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20190916]창립 100년 맞이한 안양 좋은집

안양똑딱이 2019. 9. 13. 18:59

 

북쪽으로는 관악산과 삼성산, 서쪽으로는 수리산, 남쪽으로는 청계산과 백운산 그리고 모락산과 오봉산이 둘러싸고 산자락 샘터에서 떠난 물줄기가 흐르는 산본천과 당정천, 왕곡천과 오전천 그리고 갈현천과 청계천이 합쳐진 학의천(옛 인덕원천), 삼성천과 삼막천, 수암천과 삼봉천 등의 여러 지천들이 모인 커다란 물줄기 안양천(갈천-사근천-기탄-대천)이 흐르던 옛 잉벌노현(금천현.과천현->시흥군->과천.군포.안양.군포.의왕시)은 사람 살기에 아늑하고 아기 키우기에 좋았던 곳이었나 봅니다. 편안할 안(安)자와 기를 양(養)자를 지명으로 쓰는 안양에 3개의 보육시설(기독보육원, 평화보육원, 안양보육원)이, 의왕에도 1개의 보육시설(명륜보육원)이 둥지를 틀었으니 말입니다.

그중 1936년 안양2동에 안양천변에 둥지를 튼 좋은집이 지난해(2018년 5월 25일) 10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입니다.

안양의 역사를 볼때 좋은집의 100년은 매우 중차대한 사건인데 정작 지역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채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뒤늦었지만 좋은집에서 100년을 맞아 발행한 소식지 DBF파일(좋은소리 2018 -100주년 기념호)을 입수했습니다. 소식지에는 창설자 오긍선박사의 이야기가 주로 실려있지만 1930-50년대 옛 사진들도 담겨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좋은집의 주요 연혁을 보면
1918.12. 25 창설자 오긍선박사가 남대문시장에서 혹한과 기아에 허덕이는 고아 7명을 자택에서 수용 구호(1대원장 / 1대 이사장)
1919.01. 일제에 항거하는 혁명투사의 자녀도 함께 구호함을 목적으로 경성고아구제회 조직
1919.03 경성보육원 설립
1936.09 현 위치인 안양으로 이전(안양 기독보육원으로 시설명칭 변경)
1981.07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으로 명의 변경
1998.03 해관보육원으로 시설명칭 변경
2007. 05. 10. 좋은집으로 명칭 변경
등인데 일부 주요 시건들이 빠졌네요 
#보육원 부지 일부를 해송재단(양명고.양명여고)에 매각한 기록이 없네요.
#수익 사업을 위해 1980년대 안양예술로 지하차도 인근에 수영장, 골프장을 조성한 기록도 없음  

 

 

 

 

 

 


100년의 사랑을 품은 ‘좋은집’(소식지 발췌)


창립 100주년을 맞은 좋은집, 2018년 예술공원로 52번길 언덕 위에 벽돌색 지붕의 하얀 건물이 성곽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하는 울타리이면서 또한 ‘좋은집’의 사무공간이지요. 아이들을 돕기위한 모든 행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너머, 울타리 안에는 푸른 잔디밭과 놀이터, 운동장, 컴퓨터실, 도서실, 예배실, 미용실 등 편의시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뜰 안엔 사계절 꽃들이 피어나고, 하얀집 지붕에서는 동화속 그림처럼 천사가 나팔을 분답니다.
2018년, 올해도 ‘좋은집’ 마당엔 벚꽃이 하얗게 꽃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소년들은 운동장에 나가 힘껏 공을 차고, 삼삼오오 모여서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바이올린을 켜고, 빨간 미끄럼틀에는 어린아이들의 웃음과 행복한 지껄임이 새들의 노랫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 좋은집에는 현재 69명의 대가족이 모여 삽니다. 장난꾸러기 유치원생들부터 대학 진학과 취업을 걱정하는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 함께 미래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입니다. 더불어 사회복지사, 간호사, 영양사, 임상심리상담원 등 전문인 38명이 그들의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좋은집에서 성장하여 사회에 진출한 가족은 약 3천여 명 정도입니다.
설립자인 오긍선 할아버지는 자립 후 혼자서 살아가게 될 아이들에게 직업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무척 애를 쓰셨다고 합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지금도 ‘자립지원프로그램’에 역점을 두고 연령별, 영역별 다양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내심리치료실을 운영, 외부전문기관과 연계하여 정서 안정과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심리정서 지원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 중이며, 인성교육, 아동개별 맞춤형 학습지도 및 예·체능 활동도 적극 지원합니다. 또, 지역사회교류프로그램 활성화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안전교육도 실시합니다. 돈을 관리하는 방법도 가르치고, 다양한 체험을 위해 여러 캠프에도 참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립 후에 건강, 마음, 시간, 경제 등을 잘 관리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사회복지시설평가 결과 6개영역 전체 “A” 등급을 받아서 최우수 시설로 선정, 운영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집의 제일 큰 힘은 후원자, 자원봉사자들의 따뜻한 시선과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그분들 덕분에 성탄절 해피트리에도 풍성한 열매가 열립니다. 좋은집 가족들은 그분들을 통해 사랑을 주는 법과 받는 법을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100년 동안 그 사랑을 견고하게 품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발간사]오경인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 좋은집 원장


