릉지대로써 경사가 완만하고 가운데로 하천인 산본천이 흘러 비교적 사람이 살기에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사나 고대시대에 적지 않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인 서해안이 가까워 국가에서 중요시 여겼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11기의 지석묘와 1개의 고분군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 1. 산본지구 지석묘
     ○ 2. 산본지구 삼국시대 고분군


  ▣ 1) 골안 지석묘군

  골안은 군포의 산본 주공아파트 1단지 우측으로 당성사(堂成寺)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수리산 기슭까지의 구간이다. 길을 따라 가면 왼쪽으로 논이 보이는데, 논의 중간 쯤 되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골안[內谷]이란 말에서처럼 수리산에서 뻗어 내린 2개의 작은 능선 사이에 있다. 현재에는 도시고속화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수리산의 밑부분이 파괴되어 개발되었기 때문에 줄기가 없어졌다. 또한 산본 신도시 개발로 인해 그 지역에 10m 쯤 땅을 돋우어 우성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다.
 【사진】골안 지석묘군 근경

  (1) 1호 지석묘
  해발 45m의 계단식 논에 위치하는데, 덮개돌은 장축이 남-북에서 서쪽으로 30°정도 위치해 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05㎝, 너비 140㎝로 약간 긴 타원형이고 두께는 50㎝ 내외이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 점토층이었으며, 덮개돌 하부의 중앙과 남쪽 부분에서 할석들이 노출되었다. 계곡 입구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자연적인 유실로 유구가 상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검출된 유물은 없었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4m쯤 떨어진 논두렁에 위치하였는데, 덮개돌은 길이 180㎝, 너비 85㎝, 두께 30∼50㎝의 규모로 부정형이다.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석질은 화강암이고 둘레를 치석하였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덮개돌의 하부는 흑갈색의 뻘과 모래가 섞여 있는 교란층이었으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 2) 광정(光亭)마을 지석묘군

  광정마을 지석묘군은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큰 능선의 하단부에 있는 계곡의 삼각지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 2동 345번지의 밭에 위치한다. 유적 뒤편으로 산본중학교가 있으며, 옆쪽으로는 옐림복지타운이 들어서 있다. 이 지석묘군은 동-서 방향 약 70m 사이에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5기가 조사되었다.

  (1) 1호 지석묘
  유적의 가장 서편에 위치하는데, 광정마을 지석묘 중 규모가 제일 크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265㎝, 너비 140㎝, 두께 50∼55㎝의 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약 40°가량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은 지반의 경사에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온 듯 한데, 덮개돌의 동북쪽에서 하부 구조로 보이는 할석이 노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훼손 상실되고, ‘U’자 모양의 석곽 형태만 확인되었다. 복원된 석곽의 규모는 길이 200㎝, 폭 80㎝ 내외로 추정된다.
 【사진】제1호 지석묘 석관 노출상태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에서 동북으로 약 40m 떨어져 위치한다. 길이 100∼200㎝, 폭 50∼100㎝ 내외의 석괴 5개가 모여 있는데, 중앙의 돌은 뒤집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3호 지석묘와 합쳐 모두 7개의 석괴가 흩어져 있는 상태이다.
  5개의 석괴 중 남쪽에 있는 장축방향 동-서인 장방형의 석괴가 주석괴로 추정된다. 이 주 석괴의 규모는 길이 196㎝, 폭 93㎝, 두께 37㎝였다. 5개의 석괴를 모두 옮긴 결과 2개의 석곽이 노출되었다. 이 지석묘는 별개의 2개 지석묘 유구가 있었던 것인데, 어느 시기엔가 석괴를 모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3호 지석묘
  2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약 3m 지점에 2개의 석괴가 마주 고인 듯이 서 있는데, 큰 것은 길이 210㎝, 폭 151㎝의 크기이며, 작은 것은 148㎝, 90㎝의 규모이다.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약 16°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교란되었고, 덮개돌의 동편 바닥에 100×70㎝ 규모의 판상할석이 노출되었다.

