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자료]의왕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

이야기보따리/자료

의왕시는 경기도 중서부에 있으며 면적은 53,986㎢(경기도의 0.5%) 인구 15만 6,763명(2016년 12월)의 아담한 전원도시이다.

시의 경계는 6개 시군과 접하고 있어, 동쪽은 성남시 용인시, 서쪽으로 안양시 군포시, 남쪽으로는 수원시 안산시, 북쪽으로는 과천시와 접하고 있으며, 시청소재지는 고천동에 있다.
의왕시는 인구밀집 지역인 아파트나 주택지역이 청계산 줄기의 백운산과 모락산, 오봉산으로 이어지는 산 자락에 휘돌아 감겨있어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산은 청계산, 백운산(567m), 바라산(428m), 모락산(385m), 오봉산(205m)으로 이어져, 작고 아담한 산들로 이우러져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안양천(安養川)과 학의천(鶴儀川) 청계천 학현천(鶴峴川) 등이 있고, 백운호수와 왕송호수 등은 관광휴양지로서 유명하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모락산에는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묘와 사당이 있으며,청계산에는 고려 충신인 조견이 송동를 바라보면서 애통해 했다는 망경대(望京臺)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가문인 왕곡동(旺谷洞) 청풍김씨(淸風金氏) 재실에는 검재 김유 선생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117, 현재 경기도박물관 위탁)이 있고, 청계사에는 청계사소장목판(淸溪寺所藏木板, 경기도 유형문화재 135)이 있으며, 청계산에서 백운호수에 이르는 길은 과천 서울대공원과 연결되는 전국순례자연경관도보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 의왕 역사

· 1895년 광주목에서 광주군으로 개칭
· 1914년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을 통합, 수원군 의왕면으로 변경
   왕륜면(旺倫面)
   내왕륜(內旺倫), 오마동(五馬洞), 오주동(全朱洞), 내곡동(藤谷洞), 평사천(坪沙川), 통산동(通山洞), 곡사천(谷沙川), 고정동(古井洞), 고고리(古古里), 내곡동(內谷洞),
   징계동(澄溪洞), 교동(校洞), 가동(柯洞), 묘동(墓洞), 신촌(新村), 궁촌(宮村), 창촌(倉村), 신기촌(新基村), 괴동(槐洞), 상장의(上莊義), 하장의(下莊義)
   의곡동(儀谷面)
   학현동(鶴峴洞), 의일외동(義逸外洞), 의일내동(義逸內洞), 손동(蓀洞), 포일동(浦一洞), 포이동(浦二洞), 상청계동(上淸溪洞), 하청계동(下淸溪洞)


참고

월암리와 초평리는 안산군(安山郡)의 월곡동(月谷面)에 속하였으며, 지명은 월암리(月岩里)와 상초평(上草坪)과 하초평(下草坪)이었다.
1912년 현재 안산군(安山郡) 월곡면(月谷面) 월암리(月岩里)에는 월암동(月岩洞), 일이동(一里洞), 대대동(大垈洞)이 있었다. 초평리(草坪里)는 상초평과 하초평이 있었다.


· 1915년 현재 의왕면 행정구역
   학의리(鶴儀里 : 학현동, 의일외동), 포일리(浦一里 : 포일동, 포이동, 갈산동), 내손리(內蓀里 : 갈산동, 손동, 의일내동), 청계리(淸溪里 : 상청계동, 하청계동),
   오전리(五全里 : 오마동, 전주동, 등곡동), 이리(二里 : 창촌, 징계동, 교동, 가동, 묘동, 신촌, 궁촌, 신기촌), 왕곡리(旺谷里 : 내왕륜, 곡사천, 통산동), 삼리(三里 : 상장의, 하장의, 괴동),
   고천리(古川里 : 고정동, 평사천, 고고리, 내곡리)
· 1924년 현재 의왕면 행정구역
   왕곡리(旺谷里), 오전리(五全里), 고천리(古川里), 이리(二里), 삼리(三里), 학의리(鶴儀里), 내손리(內蓀里), 포일리(浦一里), 청계리(淸溪里)