한 세기를 이어 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동복지시설 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는 5월 25일은 우리 좋은집이 설립된 지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1918년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어 전쟁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국 사회복지계에서는 처음으로 한 세기를 이어 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동복지시설 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선각자로서 미국에서 서양의학을 배우고 돌아온 한국인 최초의 양의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였던 창립자 해관 오긍선 박사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그 밑거름이 되었고 정부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은 물론,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속적으로 우리 아동들을 후원하고 도와주신 수많은 후원자 및 봉사자들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박봉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랑과 소명의식으로 우리 아동들을 위해 헌신해 온 좋은집 임직원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좋은집은 경성보육원으로 시작하여 안양기독보육원(1936년 안양 이주 후), 해관보육원, 좋은집으로 비록 그 이름은 바뀌어 왔습니다만 100년의 역사 속에 기독교 사랑의 정신은 변함없이 면히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계승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좋은집 임직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양육시설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사랑하는 아동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올곧고 아름답게 자라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 그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사회에 되돌려 줄 수 있는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그동안 저희 좋은집을 믿고 아낌없는 노고와 성원을 보내주신 후원자 및 자원봉사자 등 여러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성보육원-안양기독보육원-해관보육원-좋은집의 100년 발자취

1918. 12. 25
추운 겨울, 갈 곳이 없어 떠돌던 아이들

남대문교회 김병찬 장로가 그가 소유한 집에 고아들을 데려다가 보살펴 주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긍선은 김병찬, 윤치호, 김일선, 송덕수와 뜻을 모아 정
식으로 사회사업을 벌이기로 하였다. 공익과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고아원을 공익법인화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데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여 우선 경성고아구제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3.1 만세운동(1919년) 이후에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은 더 많아져서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할 만큼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1920년 2월 경성고아구제회가 조직되었으며, 1922년 5월에 김병찬, 김일선,오긍선, 윤치호 등이 임원으로 참여한 재단법인 경성보육원(《 좋은집》의 전신)이 설립되었다.
첫 이사장직은 윤치호가 맡았으나 항일활동으로 보육원 사업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그는 1933년 12월 13일 일기에 “나는 이름뿐인 이사장(onlythe nominal president of the Bd. of Directors)이고 실제로는 오긍선이 대부분의 일을 다 하였다.”라고 썼다. 그의 말처럼 경성보육원의 실질적인 경영은 오긍선이 도맡다시피 했으며, 2대 이사장이 되었다.
경성보육원은 처음에 11명으로 시작했는데, 찾아드는 아이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서대문 밖 옥천동에 있는 언더우드 소유의 대지 3천여 평과 가옥을 좋은 조건으로 매입, 이주하였다. 시세의 절반에 10년간 분납하는 조건으로 보육원을 마련하게 된 데에는 오긍선의 노력이 주효하였다.
1927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오긍선은, 남대문교회 김병찬장로가 추운 겨울에도 갈 곳이 없어 남대문 시장 주변을 떠도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데려다가 돌봐주었는데 경성보육원
은 이를 모체로 세워진 것이라고 하였다.
김병찬 장로는 6.25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1936. 09.
안양으로 이전, 안양기독보육원으로 명칭을 바꾸다

