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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의왕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

안양똑딱이 2019. 5. 22. 16:05

의왕시는 경기도 중서부에 있으며 면적은 53,986㎢(경기도의 0.5%) 인구 15만 6,763명(2016년 12월)의 아담한 전원도시이다.

시의 경계는 6개 시군과 접하고 있어, 동쪽은 성남시 용인시, 서쪽으로 안양시 군포시, 남쪽으로는 수원시 안산시, 북쪽으로는 과천시와 접하고 있으며, 시청소재지는 고천동에 있다.
의왕시는 인구밀집 지역인 아파트나 주택지역이 청계산 줄기의 백운산과 모락산, 오봉산으로 이어지는 산 자락에 휘돌아 감겨있어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산은 청계산, 백운산(567m), 바라산(428m), 모락산(385m), 오봉산(205m)으로 이어져, 작고 아담한 산들로 이우러져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안양천(安養川)과 학의천(鶴儀川) 청계천 학현천(鶴峴川) 등이 있고, 백운호수와 왕송호수 등은 관광휴양지로서 유명하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모락산에는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묘와 사당이 있으며,청계산에는 고려 충신인 조견이 송동를 바라보면서 애통해 했다는 망경대(望京臺)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가문인 왕곡동(旺谷洞) 청풍김씨(淸風金氏) 재실에는 검재 김유 선생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17, 현재 경기도박물관 위탁)이 있고, 청계사에는 청계사소장목판(淸溪寺所藏木板, 경기도 유형문화재 135)이 있으며, 청계산에서 백운호수에 이르는 길은 과천 서울대공원과 연결되는 전국순례자연경관도보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 의왕 역사

· 1895년 광주목에서 광주군으로 개칭
· 1914년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을 통합, 수원군 의왕면으로 변경
   왕륜면(旺倫面)
   내왕륜(內旺倫), 오마동(五馬洞), 오주동(全朱洞), 내곡동(藤谷洞), 평사천(坪沙川), 통산동(通山洞), 곡사천(谷沙川), 고정동(古井洞), 고고리(古古里), 내곡동(內谷洞),
   징계동(澄溪洞), 교동(校洞), 가동(柯洞), 묘동(墓洞), 신촌(新村), 궁촌(宮村), 창촌(倉村), 신기촌(新基村), 괴동(槐洞), 상장의(上莊義), 하장의(下莊義)
   의곡동(儀谷面)
   학현동(鶴峴洞), 의일외동(義逸外洞), 의일내동(義逸內洞), 손동(蓀洞), 포일동(浦一洞), 포이동(浦二洞), 상청계동(上淸溪洞), 하청계동(下淸溪洞)


참고

월암리와 초평리는 안산군(安山郡)의 월곡동(月谷面)에 속하였으며, 지명은 월암리(月岩里)와 상초평(上草坪)과 하초평(下草坪)이었다.
1912년 현재 안산군(安山郡) 월곡면(月谷面) 월암리(月岩里)에는 월암동(月岩洞), 일이동(一里洞), 대대동(大垈洞)이 있었다. 초평리(草坪里)는 상초평과 하초평이 있었다.


· 1915년 현재 의왕면 행정구역
   학의리(鶴儀里 : 학현동, 의일외동), 포일리(浦一里 : 포일동, 포이동, 갈산동), 내손리(內蓀里 : 갈산동, 손동, 의일내동), 청계리(淸溪里 : 상청계동, 하청계동),
   오전리(五全里 : 오마동, 전주동, 등곡동), 이리(二里 : 창촌, 징계동, 교동, 가동, 묘동, 신촌, 궁촌, 신기촌), 왕곡리(旺谷里 : 내왕륜, 곡사천, 통산동), 삼리(三里 : 상장의, 하장의, 괴동),
   고천리(古川里 : 고정동, 평사천, 고고리, 내곡리)
· 1924년 현재 의왕면 행정구역
   왕곡리(旺谷里), 오전리(五全里), 고천리(古川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학의리(鶴儀里), 내손리(內蓀里), 포일리(浦一里), 청계리(淸溪里)


참고

초평리(草坪里)와 월암리(月岩里)는 수원군(水原郡) 반월면(半月面)에 속함


· 1936년 수원군 일형면(日荊面)과 의왕면을 합하여 일왕면(日旺面)으로 개칭
· 1949년 화성군(華城郡) 일왕면으로 변경
· 1963년 시흥군(始興郡) 의왕면(儀旺面)으로 변경
· 1980년 시흥군 의왕읍(儀旺邑)으로 승격
· 1983년 초평리와 월암리가 시흥군 의왕읍으로 편입, 의왕읍 동부출장소 설치
· 1989년 의왕시(儀旺市)로 승격
· 1993년 시청소재지 변경
· 2003년 12월 행정동고천동(고천동, 왕곡동) 부곡동(이동, 삼동, 월암동, 초평동) 오전동(오전동) 내손1동(내손1동) 내손2동(내손2동, 포일동) 청계동(학의동, 청계동)
· 2007년 의왕시 한자명칭 변경 (儀旺市 ⇒ 義王市, 법률제8244호)

 

의왕의 지명유래

의왕시의 유래는 광주목에 속했을때 의곡면의 의자와 왕륜면의 왕자를 따서 의왕면이라 하였습니다.