참고

초평리(草坪里)와 월암리(月岩里)는 수원군(水原郡) 반월면(半月面)에 속함


· 1936년 수원군 일형면(日荊面)과 의왕면을 합하여 일왕면(日旺面)으로 개칭
· 1949년 화성군(華城郡) 일왕면으로 변경
· 1963년 시흥군(始興郡) 의왕면(儀旺面)으로 변경
· 1980년 시흥군 의왕읍(儀旺邑)으로 승격
· 1983년 초평리와 월암리가 시흥군 의왕읍으로 편입, 의왕읍 동부출장소 설치
· 1989년 의왕시(儀旺市)로 승격
· 1993년 시청소재지 변경
· 2003년 12월 행정동고천동(고천동, 왕곡동) 부곡동(이동, 삼동, 월암동, 초평동) 오전동(오전동) 내손1동(내손1동) 내손2동(내손2동, 포일동) 청계동(학의동, 청계동)
· 2007년 의왕시 한자명칭 변경 (儀旺市 ⇒ 義王市, 법률제8244호)

 

의왕의 지명유래

의왕시의 유래는 광주목에 속했을때 의곡면의 의자와 왕륜면의 왕자를 따서 의왕면이라 하였습니다.

 

● 청계동

<여지도서>의 광주 의곡면은 1리와 2리로 구분되어 있고 더 이상 세분된 마을명이 나타나지 않으나 그후 광주 의곡면은 손동, 갈산동, 포우동, 청계동, 학현, 어일리로 되어 있어 '청계동'이 등장된다. 이 청계는 아마도 현재 청계산을 옛날에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남한지>등 문헌이나 청계사사적기비의 기록에서 보듯 '일명 청계산'이라 하여 과천 관악산을 '우백호'라 칭한다면 '우청룡산'에 해당하므로 이 청룡산 계곡을 따라 이루어진 마을이 靑溪 또는 淸溪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농골

청계마을의 '농골'은 봉담→의왕→과천고속도로 중 과천터널 바로 옆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을 말한다. 고속도로가 나고 터널이 뚫려 마을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으나 서쪽보다는 동쪽 남은 집들이 훨씬 많다. 이곳은 조선초기 음성박씨 후손인 박연 (진안 현감 역임)이 관직에서 물러난후 여기서 은둔 생활을 하던 곳으로 아호가 노은이므로 '노은골'로 칭했던 점차 음운탈락과 변동으로 '농골'로 변한 땅이름으로 여겨진다.


● 옥박골

'옥박골'은 한직골에서 청계사로 가는 초입길 왼쪽에 오목하게 들어간 마을 이름이다.<始興郡誌>下(p. 986) 지명유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 죄인을 가두는 '옥(獄)'이 있었으므로 '옥박골'이라 했는데, 그후 옥이 철거되면서 그 주변 일대를 '옥터밭'이라 부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한직골

일석 선생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한직골'은 '한적골'이 변한 이름이라 하였다. 이곳이 옛날에는 마을이 없었던 곳으로 인덕원에서 광주쪽으로 가는 길목으로 한적한 곳이라는 의미로 '한적골'이었는데, 발음의 편의상 '한직골'로 부른다는 것이 다. 현재 청계동 사무소가 위치한 곳의 동남쪽 부근 망르이 바로 이 마을로 이곳에 전해지는 지명유래는 이곳은 예로부터 지대가 높아 논은 별로없고 들판이 사질토(沙質土)이므로 어떤 곡식도 잘되지 않고 가물면 이내 작물이 旱災를 입어 시들고 말라죽어 '한재골(旱災洞)'이라 흔히 불리어 왔는데 현재는 '한직골'로 통칭한다고 밝혀 있다.


● 하우개(원터마을)

'하오개'는 이 고개가 '학고개' 였으나 '학고개>하오개>하우개'로 음운변천에 따라 '하오개'또는 '하우개'개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성당이 있는 마을(청계13통)을 흔히 '하우개'마을로 지칭되기도 한다.