경성보육원의 규정은 원아들이 15세가 넘으면 보육원을 나가 자립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에 나와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오긍선 이사장은 보육원 설립 당시부터 강당, 숙소, 진찰실, 병실, 목욕탕 등을 갖춘 시설을 짓고 원아들에게 농사, 양돈, 양토, 원예 등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36년, 안양에 8만여 평 부지를 구입하였다.
1936년 9월, 현재의 자리(예술공원로 52번길 46)로 이전, 《안양기독보육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원아들이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도록 하기 위해 단독주택을 여러 채 짓고, 보모(현 생활지도원) 중심으로 가족을 이루어 자유롭게 커 가도록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시설운영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때로는 원을 폐쇄해야 할 정도의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다. 일제는 식량과 세금을 터무니없이 요구했다.
1949년 CCF (Christian Children's Fund, 기독교 아동복리회, 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서 잠시 형편이 호전되었다. 2번에 걸쳐 공로표창(1949년 5월:사회부장관, 1949년 10월:보건사회부장관)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1952. 09. 그 후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터전으로 돌아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피난을 가지 못했으나 1.4후퇴때는 거제도 근처 가덕도로 피난했다. 그때 보육원에는 70여 명의 아동들과 직원 등 모두 1백여명의 식구가 있어 한꺼번에 피난할 수 없었다. 아동과 직원들을 3개조로 나누어 부산까지 가도록 일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온 1진 40여 명을 남해안 가덕도에 수용하고 2진, 3진을 기다리던 중 2진은 구걸행각을 하며 뒤늦게 찾아왔지만 3진은 소식이 없었다.
나중에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길이 막혀 미처 보육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3진은 폭격을 당해 20여 명의 아동들 모두가 희생되었다. 어린 아동들의 희생에 대해 오긍선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자책했다.

“평생에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1.4 후퇴 때 안양에 남아 있던 30명 아이들 가운데 20여 명을 폭격에 잃은 일이다. 그 당시 70여 명 아동의 후송길이 끊겨 조바심치고 있는데 세 패로 갈린 원아들은 걸어서 부산까지 오기도 했고 중간에서 자리잡기도 했으며 안양에 발이 묶인 한 패는 폭격을 당해 20여명이나 되는 친구를 잃어 애처로웠다. 이다음 나도 죽으면 그 원한의 고혼들이 묻힌 보육원 뒷산에 묻히고 싶다.(1962년도 소파상 받은 후 기자 회견담)”

휴전 회담이 진행되면서 서울로의 복귀가 허가되자 1952년 9월, 오긍선 이사장은 60여 명의 아동들을 데리고 안양으로 돌아왔다. 1.4 후퇴 때 데려가지 못해 희생당한 20여 명의 어린 유골을 찾아 묻어주었다.