  (4) 4호 지석묘
  3호 지석묘에서 남쪽으로 5m 쯤 떨어져 위치한다. 덮개돌은 4쪽으로 쪼개져 있는데, 규모는 길이 154㎝, 폭 100㎝로,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가량 기울어져 있다. 하부 구조는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5) 5호 지석묘
  4호 지석묘에서 동쪽으로 19m 떨어져 있다. 광정의 지석묘군 중 가장 평평한 덮개돌로 이루어졌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166㎝, 폭 145㎝의 크기로 타원형이며, 석질은 화강암이다. 하부구조는 발견되지 않았고, 덮개돌 밑에는 홍수의 영향으로 보이는 토사층이 있으며,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지석묘도 홍수 등의 영향으로 이동하였다고 생각된다.

 

  ▣ 3) 문화촌(文化村) 지석묘군

  문화촌 지석묘군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에서 다시 남으로 뻗은 중간 지맥의 해발 55m 지점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산본동 산1∼2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전주 이씨 묘역이 서쪽에 위치하며, 지표면은 남쪽으로 경사진 사면을 이루고 있다. 주위에 지석묘의 덮개돌으로 보이는 큰 돌들이 여럿 분포하는데, 이 중에서 지석의 흔적이 뚜렷한 4기가 되었다.

  (1) 1호 지석묘
  구릉 사면의 동남부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00㎝, 너비 180㎝, 두께 20㎝이며, 장축은 서북-동남방향이고, 타원형이다. 둘레에는 치석이 되었던 흔적이 완연하였으나 하부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2호 지석묘
  1호 지석묘 서쪽 7m에 위치한다. 덮개돌은 편마암이며, 규모는 길이 290㎝, 폭 263㎝의 거의 원형이고 두께는 64㎝이다. 장축은 남-북향이고 덮개돌의 하단에서 길이 40∼60㎝의 장방형 판상할석이 발견되었다.
 【사진】문화촌 제2호 지석묘 개석 노출상태

  (3) 3·4호 지석묘
  2호에서 북쪽으로 5∼10m 떨어져 위치한다. 3호는 크기 120×80㎝ 규모의 돌 위에 210×150㎝ 크기의 석괴가 겹쳐 있는 모습이고, 4호는 210×130㎝의 크기이다. 석질은 모두 편마암이며, 치석에 의해 깨어진 모습이 확연히 구별되었다. 3호 지석묘의 하단에서 지석으로 보이는 판석이 발견되었으나 하부 구조는 교란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 2. 산본지구(山本地區)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군(古墳群)

  산본 지역에서는 지석묘와 함께 고분군도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기 신라 초기의 고분으로 추정된 산본 지역의 고분은 모두 9기였으며, 그 구조는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혼재해 있었고, 당시에 사용된 토기 등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고분군의 위치는 군포시 산본동 산 1∼2번지이며, 안양과 군포의 시계를 지나는 34번 국도의 우측에 있는 해발 60∼90m의 구릉지대의 동쪽 사면 중턱에 위치한다. 밑으로는 전경부대가 있다. 고분군의 앞면에는 산본천과 안양천이 흐르며 그 주위에 분지형 평야가 펼쳐져 있어 고분 조성 당시에는 이 곳이 매장된 이들의 생활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전경

  1) 제1호 고분

  조사지점의 구릉 정상부에 노출되었는데,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구조이며 분구(墳丘)는 유실되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석곽 북쪽 분구 기저부에 반원형의 호석(護石)시설이 남아 있는데 남쪽의 호석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구조는 길이 80∼90㎝의 장방형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로 네 벽을 축조하였다. 장축은 남-북향에서 서쪽으로 약 10°가량 기울어 있다. 석곽의 바닥에는 길이 80㎝, 너비 60㎝, 두께 15㎝의 판석 2장을 깐 시상대(屍床臺)가 설치되었다. 유물로는 북벽과 시상대 사이에 놓인 판석 위에서 인화문유개합(印花文有蓋盒)과 점열타인문완(點列打印文碗) 뿐만 아니라 청동제의 유물도 수 점이 발견되었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1호 고분 출토유물

  2) 제2호 고분

  1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13m정도 떨어진 구릉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분구는 거의 유실되어 지표 하 15∼20㎝에서 호석과 석실 4벽의 상단부가 발견되었다. 석실은 현실(玄室)과 연도가 있는데, 현실의 평면은 방형이며, 연도는 왼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횡혈식석실이다. 호석은 길이 50∼60㎝ 정도의 비교적 면이 고른 돌을 이용하여 서로 겹치게 쌓았다. 이로써 보면 분구의 밑면이 직경 6.4m인 원형분으로 생각된다. 유물로는 토기병(土器甁)이 동쪽 시상대의 북단에서 발견되었는데, 입둘레는 6.7㎝이고 둘레는 8.5㎝이며 밑의 둘레는 8.5㎝, 높이 15.5㎝의 작은 병이다.
 【사진】산본동 삼국시대 제2호 고분 전경