● 벌모루

넓은 들판 모퉁이 마을이란 뜻에서 한자지명으로 '포우리(浦隅理)', 고유어로는 '벌모루'라 칭한다.


● 성고개

벌모루와 이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주위가 마치 성을 에워싼듯한 형상으로 되어 있어 '성고개'라고 불렀을 듯하다. 이미 이 마을은 서울구치소와 성고개 마을 동북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이 말을에 큰 나무(느티나무) 두그루가 있어 마치 숲을 이룬 것과 같으므로 '임이(林二)'라 칭했다는 것이다.


● 학의동

1914년 4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하기 전에는 두 개의 큰 자연부락명인 학현동과 의일외동이 있었는데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두 지명의 첫글자를 각각 취하여 '학의리'로 개칭하게 되었다. 학현동은 크게 샛터말(미나리 골), 학현(웃말), 점말(아랫말)의 자연마을이 있고 학의2리에 해당하는 의일동은 '오른계, 속말, 북골, 양지말'로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다.


● 의일

현 의왕시 학의2동을 지칭하는 전통적 명칭은 '의일'이다. '의'를 발음할 때 단모음화시킨 발음을 대충 한자 '어'자로 취음 하여 표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능안마을(내손1리)

능안은 백운호수 서남쪽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의 묘지가 있는 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임영대군 묘자리가 묘지 후보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효종과 임영대군은 같은 왕족인 관계로 효종의 묘소를 여주로 다시 정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을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이라 일컬어 오게 되었다.


● 내손동

조선시대 광주군 의곡면의 의일내동, 손동, 가산동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군면동 통폐합시 '의일내동'의 '내'와 '손동'의 '손'자를 따서 '내손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내손리가 되었다. 그후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내손리, 다시 1949년 8월 5일 화성군 일왕면 내손리,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내손리, 1980년 12월 1일 의왕면 내손리, 1990년 1월 1일 의왕시 내손동으로 되었다. 현대 내손동은 청계동 관내의 능안마을과는 다른 내손동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 내손동은 과거의 '손골'과 '갈미'는 물론 '민백이'마을 및 포일, 대우아파트 단지를 관할하는 큰 취락을 관장하게 되어 행정동도 둘로 갈라 '내손1, 2동'으로 분동하고 있다.


● 오전동

오전동은 '오마동'의 '오'와 '전주동'의 '전'을 따서 1914년 지명 통폐합시 '오전동'이라 하여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로 된후 현재의 '오전동'에 이르기까지 수원군 일왕면, 화성군 일왕면, 시흥군 의왕면, 시흥군, 의왕읍 등의 오전리로 되었다가 의왕시 오전동으로 발전해 왔다.

오전동은 선시대에 광주군 왕륜면의 오마동(五馬洞), 전주동(全朱洞)·등곡동(藤谷洞)의 여러지역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오전리라 했다가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오전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오전리로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오전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오전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오마동(五馬洞)의 '오'(五)자와 전주동(全朱洞)의 '전'(전)자를 따서 '오전동'이라 불렀으며, 오전동에는 가운데말·뒷골·등칙골·목배미·백운동·사나골·성라자로원마을·오매기·옻우물·용머리·전주남이 등의 자연취락이 있었다.

 

가운데말

사나골과 뒷골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오매기의 여러취락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운데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백운동 주민들은 이 마을을 '건너말'이라 부른다.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오매기의 자연취락중 가장 큰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용머리·뒷골·사나골·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뒷골(後谷)

백운동과 가운데말 사이에 위치해 있다. 가운데말 뒤에 있는 마을이므로 '뒷골'(後谷)이라 부르고 있으며 교하 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사나골·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등칙골(藤谷洞)

의왕중학교가 들어선 마을이다. 이곳 뒷산에 등나무가 많으므로 '등칙골'(藤谷洞)이라 부르고 있다. 등칙골은 전주이씨 근령군파(全州李氏 謹寧君派)후손인 이 용(李容 1565.10. 12∼1616. 1. 4, 자는 季偉, 通德郞을 역임)의 묘를 이곳에 쓴후, 그의 아들 이정집이 묘하에 살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마을에서 옻우물·전주남이 주민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1·2·3일 중에서 길일을 택해 이곳 뒤에 있는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목배미

용머리 남쪽 길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왕곡동 홍치골로 넘어가는 고개밑에 위치하고 있다. 인동 장씨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 앞의 논이 기름진 문전옥답(문전옥답)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길을 통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곤 했다.