보육원은 폭격을 당해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좋은 땅이 남아 있었다. 그는 즉시 계절에 알맞는 농작물 재배를 계획했다. 양배추, 보리, 무우 등 여러 가지 농작물이
재배되었다.
서둘러 복구작업도 시작했다.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외국에 있는 지인들과 인근 미군부대에 도움을 청하였다. 손수 타자기를 이용하여 일일이 직접 편지를 써서 보냈다.
간곡한 부탁을 담은 영문 편지가 하루에 수십 통씩 후원자들에게 보내졌고, 외국의 구호기관과 미군부대에서는 구호물자와 금품을 보내왔다.
1952년 말에 보육원 건물 일부를 완공하였으며, 1953년 8월에 생활관 5동, 사무실 1동, 양계장 2동을 신축했다. 주한 미군 8군단 45공병단(단장 ‘죠지 엔 커블러’)에서도 건물 1동을
신축해 주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의무실을 신축했다.
도움을 준 외국기관과 국내외 인사들에게 아동들이 편지를 쓰면 오긍선 이사장이 직접 번역하여 타이프를 쳐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지어진 건물들엔 후원, 기증해 주신 분들
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 그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지졌지만 〈 클락크사〉, 〈미세스 클락스사〉는 현존한다. 2010년, 2012년에 증 개축을 해서 예절관, 자립관으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
교회 건물 공사를 끝마친 다음, 1명의 보모 아래 14~15명의 아동들이 한 집에서 가족적인 형태로 생활할 수 있는 제도를 다시 채택하였다. 한국 최초였다. 이 제도는 아동들이 시설
에서 집단적으로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아닌, 가정에서 생활한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오긍선 이사장은 제6회 소파상을 수상하였는데, 상장의 기록을 보면 1962년, 안양기독보육원에는 남자 81명, 여자 71명, 합해서 152명의 아동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 120명이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생 60명, 중학생 35명, 고등학생 25명이었다.
1977년 이후부터는 좋은 양육환경 조성을 위한 신축이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강당과 사무실 99평, 1978년 8월에 아동 숙사에 연탄보일러를 설치했다.
한편 1981년에 정관 변경으로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 기독보육원으로 개칭했다. 해관(海觀)은 ‘인류를 생각하며 온 세계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오긍선 설립자의 호이기도 하다.
1982년 7월에는 식당·목욕탕·이발소, 1986년 5월에 빌라식 아동숙사 268.65평을 신축하고 급수장도 2.1평 증설했다.
1996년에는 생활관 2동(8개 숙사), 교육관(사무실 및 강당) 1동을, 2003년 5월에는 미용실을, 2005년에는 본관을 신축했다. 2010년에는 예절관(구, 클락크사), 2012년에는 자립체험관(구, 미세스 클락크사)을 증 · 개축했다. 2011년에는 심리치료실을, 2014년과 2017년에는 실외와 실내에 체력 단련장을 각각 설치했다.
1998년에 해관보육원, 2007년에는 좋은집으로 시설명칭을 변경했다. 〈좋은집〉은 아동들의 투표로 결정된 이름이다.
설립 후의 임원 개선은 설립자 오긍선 박사의 타계로 인한 오진영 씨의 이사장 취임(1963년), 오진영 이사장의 타계로 인한 오장근 씨의 이사장 취임(1981년)이 있었다.
2002년 4대 이사장으로 구혜경, 2010년 7대 원장으로 오경인이 취임, 2018년 현재까지 그 직을 수행하고 있다.

 

100년의 시작 오긍선 박사의 삶

오긍선은 제6회 소파상을 수상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오긍선은 소파상 수상 소감을 ‘고마와요 고마워……’라는 말로 대신하고 그의 아들로 자라난 수많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떳떳이 일하고 또 그들의 자식들이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정성을 들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소박한 수상 소감이었다.

설립자 오긍선 박사는 명예와 사리사욕을 초월한 사회사업가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천애의 고아들을 위해 노후의 모든 정열을 쏟은 봉사자였다. 그런 그에게 1962년 11월 15일, 소파상이 주어졌다. 소파상은 한국에서 어린이 보호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소파(小波) 방정환을 기념하여 새싹회에서 1957년에 제정한 상이다. 고아들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고 있던 오긍선은 제6회 소파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그 상을 받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오긍선은 ‘고마와요 고마워……’라는 말로 수상 소감을 대신하면서, 그의 아들로 자라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떳떳이 일하고 또 그들의 자식들이 같은 불행을 겪지 않아도 되는 날을 위해 정성을 들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소박한 수상 소감이었다.

오긍선에게 소파상이 주어지자 각 매스컴에서는 ‘고아와 울고 웃은 반평생—돈과 권세도 끝내 외면하고’(조선일보), ‘62년도 소파상—고아의 아버지 오긍선 박사’(한국일보), ‘고아들의 산타클로스 오긍선 박사’(서울신문) 등의 제목으로 대서특필해 그의 수상을 축하하였다. 어느 신문에서는 사설을 통해 「오긍선 박사는 진실한 자선가다—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애국의 표본이다」라고 까지 극찬하였다.