  3) 제3호 고분

  구릉에서 동남쪽으로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표 5∼10㎝ 아래에서 석곽의 4벽 상단부가 나타나 있으며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으로서 석곽의 평면은 남북 방면으로 긴 축을 둔 장방형이다. 길이 220㎝, 너비 87㎝이고 남아있는 벽면인 북벽의 높이는 80㎝이다. 석곽은 80∼90㎝의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그 안에 돌들을 쌓아 구축하였다. 유물로는 토기인화문병(土器印花文甁)이 출토되었는데, 시상대에 접하여 석곽 북벽과 서벽의 모서리 부분에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크기는 입둘레 10.2㎝, 둘레 17㎝, 밑바닥의 둘레는 10.8㎝이고 높이는 18㎝로 2호 고분의 것보다 약간 크다.

  4) 제4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동편으로 10m 떨어진 동쪽의 경사면에 있다. 내부 구조는 수혈식석곽인데, 봉토는 유실되고 석곽의 상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석곽의 경우 지표에서 100㎝ 정도의 장방형 토광을 조성하고 그 안을 막돌과 포갠돌 등으로 쌓았다. 석곽은 폭이 82∼92㎝, 길이 220㎝ 정도, 높이 88㎝의 대형이고 잔존 형태도 양호하며, 주축방향은 남-북으로 10° 정도 기울어져 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지도】산본동 삼국시대 고분군 지형도

  5) 제5호 고분

  3호 고분에서 남쪽으로 8m정도 떨어진 구릉의 비탈에 있다. 분구의 봉토는 유실되어 석곽의 남쪽 상단부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구조는 횡혈식석곽으로 장방형의 토광 안에 만들어졌다. 남쪽 부분은 파괴되어 소실되고, 나머지 부분은 양호한 상태였다. 유물로는 서북의 시상대 위에서 토기단지 1점과 왼쪽 어깨부분에서 청동제 허리띠 장식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토기단지는 입구의 주둥이 부분이 약간 상했을 뿐 거의 완제품에 가깝다. 검은 회색을 띠고 있고 형태와 바탕흙의 성격으로 보아 백제 계통의 것으로 여겨진다. 입둘레 11.4㎝, 둘레 17.4㎝, 밑둘레 11.8㎝, 높이 16㎝이다.

  6) 제6호 고분

  구릉 남쪽 비탈의 제2호 석실분에서 13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분구의 봉토는 이미 유실되어 석곽의 일부가 노출된 상태이다. 석곽 바닥의 전면에는 포갠돌을 한 겹으로 깔아 시상대를 설치하고 있으며, 남쪽 시상대의 경우는 1/3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이유는 도굴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행히 시상대에서 깨진 점열문토기와 청동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석곽의 평면 구조는 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남-북이며 약 15도 편제되어 있다. 관뚜껑으로 석재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나무뚜껑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60㎝, 폭 110㎝, 높이 106㎝이다.

  7) 제7호 고분

  구릉 사면의 남단에 위치하며, 단애에 걸쳐 있다. 발굴조사 이전에 파괴되어 남벽과 서벽을 상실한 채 조사가 진행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150㎝ 깊이의 토광을 파고 석벽을 축조하였다. 북벽과 동벽은 각각 크기 60×25㎝의 돌을 가로로 눕혀서 7∼8단의 높이로 축조하였다. 비교적 면이 고른 석재를 이용하여 벽면이 정연한 편이다. 석곽의 바닥은 고운 흙으로 깔고 다진 흔적이 있으며, 북벽으로부터 43㎝ 떨어져 소형 판석이 있어 시상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제8호 고분

  발굴지의 서편 구릉에 위치하며, 봉토가 유실되어 석곽의 상단 일부가 노출된 상태로 조사되었다. 수혈식석곽분으로 60㎝ 정도로 낮은 토광을 파고 축조되었다. 4벽은 모두 50∼30㎝ 정도의 큰돌을 포개 눕히고 그 사이에 잔돌을 끼워 넣은 형태로 4∼5단을 구축하였다. 석곽의 바닥에는 남벽 쪽으로 20×15㎝의 판석이 놓여 있을 뿐 시상대는 별도로 축조되지 않았다. 생토를 깍아 만든 바닥에 고운 흙을 깔았으며, 석판은 매장자의 신발 등 유물을 놓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곽의 규모는 너비 73㎝, 길이 212㎝, 높이 64㎝이다.