 

백운동(白雲洞)

오전저수지(五全貯水池)밑에 있는 마을로 백운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백운동'이라 부른다. 경주 김씨와 광주노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사나골·건너말(가운데말)·용머리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姜山)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사나골(山岳谷)

문화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1600년대 초에 문화류씨 하정공파 후손인 유 항(절충장군을 역임)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형성된 곳이다. 오매기 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산악(山岳)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산악골'이라 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사나골'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에서는 용머리·가운데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성라자로원 마을

모락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광복 이전만 해도 이곳은 산야(山野)이었다가, 광복후 서울 세브란스의전 출신인 소진탁(蘇鎭卓)박사에 의해 폐결핵 요양소가 설치되었다. 그후 1952년 6월 2일 죠지캐롤 안주교에 의해 성라자로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누가복음〉(16, 19-31)을 보면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 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배를 채우며 살다가 얼마뒤에 죽어서 부활하여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는 내용에서 '성라자로 마을'이라 명명한 것이다.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인 포도원 입구에서 수원방면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동편으로 보면 '새삶의 예수'석고상이 있고 그 뒤로 십자가가 세워진 아치에는 성라자로원 마을 안내판이 있다. 성라자로원은 나환자의 조기치료와 보호 및 불구 그리고 노령환자의 생활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하여, 불구환자의 요양과 진료를 실시하고 라자로원 돕기 후원회와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성라자로원의 초대 원장은 이경재(李庚宰)신부로, 그는 1926년 2월 9일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하여 1951년 4월 3일 서울카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그해(1951)신부가 된 후 해군 종군신부로서 임무를 끝내고 모두 다 외면하는 성라자로원을 자원하여 1952년 초대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빈곤과 병고와 한숨만이 맞아주는 라자로원을 위해 헌신봉사한 공로로 1979년 12월 28일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성라자로원은 처음에는 1950년 광명시에 설립되었다가 1951년 7월 5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후 1971년 4월 3일 라자로 돕기 후원회가 발족되었고 10년 후인 1981년 11월 15일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에도 아론의 집(1984. 5. 8)과 불구노약자의 집(1986. 7. 14)등이 차례로 준공되었다.

 

옻우물

유한양행 옆(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광복 직후인 1948년까지만 해도 전주이씨 근령군파후손 2가구와 김씨등 모두 3가구가 살아오다 그후 성라자로원 관계자들이 거주하면서 6,7세대로 불어 났으나, 1969년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중엽, 이마을에 사는 이생원의 아들이 피부병을 앓아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했으나 효험이 없자 마침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더니 고맙다는 뜻으로 오전동 133번지에 우물을 파게 하였다. 그런데 사시사철 물이 잘 나와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특히 옻으로 인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는데 그 후부터 이 우물을 '옻우물'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옻우물'로 했다고 한다. 이우물은 1970년대에 이르러 주변에 주택이 늘어서자 폐정되었으며, 현재는 삼창양행(三昌洋行)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전주남이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용머리(龍頭洞)