독립협회에 가입 협성회보 창간위원으로 활약

오긍선은 1878년 10월 4일, 충남 공주 사곡면 운암리에서 태어났다. 10세부터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받았고, 이러한 영향으로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면서도 동양고전을 읽고 또 옛 성현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다.
1896년 초, 관직에 나가게 되어 경성으로 올라왔다. 이후 아관파천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나라의 앞날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배재학당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 주시경 등과 함께 협성회보 창간위원으로 활약하여 두 차례 서기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친러 성향의 인사들과의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독립협회는 온갖 시련을 겪었고 1898년 12월 25일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신흥우, 안창호, 오긍선 등 신진청년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독립협회의 부활과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만민공동회 집회를 계속해서 개최했다. 고종황제는 이러한 활동을 공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 집회를 주동한 자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오긍선은 체포령을 피해 충남 공주에 있는 스테드만(Frederick W. Steadman) 선교사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때 이미 오긍선은 아펜젤러에게 기독교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처럼 남을 도우며 살고 싶어서…

사태가 잠잠해지자 다시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당에서 학업을 마쳤다. 서울의 좋은 일자리를 얻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지만 선교사들처럼 남을 도우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그때, 오긍선의 뛰어난 자질과 책임감을 높이 평가한 알렉산더(A. J. A. Alexander) 선교사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를 따라 1903년 2월 초 미국유학을 떠났다.
선교사들과 생활하면서 익힌 영어 실력으로 곧바로 켄터키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 of Kentucky, Danville, KY.)에 진학할 수 있었다.
켄터키 센트럴대학에 입학하여 첫 학기에 아카데미과정을 이수하고 두 번째 학기, 정확히 말하면 1903년 12월 8일부터 루이빌 캠퍼스(Hospital College of Medicine, Louisville, KY.)로 가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유학하는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신문 배달, 식당에서 접시 닦기, 담배공장 종업원 등으로 일을 하였다. 동양인이 많지 않았던 미국 사회에서는 그를 중국인으로 오인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친친 차이나’라고 불렀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라 흑인같은 취급을 받은 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매 주일 교회에 나가는 것을 쉬지 않았으며, 부모님께도 매주 한 차례씩 안부편지를 썼다.
2학년이 되어 임상실습 직전에 면담을 통해 피부과를 선택하였다. 피부과학의 권위자인 헤이(John Edwin Hays)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두 학기 동안 루이빌 시립병원에서 임상 실습을 하였다.

미국 남장로회의 한국파견 의료선교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다 

오긍선은 스물다섯에 시작한 유학을 서른에 마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그리고 1907년 11월, 미국남장로회의 한국 파견 의료선교사가 되어 귀국길에 올랐다.
그의 귀국은 공주와 군산 일대의 환영과 축하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순종황제는 황실의 전의로 입궁할 것을 요청했고, 일제통감부는 관립 대한의원에서 근무해 주면 좋겠다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모두 거절하고 군산 ‘야소병원’의 다니엘의 조수로 일했다. 그렇게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약 80여명의 의료선교사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야소병원은 미국 남장로회가 첫 번째로 세운 병원인데, 군산사람들은 궁멀병원, 구암병원이라 했고 선교사들은 ‘앳킨슨 기념병원’이라 불렀다. 한옥건물 안에 진료소와 수술실, 그리고 2개의 병동에 18개의 병상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다니엘, 케슬러와 힘을 합하여 의사가 되고 싶은 3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또한 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군산항 근처에 진료소를 열고 오전과 오후로 나눠 진료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구암교회당에서 실시하고 있는 일요학교를 확대하여 소학교 과정을 개설하였다. 학교의 이름은 자신의 유학을 주선하여 준 알렉산더를 기념하기 위해 “안락학교”로 정하였다.
1908년 11월에는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목포 야소병원 책임자로 부임했다.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일 외에도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을 순방하며 진료하는 일을 겸
해야 하므로 무척 고된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특히 영흥학교를 중심으로 자주독립과 신학문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9년 5월, 목포에서 군산으로 다시 복귀한 오긍선은 중학교 과정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장으로서 학교의 기틀을 세우고 교육과정을 새 학교령에 맞춰 정규 학교가 되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인 3역, 4역을 하며 안락학교와 영명학교에서 봉사하였다. 특히, 영명학교에서는 교장직 수행은 물론 직접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귀국 직후부터 5년여 동안 군산, 목포 등지에서 전개한 그의 의료사업은 선교본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의료사업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의료선교사 중 한국인은 그가 유일했다는 점도 작용하였지만, 그가 가진 순박한 봉사 정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의료선교사들과는 달리 청소년을 위한 교육 사업을 함께했다는 것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세브란스에 부임한 첫 번째 한국인 교수