 

● 청계동

<여지도서>의 광주 의곡면은 1리와 2리로 구분되어 있고 더 이상 세분된 마을명이 나타나지 않으나 그후 광주 의곡면은 손동, 갈산동, 포우동, 청계동, 학현, 어일리로 되어 있어 '청계동'이 등장된다. 이 청계는 아마도 현재 청계산을 옛날에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남한지>등 문헌이나 청계사사적기비의 기록에서 보듯 '일명 청계산'이라 하여 과천 관악산을 '우백호'라 칭한다면 '우청룡산'에 해당하므로 이 청룡산 계곡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이 靑溪 또는 淸溪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농골

청계마을의 '농골'은 봉담→의왕→과천고속도로 중 과천터널 바로 옆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을 말한다. 고속도로가 나고 터널이 뚫려 마을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으나 서쪽보다는 동쪽 남은 집들이 훨씬 많다. 이곳은 조선초기 음성박씨 후손인 박연 (진안 현감 역임)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여기서 은둔 생활을 하던 곳으로 아호가 노은이므로 '노은골'로 칭했던 점차 음운탈락과 변동으로 '농골'로 변한 땅이름으로 여겨진다.


● 옥박골

'옥박골'은 한직골에서 청계사로 가는 초입길 왼쪽에 오목하게 들어간 마을 이름이다.<始興郡誌>下(p. 986) 지명유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 죄인을 가두는 '옥(獄)'이 있었으므로 '옥박골'이라 했는데, 그후 옥이 철거되면서 그 주변 일대를 '옥터밭'이라 부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한직골

일석 선생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한직골'은 '한적골'이 변한 이름이라 하였다. 이곳이 옛날에는 마을이 없었던 곳으로 인덕원에서 광주쪽으로 가는 길목으로 한적한 곳이라는 의미로 '한적골'이었는데, 발음의 편의상 '한직골'로 부른다는 것이 다. 현재 청계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의 동남쪽 부근 망르이 바로 이 마을로 이곳에 전해지는 지명유래는 이곳은 예로부터 지대가 높아 논은 별로없고 들판이 사질토(沙質土)이므로 어떤 곡식도 잘되지 않고 가물면 이내 작물이 旱災를 입어 시들고 말라죽어 '한재골(旱災洞)'이라 흔히 불리어 왔는데 현재는 '한직골'로 통칭한다고 밝혀 있다.


● 하우개(원터마을)

'하오개'는 이 고개가 '학고개' 였으나 '학고개>하오개>하우개'로 음운변천에 따라 '하오개'또는 '하우개'개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성당이 있는 마을(청계13통)을 흔히 '하우개'마을로 지칭되기도 한다.


● 벌모루

넓은 들판 모퉁이 마을이란 뜻에서 한자지명으로 '포우리(浦隅理)', 고유어로는 '벌모루'라 칭한다.


● 성고개

벌모루와 이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주위가 마치 성을 에워싼듯한 형상으로 되어 있어 '성고개'라고 불렀을 듯하다. 이미 이 마을은 서울구치소와 성고개 마을 동북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이 말을에 큰 나무(느티나무) 두그루가 있어 마치 숲을 이룬 것과 같으므로 '임이(林二)'라 칭했다는 것이다.


● 학의동

1914년 4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하기 전에는 두 개의 큰 자연부락명인 학현동과 의일외동이 있었는데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두 지명의 첫글자를 각각 취하여 '학의리'로 개칭하게 되었다. 학현동은 크게 샛터말(미나리 골), 학현(웃말), 점말(아랫말)의 자연마을이 있고 학의2리에 해당하는 의일동은 '오른계, 속말, 북골, 양지말'로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다.


● 의일

현 의왕시 학의2동을 지칭하는 전통적 명칭은 '의일'이다. '의'를 발음할 때 단모음화시킨 발음을 대충 한자 '어'자로 취음 하여 표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능안마을(내손1리)

능안은 백운호수 서남쪽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의 묘지가 있는 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임영대군 묘자리가 묘지 후보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효종과 임영대군은 같은 왕족인 관계로 효종의 묘소를 여주로 다시 정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을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이라 일컬어 오게 되었다.


● 내손동

조선시대 광주군 의곡면의 의일내동, 손동, 가산동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군면동 통폐합시 '의일내동'의 '내'와 '손동'의 '손'자를 따서 '내손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내손리가 되었다. 그후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내손리, 다시 1949년 8월 5일 화성군 일왕면 내손리,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내손리, 1980년 12월 1일 의왕면 내손리, 1990년 1월 1일 의왕시 내손동으로 되었다. 현대 내손동은 청계동 관내의 능안마을과는 다른 내손동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 내손동은 과거의 '손골'과 '갈미'는 물론 '민백이'마을 및 포일, 대우아파트 단지를 관할하는 큰 취락을 관장하게 되어 행정동도 둘로 갈라 '내손1, 2동'으로 분동하고 있다.


● 오전동

오전동은 '오마동'의 '오'와 '전주동'의 '전'을 따서 1914년 지명 통폐합시 '오전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로 된후 현재의 '오전동'에 이르기까지 수원군 일왕면, 화성군 일왕면, 시흥군 의왕면, 시흥군, 의왕읍 등의 오전리로 되었다가 의왕시 오전동으로 발전해 왔다.

오전동은 선시대에 광주군 왕륜면의 오마동(五馬洞), 전주동(全朱洞)·등곡동(藤谷洞)의 여러지역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라 했다가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오전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로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오전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오전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오마동(五馬洞)의 '오'(五)자와 전주동(全朱洞)의 '전'(전)자를 따서 '오전동'이라 불렀으며, 오전동에는 가운데말·뒷골·등칙골·목배미·백운동·사나골·성라자로원마을·오매기·옻우물·용머리·전주남이 등의 자연취락이 있었다.