오매기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풍수로 보아 하천의 물 흐르는 형태가 이곳에 이르러 용의 머리처럼 휘돌아 가므로 '용머리'(龍頭洞)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용의 머리부분은 일제 말엽에 도로를 개설할 때 파손되었다. 이 마을은 광복 이전만해도 인동 장씨등 불과 서너 가구밖에 안되었다가 1960년대초부터 민가가 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사나골·건너말·백운동등 오매기 주민들과 함께 매년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전주남이(全朱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전주동이라 불렀다. 등칙골과 오매기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중엽에 전주동이란 큰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을 부자가 박절하자 이에 화가 난 스님이 앙심을 품고 마을 뒷산에 혈(穴)을 끊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일러주자 이 말을 사실로 안 전주동은 스님이 일러준대로 산의 혈을 끊었는데, 그후 얼마가지 않아 망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은 전주동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전주남이'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등칙골·옻우물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병풍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오매기(五馬洞. 五募洞)

오매기는 삼태기처럼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국가의 전란등이 일어나면 피난의 최적지였다. <구한명람> 및 <신구조명람>에는 '오전동'으로 기록.  본래는 전주남이 동쪽으로 고천에서 학의동이나 능안마을로 갈 때, 용머리, 산악골, 윗골, 가운뎃말, 백운동, 목배미, 뒷골, 배운산(백운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이 마을은 문화류씨를 비롯하여 문씨(文氏)·진씨(陳氏)·광주노씨(廣州盧氏)·마씨(馬氏)등이 각기 1막(一幕)씩을 짓고 살아 '오막동'(五幕洞)이라고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오매기(五馬洞)'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백운동·용머리·가운데말·사나골등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통해 강산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산악골

'산악골'은 오매기 마을 입구에서 장고개로 넘어가는 어귀 마을이다. 이 마을 이름은 이제까지 올바르게 알려져 있지 않다. 때로는 '산악골', '사낙골'로 기록하고 있다.


● 고천동

조선시대 광주군 왕륜면 평사면(벌사근네), 고정동(골우물), 고고리(고고리), 내곡동(안골)등을 1914년 부령 제111호에 의해 통폐합할 때 '고정동, 고고리'의 '고'자와 '평사천'의 '천'자를 따서 '고천'으로 통폐합하였다.


● 고고리

이 마을은 통미 건너편 현 과천-봉담 고속도로가 경수 산업도로와 교차하는 지점의 서편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자로 '고고리' 로 표기하느 자체가 이 마을의 유래를 얼른 알 수 없게 한다. '고고리'는 원래 '골골이 '에서 연유된 이름임이 거의 확실시 된다.


● 고우물

이 마을은 현 의왕시 남쪽 마을로 이 마을명의 유래는 실제 제보자의 제보에서도 확인되듯이 예전에는 이 마을이 위치한 오봉산 동남 골짜기에 우물이 있어 '골우물'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이 마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 의왕시에 대한 이름 고찰

'의왕시'는 조선시대가지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광주군 의곡면과 광주군 왕륜면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 역시 일제의 행정구역 통합정책에 의해 각각 머리 한자씩 취하여 지명이 완성되었는데 '義王'이 아닌 '儀旺'으로 둔갑되어 등장하였다.


● 백운산

백운산은 높이가 564m인 산으로 광수산에서 북서로 이어진 첫봉우리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와 의왕시 왕곡, 학의동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 모락산

모락산은 일명 '갈산(葛山)'이라고도 하면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의 능안과 갈미 및 오전동의 성나자로원과 오매기가 둘러 싸고 있는 높이 385m의 산이다.


● 고분재

고분재는 학의동(청계2통) 속말에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 지지대 고개

'지지대'고개는 의왕시 왕곡동(골사그네)에서 수원시 파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정조 임금이 수원 현륭원 원행에 취해진 거둥이 11차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로 3차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1월 26일 환궁하는 길에 잠시 쉬었다. 이때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발을 멈춰 경들을 소견하는 것은 환궁하는 자기의 발걸음이 차마 발을 속히 뗄수 없는 심정 이므로 더디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라고 애틋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곳을 '지지대'라 명명하게 되었다.