한창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에 전념하던 오긍선에게 미국 남장로교 의료진을 대표하여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로 옮기라는 선교부의 결정이 내려졌다.
1913년 5월 12일 세브란스에 부임한 그는 해부학 강의를 맡았다. 한국인으로 정식 교수로 임용된 첫번째 인물이다.
당시 세브란스에는 에비슨 교장을 비롯하여 필드(Eva Field), 웰스(James H. Wells, 우월시), 샤록스(Alfred M.사락수), 밀스(Ralph G. Mills, 마일서), 허스트(Jesse W. Hirst, 허시태) 등이 강의와 외래 진료를 맡고 있었고, 그와 같은 시기에 들어간 반버스커크, 커렐, 맥라렌, 다니엘 등이 강의와 부서의 일을 분담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학습 이해력을 높이는 데는 단연 오긍선이 최고였다. 그는 피부과학 교수로 부임하였지만,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등 미국인 임상교수들이 분담하여 가르
치던 것을 도맡아 가르쳤으며, 내과학, 외과학, 임상학의 보충 강의까지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부임 첫해에 ‘세브란스의 백과사전’이란 별명을 얻었다.

동경제국대학에서 유학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국권침탈에 성공한 후 조선총독부를 통해 식민지화를 추진하였는데 1차로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대해서 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일본 문부성이 인정하는 학위를 가진 교수만 사립 전문학교 교수로 임용할 수 있도록 해서 고등교육기관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인정하는 학위에 미국 학위는 포함되지 않았다. 오긍선은 개정된 법령 적용의 제1차 대상자로 지목될 형편에 놓였다.
에비슨에게 동경유학 의사를 밝혀 동의를 구한 후 그는 1916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갔고, 동경제국대학 도히(土肥) 교수의 연구실에서 피부비뇨기학을 연구하였다. 비록 외부적 요인에 의해 시작한 연구였지만 동경제국대학에서의 1년은 그의 학문적 성숙과 새로운 의학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동경 체류 기간에도 일본 관헌들의 감시를 받았으며, 항상 미행을 당하였다. 정치활동과는 전혀 무관한 그를 요시찰 대상으로 올려놓고 감시를 한 것은 당대의 지성인인 그의 영향
력 때문이었다.

한국 최초로 피부비뇨기과 교실을 시작

1년간의 연구를 마치고 1917년 5월에 귀국,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피부비뇨기학과장 겸 주임교수가 되었고, 한국에서 최초로 피부비뇨기과 교실을 시작하였다.
이는 한국 의학의 교육사적 의미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세기 전인 1900년대 초 국내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역사적 의미가 더해진다.
1917년 당시는 기미독립운동이 발발한 1919년 직전으로 사회가 극도로 큰 소용돌이에 휩싸여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도 피부과학교실의 기초를 다지고 이끌었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차원의 나라 사랑을 뜨겁게 느낄 수 있다. 이는 당시 나라 걱정을 하던 우국지사들이 교육만이 이 나라를 다
시 찾는 길이라고 믿고 묵묵히 육영사업에 전력한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연세’의 초석을 놓은 첫 한국인 교장