 

가운데말

사나골과 뒷골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오매기의 여러취락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운데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백운동 주민들은 이 마을을 '건너말'이라 부른다.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오매기의 자연취락중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용머리·뒷골·사나골·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뒷골(後谷)

백운동과 가운데말 사이에 위치해 있다. 가운데말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골'(後谷)이라 부르고 있으며 교하 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사나골·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등칙골(藤谷洞)

의왕중학교가 들어선 마을이다. 이곳 뒷산에 등나무가 많으므로 '등칙골'(藤谷洞)이라 부르고 있다. 등칙골은 전주이씨 근령군파(全州李氏 謹寧君派)후손인 이 용(李容 1565.10. 12∼1616. 1. 4, 자는 季偉, 通德郞을 역임)의 묘를 이곳에 쓴후, 그의 아들 이정집이 묘하에 살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마을에서 옻우물·전주남이 주민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1·2·3일 중에서 길일을 택해 이곳 뒤에 있는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목배미

용머리 남쪽 길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왕곡동 홍치골로 넘어가는 고개밑에 위치하고 있다. 인동 장씨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 앞의 논이 기름진 문전옥답(문전옥답)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길을 통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곤 했다.

 

백운동(白雲洞)

오전저수지(五全貯水池)밑에 있는 마을로 백운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백운동'이라 부른다. 경주 김씨와 광주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사나골·건너말(가운데말)·용머리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사나골(山岳谷)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1600년대 초에 문화류씨 하정공파 후손인 유 항(절충장군을 역임)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형성된 곳이다. 오매기 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산악(山岳)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산악골'이라 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사나골'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성라자로원 마을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광복 이전만 해도 이곳은 산야(山野)이었다가, 광복후 서울 세브란스의전 출신인 소진탁(蘇鎭卓)박사에 의해 폐결핵 요양소가 설치되었다. 그후 1952년 6월 2일 죠지캐롤 안주교에 의해 성라자로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누가복음〉(16, 19-31)을 보면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배를 채우며 살다가 얼마뒤에 죽어서 부활하여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내용에서 '성라자로 마을'이라 명명한 것이다.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인 포도원 입구에서 수원방면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동편으로 보면 '새삶의 예수'석고상이 있고 그 뒤로 십자가가 세워진 아치에는 성라자로원 마을 안내판이 있다. 성라자로원은 나환자의 조기치료와 보호 및 불구 그리고 노령환자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불구환자의 요양과 진료를 실시하고 라자로원 돕기 후원회와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성라자로원의 초대 원장은 이경재(李庚宰)신부로, 그는 1926년 2월 9일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하여 1951년 4월 3일 서울카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1951)신부가 된 후 해군 종군신부로서 임무를 끝내고 모두 다 외면하는 성라자로원을 자원하여 1952년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빈곤과 병고와 한숨만이 맞아주는 라자로원을 위해 헌신봉사한 공로로 1979년 12월 28일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성라자로원은 처음에는 1950년 광명시에 설립되었다가 1951년 7월 5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후 1971년 4월 3일 라자로 돕기 후원회가 발족되었고 10년 후인 1981년 11월 15일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에도 아론의 집(1984. 5. 8)과 불구노약자의 집(1986. 7. 14)등이 차례로 준공되었다.

 

옻우물

유한양행 옆(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광복 직후인 1948년까지만 해도 전주이씨 근령군파후손 2가구와 김씨등 모두 3가구가 살아오다 그후 성라자로원 관계자들이 거주하면서 6,7세대로 불어 났으나, 1969년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중엽, 이마을에 사는 이생원의 아들이 피부병을 앓아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했으나 효험이 없자 마침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더니 고맙다는 뜻으로 오전동 133번지에 우물을 파게 하였다. 그런데 사시사철 물이 잘 나와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특히 옻으로 인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는데 그 후부터 이 우물을 '옻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옻우물'로 했다고 한다. 이우물은 1970년대에 이르러 주변에 주택이 늘어서자 폐정되었으며, 현재는 삼창양행(三昌洋行)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전주남이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용머리(龍頭洞)

오매기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풍수로 보아 하천의 물 흐르는 형태가 이곳에 이르러 용의 머리처럼 휘돌아 가므로 '용머리'(龍頭洞)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용의 머리부분은 일제 말엽에 도로를 개설할 때 파손되었다. 이 마을은 광복 이전만해도 인동 장씨등 불과 서너 가구밖에 안되었다가 1960년대초부터 민가가 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사나골·건너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전주남이(全朱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전주동이라 불렀다. 등칙골과 오매기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중엽에 전주동이란 큰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을 부자가 박절하자 이에 화가 난 스님이 앙심을 품고 마을 뒷산에 혈(穴)을 끊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일러주자 이 말을 사실로 안 전주동은 스님이 일러준대로 산의 혈을 끊었는데, 그후 얼마가지 않아 망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은 전주동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전주남이'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옻우물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오매기(五馬洞. 五募洞)

오매기는 삼태기처럼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국가의 전란등이 일어나면 피난의 최적지였다. <구한명람> 및 <신구조명람>에는 '오전동'으로 기록.  본래는 전주남이 동쪽으로 고천에서 학의동이나 능안마을로 갈 때, 용머리, 산악골, 윗골, 가운뎃말, 백운동, 목배미, 뒷골, 배운산(백운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이 마을은 문화류씨를 비롯하여 문씨(文氏)·진씨(陳氏)·광주노씨(廣州盧氏)·마씨(馬氏)등이 각기 1막(一幕)씩을 짓고 살아 '오막동'(五幕洞)이라고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오매기(五馬洞)'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백운동·용머리·가운데말·사나골등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통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산악골

'산악골'은 오매기 마을 입구에서 장고개로 넘어가는 어귀 마을이다. 이 마을 이름은 이제까지 올바르게 알려져 있지 않다. 때로는 '산악골', '사낙골'로 기록하고 있다.