  산본동의 고분은 수리산의 동쪽 지맥을 이루고 있는 해발 65m의 구릉지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같은 구릉지대의 고분군은 낙동강 유역의 가야고분군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나 중부지역에서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 찾아질 뿐이다. 고분의 축조형태는 수혈식석곽분(8기)과 횡혈식석실분(1기)이 같이 나타나고 있는데, 수혈식고분은 지표에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토광 안에 석곽을 축조하였고, 석곽 바닥에 시상대를 조영한 것이다. 그리고 덮개는 나무덮개 형식을 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횡혈식석실분은 수혈식과 같이 토광을 파고 남벽에 연도를 마련한 평면방식에 가까운 석실을 축조하였다. 석실 바닥에는 동서로 2개의 시상대가 마련되어 있다. 고분군에서 발견된 3점의 토기 등 유물을 통해 삼국시대 말경에서 신라통일기에 이르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제3절 기타 지역(地域)에서 조사된 지석묘(支石墓)

     ○ 1. 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 2. 원지동 지석묘군

  ▣ 1. 서초구(瑞草區) 양재동(良才洞) 지석묘(支石墓)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양재동·우면동 일대는 원과천의 동면 지역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해 있었다. 이 곳에서 1958년과 그 이듬해에 각각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이를 당시의 조사 보고서를 통해정리해 보기로 한다.【주】5)
 【지도】서초구 양재동 지석묘 위치도

  1) 양재동 지석묘

  양재천 남방 약 100m 지점의 넓은 공터에서 매몰된 채 6기가 발견되었는데, 북방식 지석묘로 추정되었다. 지석묘가 조사된 곳은 현재의 양재동에 속한 거여(巨餘)마을로 지금의 양재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이다. 이 마을은 ‘게리’라고도 불리웠는데, 조사 당시 이 동네에서는 지석묘를 ‘괴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고인바위의 준말이며, 동네에서는 년 1회 도장제(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고 전한다.

  2) 우면동 지석묘

  양재동 지석묘가 위치한 곳으로부터 남서쪽 산록에 위치하였는데,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조사 보고되었다. 조사 당시 그 일대에서 ‘고름장바위’라고 불리웠다고 하며, 지석 바로 위에 병풍같은 바위가 둘러 쳐져 있었다고 한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300㎝, 폭 300㎝, 두께 50㎝이며, 지상으로 약 70㎝ 높이의 두 개의 지석 위에 놓여 있었다. 지석 밑에는 길이 170㎝, 넓이 130㎝의 석실이 있었음이 조사되었다.

 

  ▣ 2. 원지동(院趾洞) 지석묘군(支石墓群)【주】6)

  원지동의 지석묘군은 현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한강 하류의 양재천 남쪽 지류인 염곡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지동은 조선시대 말기의 과천군 동면 신원동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시흥군 신동면에 속하였다가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신원동과 분리되어 바람굴·양수리·원터마을의 3개 마을이 있었다. 이 곳에서 4지구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의 위치는 한강 하류 양재천의 남쪽 지류인 염곡천을 끼고 청계산의 지봉인 옥녀봉(玉女峰)의 지맥을 따라 해발 40∼60m 능선의 끝부분인 밭 가운데 동북향으로 분포되어 있다. 지형상 광주평원의 서쪽 병풍산이 청계산 기슭에서 동북 방향으로 광주평원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비옥한 농경지대로 적합하다.
 【지도】원지동 지석묘 위치도

  1) A지구 지석묘군

  원지동의 원터마을 미륵당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지하통로를 건너 샛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0m 쯤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 원지동 350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 3기의 지석묘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제1호 지석묘는 고속도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5°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길이 258㎝, 너비 154㎝, 두께 77㎝이다. 주위에서 무공반월형 석도 1점과 긁게 1점이 발견되었다.
  제2호 지석묘는 1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하고 받침돌은 없었으며, 덮개돌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2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148㎝, 너비 108㎝, 두께 84㎝로 사면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제3호 지석묘는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장축의 방향은 남북에서 동쪽으로 40° 가량 기울어져 있다. 길이 245㎝, 너비 148㎝, 두께 88㎝ 로 비교적 큰 편이다.