1920년 3월, 에비슨 교장은 오긍선 박사를 학감에 임명하고 학사행정 대부분을 맡겼다. 1929년 8월에는 의료선진국을 시찰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때 그는 구미 의학계 시찰 및 연구 여행으로 의학자로서의 권위를 높였을 뿐 아니라 서유럽 의학계에 관하여 생소하였던 한국 의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4년 4월 17일, 오긍선 박사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2대 교장이 되었다. 당시 교장을 맡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면서 세브란스병원의학전문학교는 학교의 존립마저 위협을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선교사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 교수를 임용하도록 강요, 세브란스에서 기독교 정신을 뿌리째 뽑으려고 하였다. 오긍선 박사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자격 있는 한국인 교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각 과 주임 자리에 한국인 교수를 앉히려고 공을 들였다. 연구시설의 확충 및 도서실을 완비함으로써 세브란스를 교육 및 연구 중심 의학교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오긍선 박사의 노력으로 세브란스는,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훼방과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미국인 교수 전원이 강제추방 당하는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지켰다. 미국계 교수들이 전원 본국으로 돌아간 1940년 말엽에는 우리나라 교수들이 학교와 병원을 석권했다.
그는 재임하는 동안 각계 인사들로 세브란스의전 후원회를 결성, 모금한 기금으로 기초학 교실을 신축해서 향후 대학의 발전을 예비하는 기초를 놓았다. 또한 부지 2만여 평을 구입해둠으로써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을 병합하여 연세대학교를 발족시키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가 당시 연희전문학교 인근에 21,000평의 의과대학 부지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세브란스 병원 설립기금 기증자인 세브란스의 2세 세브란스(John L. Severance)가 1936년에 33만 달러를 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조병학(趙炳學)으로부터 경기도에 있는 토지 60만평을 재단기금으로 희사 받는(1941년) 등 다른 독지가들이 세브란스의전에 제1회 세브란스의전 동창 의학강습회(1936.2.8.) 기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긍선은 세브란스의전 교장 말년(1942) 일제에 의해 ‘아사히(旭)의학전문학교’로 바뀐 교명 간판을 정문에 걸고, 그해 8월(65세) 자신이 정한 정년퇴임 규정을 실천하여 교장직을 이영준에게 인계하고 물러났다.

의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개인의 영리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오긍선은 “의료가 축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개업의가 한 사람 늘면 그만큼 조선에 가난한 사람이 더 생긴다”고 했고, 한때 장남 오한영이 개업의 뜻을 비치자, “서양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청년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항차 우리나라 청년교육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개업을 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이라며 크게 책망한 일도 있다 한다. 이러한 조부의 가르침에 따라 손자 중근과 장근도 공직을 은퇴한 후 개업을 하지 않았다.