● 고천동

조선시대 광주군 왕륜면 평사면(벌사근네), 고정동(골우물), 고고리(고고리), 내곡동(안골)등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통폐합할 때 '고정동, 고고리'의 '고'자와 '평사천'의 '천'자를 따서 '고천'으로 통폐합하였다.


● 고고리

이 마을은 통미 건너편 현 과천-봉담 고속도로가 경수 산업도로와 교차하는 지점의 서편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자로 '고고리' 로 표기하느 자체가 이 마을의 유래를 얼른 알 수 없게 한다. '고고리'는 원래 '골골이 '에서 연유된 이름임이 거의 확실시 된다.


● 고우물

이 마을은 현 의왕시 남쪽 마을로 이 마을명의 유래는 실제 제보자의 제보에서도 확인되듯이 예전에는 이 마을이 위치한 오봉산 동남 골짜기에 우물이 있어 '골우물'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이 마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 의왕시에 대한 이름 고찰

'의왕시'는 조선시대가지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광주군 의곡면과 광주군 왕륜면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 역시 일제의 행정구역 통합정책에 의해 각각 머리 한자씩 취하여 지명이 완성되었는데 '義王'이 아닌 '儀旺'으로 둔갑되어 등장하였다.


● 백운산

백운산은 높이가 564m인 산으로 광수산에서 북서로 이어진 첫봉우리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와 의왕시 왕곡, 학의동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 모락산

모락산은 일명 '갈산(葛山)'이라고도 하면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의 능안과 갈미 및 오전동의 성나자로원과 오매기가 둘러 싸고 있는 높이 385m의 산이다.


● 고분재

고분재는 학의동(청계2통) 속말에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 지지대 고개

'지지대'고개는 의왕시 왕곡동(골사그네)에서 수원시 파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정조 임금이 수원 현륭원 원행에 취해진 거둥이 11차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로 3차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1월 26일 환궁하는 길에 잠시 쉬었다. 이때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발을 멈춰 경들을 소견하는 것은 환궁하는 자기의 발걸음이 차마 발을 속히 뗄수 없는 심정 이므로 더디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라고 애틋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곳을 '지지대'라 명명하게 되었다.


● 강산(姜山)

의왕시 오전동 오매기 마을 앞 남쪽에 동그랗고 볼록하게 생긴 산이다. 전주 강씨의 선대묘가 있어 강산이라 부른다고 하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지며 실은 예부터 '동그란산'으로 불러 왔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오매기의 사나골·건너말·백운동·용머리·목배미·뒷골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고래들

옻우물에 속했던 들로 나븐들 서쪽에 있었다. 고래처럼 큰 들이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나븐들

옻우물 마을회관에서 동남쪽으로 약500여m쯤 있었던 들이다. 지금의 성일통상과 현대주유소등이 들어선 곳으로 1970년대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넓은 들이었다.

 

● 되링게들

용머리좌우에 있는 들로 예전에 이곳 개울가에 도롱룡이 많았다고 한다. ※ 도롱룡은 도롱룡과에 속하는 양서류의 하나로 몸이 길이가 15㎝가량인데, 숲·밭 등의 낙엽 밑이나 땅속에 살고 밤에 나와 곤충 등을 잡아먹는다.

 

● 된박골

성라자로원 마을 동남쪽에 있는데, 골짜기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 두껍바위

되링게들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로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다. 농부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다.

 

● 마당바위

큰 보식골에서 성라자로원 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음지쪽에 있다. 마당처럼 큰 바위이다.

 

● 미륵재

성라자로원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다 과천가는 구도로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스님으로 변장하고 이곳에 미륵(彌勒)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륵은 1952년 11월 경 의왕시 내손동 출신인 고금동(高金童 1911년생)씨가 내손동 오리나무골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봉안(奉安)하였다고 한다.

 

● 범바위

사나골 뒤 모락산 중턱에 있다.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 병풍바위

백운산 중봉에서 서북쪽으로 서 있는 바위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병풍처럼 생겼다.

 

● 병풍산

전주남이 뒤에 있는 산으로 병풍처럼 생겼다. 등칙골·전주남이·옻우물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삼형제바위

전주남이 병풍산에 있다. 바위가 3개 층층이 있어 '삼형제바위'라 부른다.

 

● 어내들(御川坪)

의왕농협 오전분소 주변으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수원 현융원 행차때 이곳 개울가에 머물렀다 하여 '어내갈'또는 '어내들(御川坪)'이라 부른다.

 

● 용바위

용머리와 오매기 사이에 있는 다리옆에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용머리 주민들이 고사를 지내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갔다 놓을 만큼 신성시 하는 바위이다. 속설에는 이 바위가 깨지면 용머리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 원골(院谷)

성라자로원 마을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원이 있었다고 한다.

 

● 작은고개(小峴)

오매기 뒷골과 학의동 의일사이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길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는 교통로였다.

 

● 작은보식골(小甫食谷)

송파원(松派園) 뒤(북쪽)에 있으며 큰 보식골보다 작은 골짜기이다.

 

● 장고개(場峴)

성라자로원 마을과 오매기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 오매기 사람들이 군포장으로 장(場)을 보러 갈때면 이고개를 이용하였다.

 

● 장승거리(長丞巨里)

유한양행 입구 인근에 예전에 장승(長丞·長牲)이 있었으므로 '장승거리' 또는 '장승박이'라 부른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찬우물(冷井)

등칙골 입구 오전초등학교 못미쳐 사거리 부근에 있던 우물이다. 물이 매우 차다.