  2) B지구 지석묘군

  A지구 지석묘로부터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인 원지동 336∼7번지 일대의 밭 가운데에 7기의 지석묘가 위치한다. 7기 중 제6호 지석묘가 제일 규모가 크며, 나머지 중에 5기는 동서로 나열한 모습으로 6호 지석묘를 호위하는 듯 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제4호 지석묘는 제3호 지석묘에서 동북 방향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덮개돌의 북쪽 부분이 묻혀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길이 325㎝, 너비 146㎝ 두께 58㎝로 굉장히 큰 편에 속한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북남서 방향으로 놓여져 있고 남북에서 서쪽으로 약 30° 가량 기울어져 있으며, 그 위에 길이 100㎝, 너비 43㎝의 판석이 있다.
  제5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의 동쪽 끝부분과 맞닿아 있는 상당히 큰 것으로 덮개돌의 밑이 들려 있기 때문에 하부 구조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조그마한 잡석들만 남아 있다. 제6호 지석묘는 제5호 지석묘와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크기도 크고 두껍다. 길이 440㎝, 너비 245㎝, 두께 50∼70㎝로 원지동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크다. 제4, 5호 지석묘와 같이 덮개돌이 들려 있으며 주변에서 석기 몇 점이 출토되었다.
  제7호 지석묘는 제6호 지석묘와 붙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북 방향으로 길이 220㎝, 너비 180㎝, 두께 60㎝로, 다른 것과 비교해 덮개돌 위에 잡석이 많이 쌓여 있어 정확한 외형을 파악할 수 없다.
  제8호 지석묘는 제7호 지석묘의 동쪽으로 2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246㎝, 너비 148㎝, 두께 43㎝로 괴석이 약간 노출되어 있다.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5° 정도 기울어져 있으며 지형에 의해 남쪽으로 약 1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제9호 지석묘는 제8호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15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덮개돌의 장축방향은 남에서 서쪽으로 약 15° 정도 기울어져 있다. 길이 328㎝, 너비 174㎝, 두께 6㎝로 동쪽이 서쪽보다 얇다. 제1호와 같이 멀리서 쳐다보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서 돌도끼가 발견되었다.
  제10호 지석묘는 제4호 지석묘에서 북쪽으로 6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23㎝, 너비 134㎝, 두께 25㎝로 불규칙하고 마름모꼴이다. 그 밑에는 10∼30㎝ 정도의 할석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장축방향은 동서에서 북쪽으로 35° 가량 기울어져 있다. 지석묘군 가운데 가장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3) C지구 지석묘

  원터부락 미륵당으로부터 간선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500m 지점에 고속도로로부터 약 10m 떨어져 동서 450㎝, 남북 500㎝, 높이 150㎝의 괴석이 있는데, 바닥이 비교적 평탄하여 받침돌이 없는 무지석식 지석묘이다.

  4) D지구 지석묘

  경부고속도로의 구 서울톨게이트의 남쪽 100m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50m 떨어져 동서 방향으로 1기가 매몰된 채 발견되었다. 덮개돌은 길이 230㎝, 너비 180㎝, 두께 50㎝로 대부분이 묻혀 있고 동쪽면만 드러나 있다.

  원지동 지석묘군의 특징은 제1, 9, 10호와 같이 외형이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석기들은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매우 원시적인 모습으로 타제수법에 의해 거칠게 다듬어졌으며, 석질도 석기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날부분이 모두 마멸되어 있었다. 또한 돌칼류는 수확도구로서 손잡이용 끈을 묶기 위해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청동기시대 전기에 주로 사용된 장주형(長柱形)과 즐형(櫛形)의 구멍없는 반월형 석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발견된 돌도끼는 청동제의 도끼를 모방한 형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조사된 지석묘의 형태와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의 형태와 보아 원지동의 지석묘들은 초기 단계의 남방식 지석묘로 추정된다.
  또한 B지구의 제4, 5, 6, 7, 8호의 지석묘군이 동서로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제6호 지석묘를 가운데에 두고 나머지의 지석묘가 이를 호위하듯이 붙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제6호 지석묘가 신분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의 묘였을 가능성이 있다.

 【집필자】 編輯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