경성보육원, 타자 치는 할아버지

세브란스 의전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오긍선은 대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청년들과 함께 한 토요구락부, 고아들을 돌보는 보육원 사업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배재학당
시절 체험하였던 토론회를 떠올리며 만든 토요구락부는 모임에 함께 하는 청년들의 정체성과 세계관 형성에 자극을 주었다.
남대문교회 김병찬 장로가 그가 소유한 집에 고아들을 데려다가 보살펴 주는 것을 보고 동참, 경성보육원을 설립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경성보육원은 초기에 거의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운영하였으나 법인 설립 이후부터 후원 참여는 사회각계각층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36년 9월에 경기도 안양으로 이전하였다. 규정상 15세가 되어 퇴소한 원생들이 사회 부적응 또는 불량소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 15세 이후에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사회에서 안양 이전을 추진하였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에서 퇴임한 오긍선 박사는 경성보육원(안양기독보육원 전신으로 현, 안양 ‘좋은집’) 이사장직을 맡아 수행하며 그 일에 전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보낸 특사로부터 미군정청 민정장관 제의를 받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입각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
때마다 “정치는 정치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라며 사양했다.
그는 정치에 일절 관여 하지 않겠다는 처음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과 사회사업연합회 회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 종교계와 사회사업 분야의 명예직만을 역임하면서 고아 양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자신의 의술로 아이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한편 부모 없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공부시키는 데 들어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손수 타자를 쳐서 작성한 편지를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과 단
체에 보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이 남침하였다는 소식이 있은 후 줄곧 정부당국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울 북방에서 북한 공산군을 격퇴시킬 수 있으니 국민 모두는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라고 시간마다 특별방송을 했다.
대다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 동안 안양에 있으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과 그들의 인해전술로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문을 듣고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00여 명의 식구가 한꺼번에 피난할 수 없어서 뒤늦게 출발한 20여 명의 아동들은 폭격을 당해 희생되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커다란 슬픔이었다.
오긍선 박사는 14세 되던 해에 다섯 살 위인 박현진과 결혼,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한영을 부산 피난 시절에 잃었다. 당시 장남 한영은 보건부장관직에 올라 격무를 견디
지 못하고 취임한 지 1년 3개월만에 사임하고, 그 두 달 후인 1952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달리한 것이다.
1952년 9월, 오긍선 박사는 가덕도에서 돌보던 60여 명의 보육원 아동들을 데리고 안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복구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1953년 8월에 어린이 숙사 5동과 교회당 건물 공사가 끝났다. 차츰 모든 것이 6.25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면서 그도 마음 놓고 보육사업에 정성을 쏟을 수가 있었다. 전문 재봉사를 두어 구호 의류들을 일일이 개조해서 아이들을 입히고, 타이프 앞에 앉아서 우방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보육원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타이프를 치고 있는 이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국내 최대의 보육원을 이룩한 이후에도 사무직원 한 사람 제대로 두지 않고 생애를 마칠 때까지 손수 업무를 처리하고 타자수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긍선 박사는 1963년 5월 18일 낮 10시 둘째 아들의 집에서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이 권하는 입원가료를 거절하고 며칠 동안 정신이 흐릿한 채 지내던 중 당일 아침에 “내 이 여관에 와서 오래 동안 신세를 많이 졌소. 나는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소” 하며 아무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삶과 죽음을 달관한 듯 웃는 모습으로 가
족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처럼 강인하고 선하게 오긍선은 자신의 공적에 대한 찬양이나 포상을 무척 꺼려하는 성격이었지만 여러 차례의 공로 표창과 세 개의 명예박사 학위가 주어졌다.
1955년 11월 19일, 서울의대에서 해방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의협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때 오긍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학계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의학 교육 공로상을 받았고, 심호섭은 국민보건 공로상, 윤일선은 학술연구공로상을 받았다. 일제 때 세브란스를 이끌었던 3인의 주역들이 함께 표창을 받아 더욱 감격스러웠고 참석자들도 흐뭇해 하였다. 1962년 11월 15일에는 제6회 소파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이 소파상이 그의 생애에 마지막으로 수여된 상이었다. 그가 떠나고 석 달 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공로상이 주어졌다. 1963년 8월 10일 정부는 우리나라 교육문화 창달에 공적이 많은 인사들에게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국민장, 문화포장을 수여하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고 오긍선 등 7명에게 최고상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긍선은 그해 8월 15일 광복 18주년 기념식에서 영광의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977년, 연세대학교에서는 해관 오긍선 선생 탄생 1백년을 맞아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피부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들을 초청해 〈해관 오긍선 선생 기념 학술강연회〉를 시작했다. 1985년 10월 5일엔 연세대 교정에 오긍선 박사 동상이 제막되었다. 1998년 2월 27일, 망우리 공원묘지에 애국지사와 유명인사들의 연대기와 좌우명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는데, 독립운동가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서광조, 오재영, 유상규, 박인환 선생 등과 함께 오긍선 박사의 이름도 새겨졌다.
그는 수난의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이름처럼 강인한 의지와 소신을 가지고 지혜롭게 처신하며(兢), 항상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았다(善). 이와 같은 삶은 일찍이 신학문에 눈을 뜨고, 또 의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세워 미국 유학에 나섬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개화기의 선구자로 기억될 만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의학의 대중화를 꾀하여 사람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는 한편 사회사업을 통하여 고아와 무의탁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에 진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