 

● 큰고개(大峴)

오매기 공동묘지에서 학의동 의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의일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 큰보식골(大甫食谷)

성라자로원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이 기름진 옥토여서 인근 주민들의 주식원이었는데, 현재는 성라자로원 마을이 들어서 있다.

 

● 큰자리들

오매기 뒷골앞에 있는 들로 들이 넓으므로 '큰자리들'이라 부른다.

 

● 퉁소바위(퉁수바위) 큰보식골 양달쪽 산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조선중엽에 어느 현인이 이곳에서 퉁소를 불었다고 한다.

 

● 평강골(平岡谷)

장 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평평하고 오목하게 생겼다.

 

● 함방들(一田坪)

제일모직 공장이 들어선 곳으로 예전에는 하나의 밭으로 되어 있어서 '한밭들'(一田坪)이라 했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부터 '함방들'로 불리우고 있다.

 

 

고천동(古川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의 평사천(坪沙川)·고정동(古井洞)·고고리(古古里)·내곡동(內谷洞)이었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고천리(水原郡 儀旺面 古川里)로 되었다. 그 후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고천리(日旺面 古川里)로 되었고,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고천리로,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고천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고천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고천동(古川洞)으로 되었다. 이 마을은 고정동(古井洞)과 고고리(古古里)의 '고'(古)자와 평사천(坪沙川)의 '천'(川)자를 따서 '고천동(古川洞)'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의왕시 청사를 비롯하여 농협·초등학교·고천치안센터등이 자리잡고 있어 명실공히 의왕시 중심지이다. 고천동에는 고고리·벌사그내·안골 등의 자연취락이 있다.

자연취락명- 일반지명

고고리(古古里)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고고리라 불렀다. 통미(通尾) 서편에 있으며, 오봉산 깊은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고고리'(古古里)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전주 이씨 전성군(全城君·성종의 아들)의 고손인 이정(李禎)이 좌승지를 역임한 후 이곳에 낙향하여 기거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他姓은 일체 살지 못할만큼 전주이씨 누대의 세거리였다. 고고리는 마을 남쪽지역은 우묵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편의상 '우묵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우묵골 남쪽은 '아랫말'이라 부른다. 마을에서는 벌사그내·안골·골우물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10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고천동사무소 뒤 산신제당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벌사그내(坪沙川)
고천동사무소를 비롯하여 초등학교·농협·치안센터등이 자리잡고 있는 의왕시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본래 모래벌이었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릉(융릉)을 참배하기 위하여 지금의 고천동사무소 자리에 행궁(行宮)을 설치 한 후, 1번국도주변(전 길다방) 부근에 주막과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후 1914년 이곳이 수원군이 되면서 의왕면사무소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어 1936년에 고천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급격히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평사천(廣州郡 旺倫面 坪沙川)이라 했던 벌사그내는 고고리·골우물·안골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고천동사무소뒤에 있는 산신제당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안골(內谷)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봉산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안골'(內谷)이라 부르고 있다. 청풍김씨(淸風金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안골은 오봉정사(五峯精舍)인근은 마을위가 되므로 '윗말', 마을 초입은 마을 아래가 되므로 '아랫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벌사그내·골우물·고고리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 길일을 택해서 안골 산신제당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고천교(古川橋)
경수산업도로 고천지구대 옆 왕림 입구에 있는 다리로 길이 14m, 폭 20.4m이다. 1978년 4월에 착공하여 1978년 12월에 준공되었으나, 왕곡천이 복개되면서 다리는 사라졌다.
고천 제2교(古川 第二橋)
고천지구대에서 서쪽 70m지점의 칠보빌딩과 대한수지공업 사이에 있다. 다리의 길이 20m, 폭 8m로 1982년 12월 30일에 준공되었다.
광명교(光明橋)
의왕교에서 서쪽 약 100m 지점의 공영사와 한진화학 사이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의 길이 36m, 폭 8m 로 1983년 11월 18일 착공하여 1984년 12월 30일에 준공되었다.
납작산
고고리 앞(동쪽)에 위치해 있다. 산세가 얕으므로 '납작산'이라 부른다.
돌고지(石串)
고려합섬 뒤로 오봉산 낙맥을 말한다. 이곳은 넓은 들판을 향해 삐죽하게 내뻗은 지형이므로 '돌고지'라 부르고 있는데, 좀더 설명을 붙이면 돌은 결코 '石'이란 뜻이 아니라 음의 동화로 변전된 음운이다. 즉 들(野)+고지(串)〉들고지〉돌고지의 음전을 거쳐 온 것이다. 들(野)〉돌은 돌배(野生梨)를 돌배라 함과 같은 유형의 지명이다.
돌고지들(石串坪)
고려합섬이 들어서 있던 자리를 말한다. 예전에 이곳 일대에 작은 돌이 옹기종기 있었는데, 고려합섬뒤에 있는 오봉산 줄기에 청풍 김씨 13세 손인 김인백(金仁伯 1561∼1617)의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 1564, 5. 22∼1632. 3. 16)의 묘가 닭이 날개로 알을 품은 형국(金鷄抱卵形局)이어서 이곳의 작은 돌을 병아리로 생각하고 이일대를 신성시하여 청풍 김씨 문중에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1966년 1월 24일 고려합섬이 들어서면서 흔적조차 없어졌다. 돌고지앞에 있는 들이므로 '돌고지들'이라 부른다.
두껍바위
오봉산의 5개 봉우리중 제5종에 있는 바위로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다. 속설에는 두꺼비의 입은 이동의 창말을 향해 있고, 꽁무니는 오전동 오매기(五馬洞)를 향해 있어서 두꺼비가 창말에서 밥을 먹고 오매기에다 대소변을 놓아 창말은 가난하고 오매기는 부자마을이 되었다 한다. 이는 창말은 빈촌이고 오매기는 부촌인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말무덤이(馬墳)
지구페인트 뒤에 있는 큰 무덤을 말한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오전동 미륵재에다 미륵을 세운 후 이곳에서 용마(龍馬)가 날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모퉁이
전 고려합섬 뒤 산 모퉁이를 말한다. 벌사그내와 고고리를 왕래하자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병풍바위
오봉산 약바위에서 북쪽으로 약 50m지점에 있다. 바위가 병풍처럼 생겼다.
비석거리(碑石巨里)
삼오주유소 앞(동쪽)길옆에 조선시대의 관찰사·목사 등의 선정비가 많았으므로 이 일대를 '비석거리'(碑石巨里)라 부르고 있다. 1883년 5월에 세운 부윤 의 선정비 1기가 있었으나 1991년 도로확장으로 이전되었다.
사당골(祠堂谷)
고고리 서쪽에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사당이 있었으므로 '사당골'(祠堂谷)이라 부르고 있다.
새전이고개
안골과 웃말과 군포시 당정동 새전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새이전에는 '안골고개'라 부른다.
송장골
영일화학 뒤에 있는 골짜기로 구전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 이 골짜기 우물옆 가시덤불속에 불여우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이 앞을 지나가는 행인을 해쳤는데, 그 후에도 많은 사람이 이 불여우에게 죽어 갔다고 한다. 인근에서는 아이들이 울다가도 송장골 여우가 나타났다고 하면 울음을 그친다고 한다.
신관들(新官坪)
현 고천동사무소자리에 조선시대에 행궁(사근행궁)이 있었는데, 이곳 앞에 있는 들이므로 '신관들'(新官坪)이라 부렀다.
안골교(內谷橋)
고천2통에 있는 다리로 안골진입로에 있기 때문에 '안골교'(內谷橋)라 부른다. 길이 36m, 폭 4.5m로, 1983년 11월 18일에 착공하여 1984년 12월 30일에 준공하였다.
약바위
오봉산의 5개 봉우리중 첫째 봉우리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구전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 마귀할머니가 돌을 이고 가다가 이곳에 떨어뜨릴 때 바위에 똬리 자국이 생겼는데, 비가와 빗물이 고여 이 물로 팔·다리· 등에 피부병을 치료하였다 한다. 그 후로부터 이 바위를 '약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오봉산(五峯山)
고천에서 부곡으로 넘어가는 고개 못미쳐 바른쪽으로 봉우리 5개가 있으니 이 산이 유명한 오봉산(五峯山)이다. 이 산 기슭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 묘가 조선숙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청풍김씨 인백(仁伯)의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 1564. 5. 22∼1632. 3. 16)의 묘이다. 안동 권씨는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 김극형(金克亨 1605. 11. 29∼1663. 2. 8, 화순현감을 역임)의 지극한 효심으로 이곳에 묘를 쓴후 김구(金構 1649∼1704, 우의정)를 비롯하여 김재로(金在魯 1682∼1759 영의정), 김약로(金若魯 1694∼1753 좌의정), 김상로(金尙魯 1702∼1766,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1716∼1790, 영의정), 김종수(金鍾秀 1728∼1799, 좌의정)등 6정승이 배출되었다.
오봉정사(五峯精舍)
오봉산의 낙맥 안골 위에 있는 사찰이다. 본래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가 1975년 몽월(夢月)스님에 의해 오봉정사(五峯精舍)로 개칭되었다. 종파는 태고종이다.
와골(瓦谷)
고고리 위(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의왕교(義王橋)
경수산업도로에서 제일모직 입구에 있는 다리로 길이 22m, 폭 20.4m이다. 1973년 4월에 착공하여 1973년 12월에 준공하였는데 현재는 오전천이 복개되어 사라졌다. 보건소 사거리가 있던 곳이다.
장다골
고고리뒤(서쪽)에 있다. 골짜기가 좁고 길다고 하여 '장다골'이라 부르고 있다.
환자고개(還子峴)
고천동 우물과 이동(二洞)사이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에 광주목(廣州牧, 1895년부터 광주군으로 개칭) 관하 사창(社倉)에서 백성에게 꾸어 주었던 곡식을 받아 들이는 환자(還子)를 싣고 광주목 관아가 있는 경안으로 가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환자고개'(還子峴)라 했다. 인근에있는 고개 중 가장 큰 고개라 하여 일명 '큰고개'라 부르기도 하며, 또는 '어비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이 고개 마루에 서낭당이 있었으나 1979년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없어졌다.

 

학의동(鶴儀洞)

조선시대 영조 때(영조 35년 1759. 여지도서에 의거)에는 광주부 의곡면 이리이었으나 그후 정조13년(1789)에는 광주군 의곡면 학현동과 의일외동의 지역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병합되어 수원군 의왕면 학의리라 했다가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학의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학의리라 했다가,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학의리로 1989년 1월 1일 의왕시 학의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학현동의 ‘학(鶴)’자와 의일외동의 ‘의(義→儀)’자를 ‘儀’자를 따서 학의리 라 했다가 의왕시 승격으로 학의동이 되었다. 학의동에는 학의1동(옛 학현동)과 학의2동(옛 의일외동)으로 나누어지는데, 학의1동은 점말·새터말·웃말·아랫말이 있으며(학현으로 통칭) 학의2동은 오린계, 속말, 북골을 ‘의일’로 부르고 있다.

자연취락명일반지명

북골
속말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북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래 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오린계·양지편·속말 주민들과 함께 오린계 초입에 있는 산 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새텃말
이 마을은 미나리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미나리골’이라 불렀다가 조선 말엽에 학현 응단말에 살던 주민들이 새로 터를 잡고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새텃말’이라 부르고 있다. 학현 북쪽에 위치해 있는 새텃말에는 전 색동회장 정인섭선생의 묘가 있고, 또 묘앞에 현제명 작곡의 「산들바람」동요비가 있다. 마을에서는 학현·점말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학현 웃말 서쪽 산등성이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속말
오린계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이곳 방앗간 일대가 예전에 숲으로 우거져 있어 ‘수풀동’이라 했는데, 일제 때 한자표기를 ‘수필동’으로 하였다. 광복후부터는 숲속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속말’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쪽지역은 ‘고분재밑’이라 칭한다. 마을에서는 북골·오린계·양지편 주민들과 함께 오린계 초입에 있는 산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양지편
백운호수 초입에서 내손동 능안말 입구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남향받이라 햇볕이 잘 드는 지역이라 해서 ‘양지편’이라 칭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백운호수 제방밑에 소나무·오리나무등이 우거져 있어 이 마을을 숲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숲밖에’라 했다. 1953년 백운호수가 설치되면서 이일대가 수몰되자 이곳 일대 주민들이 현재의 위치에서 살고 있다. 마을에서는 북골·오린계·양지편 주민들과 함께 오린계 초입에 있는 산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오린계(오링계, 오링개)
백운호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청송심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반남 박씨·광주이씨·동래 정씨등이 세거해 왔다. 이 마을은 풍수로 보아 삼좌청룡(三左靑龍)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라 하여 오린계라 칭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중엽에 도승지를 역임한 박응남의 묘가 있으며 마을에서는 북골·양지편·속말 주민들과 함께 이 마을 초입에 있는 산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영조 35년(1759)경 간행《여지도서》나 기타《대동지지》《남한지》등에는 현 오린계는 모두 의왕면에 소속되어 있다. 마을명은 문헌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경에는 ‘의일외동’으로 확인되는데, 최근 오링계에있는 남일 박공응남 묘비(1733년에 세움)에 ‘光州治 의곡리 유원좌서면향묘자’(아! 여기 광주읍치 의곡리에 유좌묘향으로 된 동산이 있으니‘)를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의곡리는 그대로 ‘의일’을 뜻하며 오린계는 ‘의’자의 고어 ‘올’이 ‘오른’〉으로 음운변화하여 결국 계곡을 의미하는 ‘계’와 합하여 ‘오린계’가 되고 발음은 ‘오링계’또는 오링개가 되며, 한편 의일은 마을 형성이 옛 숲밖에 여서, 올라오다 보면 오른쪽엔 ‘오린계’, 북쪽에 ‘북골’, 잘 보이지 않는 고분재밑속에 있는 ‘속말’로 이루어지고 옛부터 가장 잘 알려진 ‘오린계’가 ‘의곡’으로 지칭되었음은 자연스런 지명유래로 생각된다. 오린계가 오린동에서 유래됐다는 근거는 희박하고 오룡동은 거의 일반사람들이 모르는 지명이다.
점말
학현과 백운호수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말엽 이성근·김영신·장치운씨등 세사람이 마을 중앙인 박영환씨 댁 옆에서 오지그릇을 만들었다 하여 ‘점말’이라 부르고 있다.
학현
 점말 동쪽에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이곳 응단말 동쪽에 있는 김해 김씨의 종산이 풍수로 보아 학(鶴)이 거둥하는 형국이고, 웃말 북쪽에 있는 안동김씨의 묘 역시 학의 혈이며, 웃말과 새텃말 사이에 있는 고개를‘학고개(鶴峴)’라 칭한데 연유하고 있다. 학현은 임(林)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래 김해김씨·광산김씨·경주김씨·문화류씨등이 세거해 왔으며, 마을 남쪽지역은 ‘응단말’, 북쪽지역은 ‘웃말’, 중앙은 ‘아랫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김정균과 김병익의 묘가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웃말 서뽁 산등성이에서 새텃말, 점말 주민들과 함께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가는장등
학현 긴장등 동쪽에 있다. 등성이가 좁으므로 ‘가는장등’이라 부르고 있다.
가래골
학현 웃말 동쪽에서 약 500m 에 있다. 이 골짜기에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가래골’이라 부르고 있는데, 현재는 가래나무가 없다.
가마터
점말 중앙인 학의동 425번지 일대로 이곳에서 조선 말엽에 이성근씨등이 오지그릇을 구웠다고 한다.
가장골
오린계 굿타리골 북쪽으로 박응남(朴應男 1527~1572 동승지역임)의 묘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이다.
감투바위
감투처럼 생긴 바위로 학현 호랑이골 서쪽 산 정상에 있다.
고분재
속말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곡현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꼬불꼬불한 고개로 마루턱에 서낭이 있다.
굿타리골
박응남의 묘 밑에 있으며 오린계에 속한 골짜기이다.
긴장등
학현 웃말 동쪽으로 호랑이골 못 미처에 긴 산등성이가 있는데 이를 ‘긴장등’이라 부른다.
긴주리논
점말 제청들 안에 있는 논으로, 논이 길며 두 마지기 가량이다.
넓적치논
점말 제청들 안에 있는 논이다. 수답으로 두마지기 가량된다.
당재고개
새텃말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에서 학현·점말·새텃말 주민들이 당제를 지냈으므로 ‘당재고개’라 부른다.
동자골
점말과 새텃말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시대 말엽에 어떤이가 이곳에서 동자삼을 캤다고 한다.
두구리고개
점말과 미나리골 사이에 있는 고개로 비포장 도로이며 일명 ‘동자골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모답자리논
오린계 초입에 있다. 수답으로 토질이 좋은 논이다.
모선바위
학현 웃말에서 동쪽으로 약 500m지점에 있는 바위로 조선조 중엽 전란이 일어나자 학현주민들이 이 바위에 모여 있다가 적군에게 몰살당했다 하여 ‘몰살바위’라 했는데, 시대가 변함에 따라 ‘모선바위’라 불리우고 있다.
목내미들
목을 내민 형상을 하고 있는 들로 오린계 모답자리논 위에 있다.
미논
북골과 속말사이로 백운호수 끝에 있는 논이다.
바라산
북골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및 성남시 운중동에 걸쳐있다. 의일주민들이 정월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던 산이다.
바라산고개
바라산에 있는 고개로 북골과 성남시 운중사이에 있다. 비포장 소로이나 조선시대에는 충청·영남·전라지방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 다니던 교통로였다.
방죽배미
북골가운데 있다. 문전옥답으로 300여평에 이른다.
배바위
오린계 양시미골 중턱에 있다. 아주 오랜 옛날 바닷물이 이곳에까지 들어왔을 때 배의 닻줄을 바위에다 매었다고 한다.
벌택이논
학의2동 마을회관 아래에 있다. 수답으로 2000여평 된다.
범박골
정말과 학현 사이로 모 도서관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범이 많았다 하여 ‘범박골’이라 부르고 있다.
불당골
오린계 양시미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절이 있으므로 ‘불당골(불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사기전골
조선 말엽에 사기를 구웠던 곳으로 오링게 불당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삼형제바위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어 ‘삼형제바위’라 칭하고 있는데, 학의동 주민들이 소원성취해 달라고 정성을 드리던 바위이다. 학현 모선바위에서 동쪽으로 약600m지점에 있다.
상산바위
점말 절골터 위에 있는 바위로 일명 ‘마귀요강할머니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수장들
새텃말 서쪽에 있는 들로 물이 넘쳐흘러 들이 수장되었다 하여 ‘수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쉰터논
속말 동남쪽에 있으며 속말에서 토질이 제일 좋은 논이다.
실걸논
실 같이 작고 긴 논으로 한 마지기 가량되며 점말 제청들 안에 있다.
안골집터
큰 부자가 살던 터로 오린계 서쪽 약100m 지점에 있다.
안터논
오링계 이양논 서쪽에 있다. 천수답으로 700여평 된다.
양시미골
오린계 응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배바위가 있다.
양주바위
학현 장가바위에서 동쪽으로 20m쯤에 있는 바위로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여우방골
여우의 집이 있던 골짜기로 바라산 밑에 있다.
오매기고개
오린계와 오전동 오매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오매기에서는 ‘의일고개’라 부른다.
왜미논
오린계 벌텍이논 도랑 건너에 있다. 본래 천수답이었는데 백운저수지로 옥토가 되었다.
응골
오린계에서 동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는 산골이다. 이곳은 큰 나무가 많아 햇볕이 들지않는 골짜기이다.
이승골논
이슬골 안에 있는 논으로 토질이 좋으며 샘물로 농사를 짓는다.
이양논
오린계 왜미논 서쪽에 있다. 수답으로 토질이 좋은 논이다.
장가바위
학현 모선바위에 동쪽으로 약 50m지점에 있다. 학현 청년들이 먼곳에서 돌을 던져 이 바위에 얹히면 장가를 간다하여 ‘장가바위’라 부르고 있다.
장사바위
학현 모선바위에서 동북쪽으로 약50m 지점에 있다. 엿장사가 갔다 놓은 바위라고 하여 바위 밑에 상투자국과 머리자국이 남아있다.
장자부리
북골 뒤 산 모퉁이로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으므로 ‘장자부리’라 부르고 있다.
절터골
점말뒤에 있다. 이곳에 절이 있었다가 빈대 때문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백운저수지 제방은 이 골짜기에 있던 돌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제청들
점말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논으로 일명 ‘안자리’라 부르기도 한다.
터골
학현 웃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학현 최초의 주거지라고 한다.
팥죽배미
흉년이 들어 팥죽과 바꾸어 먹은 논으로 새텃말 수장들 안에 있다.
학고개
학현 웃말과 새텃말 사이에 있으며 ‘구리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서낭이 있었다가 1980년 초에 포장공사를 할 때 없앴다.
학의교
백운저수지 제방에서 서북쪽으로 약200m지점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의 길이 24.3m, 교폭 7.1m, 1977년 12월 30일에 준공되었으며, 다리 밑으로 학의천이 흐르고 있다.
학의천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백운저수지를 이루고, 포일동을 거쳐 안양시 평촌동에서 안양천에 합류된다.
함박봉
바라산 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마치 함박꽃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봉우리 북쪽은 불이 잘 나는 고개라 하여 ‘불깃재’라 부른다.
헌터골고개
점말과 오링게 사이를 왕래하는 고개로 비포장 도로이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에 전우치가 다니던 고개로 유명하다.
헌터골논
북골 아래로 백운저수지 동북쪽에 있는 논이다. 천수답이었는데 백운저수지로 수답이 되었다.
호랑이골
호랑이가 득실거렸던 곳으로 학현 웃말에서 동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다.
흔들바위
의일 부녀자들이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흔들던 바위로 북골 남쪽 약100m지점에 있다.
흰돌박이논
속말 쉰토논 북쪽에 있다. 논 가운데 흰돌이 있어 ‘흰돌박이논’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