● 강산(姜山)

의왕시 오전동 오매기 마을 앞 남쪽에 동그랗고 볼록하게 생긴 산이다. 전주 강씨의 선대묘가 있어 강산이라 부른다고 하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지며 실은 예부터 '동그란산'으로 불러 왔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오매기의 사나골·건너말·백운동·용머리·목배미·뒷골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고래들

옻우물에 속했던 들로 나븐들 서쪽에 있었다. 고래처럼 큰 들이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나븐들

옻우물 마을회관에서 동남쪽으로 약500여m쯤 있었던 들이다. 지금의 성일통상과 현대주유소등이 들어선 곳으로 1970년대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넓은 들이었다.

 

● 되링게들

용머리좌우에 있는 들로 예전에 이곳 개울가에 도롱룡이 많았다고 한다. ※ 도롱룡은 도롱룡과에 속하는 양서류의 하나로 몸이 길이가 15㎝가량인데, 숲·밭 등의 낙엽 밑이나 땅속에 살고 밤에 나와 곤충 등을 잡아먹는다.

 

● 된박골

성라자로원 마을 동남쪽에 있는데, 골짜기가 절벽을 이루고 있다.

 

● 두껍바위

되링게들 논 가운데에 있는 바위로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다. 농부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다.

 

● 마당바위

큰 보식골에서 성라자로원 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음지쪽에 있다. 마당처럼 큰 바위이다.

 

● 미륵재

성라자로원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다 과천가는 구도로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스님으로 변장하고 이곳에 미륵(彌勒)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륵은 1952년 11월 경 의왕시 내손동 출신인 고금동(高金童 1911년생)씨가 내손동 오리나무골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봉안(奉安)하였다고 한다.

 

● 범바위

사나골 뒤 모락산 중턱에 있다.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 병풍바위

백운산 중봉에서 서북쪽으로 서 있는 바위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병풍처럼 생겼다.

 

● 병풍산

전주남이 뒤에 있는 산으로 병풍처럼 생겼다. 등칙골·전주남이·옻우물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삼형제바위

전주남이 병풍산에 있다. 바위가 3개 층층이 있어 '삼형제바위'라 부른다.

 

● 어내들(御川坪)

의왕농협 오전분소 주변으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수원 현융원 행차때 이곳 개울가에 머물렀다 하여 '어내갈'또는 '어내들(御川坪)'이라 부른다.

 

● 용바위

용머리와 오매기 사이에 있는 다리옆에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용머리 주민들이 고사를 지내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갔다 놓을 만큼 신성시 하는 바위이다. 속설에는 이 바위가 깨지면 용머리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 원골(院谷)

성라자로원 마을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는 마을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원이 있었다고 한다.

 

● 작은고개(小峴)

오매기 뒷골과 학의동 의일사이에 있는 고개로,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길이 서울·과천·수원을 왕래하는 교통로였다.

 

● 작은보식골(小甫食谷)

송파원(松派園) 뒤(북쪽)에 있으며 큰 보식골보다 작은 골짜기이다.

 

● 장고개(場峴)

성라자로원 마을과 오매기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에 오매기 사람들이 군포장으로 장(場)을 보러 갈때면 이고개를 이용하였다.

 

● 장승거리(長丞巨里)

유한양행 입구 인근에 예전에 장승(長丞·長牲)이 있었으므로 '장승거리' 또는 '장승박이'라 부른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공장지대로 변모되었다.

 

● 찬우물(冷井)

등칙골 입구 오전초등학교 못미쳐 사거리 부근에 있던 우물이다. 물이 매우 차다.

 

● 큰고개(大峴)

오매기 공동묘지에서 학의동 의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의일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 큰보식골(大甫食谷)

성라자로원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이 기름진 옥토여서 인근 주민들의 주식원이었는데, 현재는 성라자로원 마을이 들어서 있다.

 

● 큰자리들

오매기 뒷골앞에 있는 들로 들이 넓으므로 '큰자리들'이라 부른다.

 

● 퉁소바위(퉁수바위) 큰보식골 양달쪽 산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조선중엽에 어느 현인이 이곳에서 퉁소를 불었다고 한다.

 

● 평강골(平岡谷)

장 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평평하고 오목하게 생겼다.

 

● 함방들(一田坪)

제일모직 공장이 들어선 곳으로 예전에는 하나의 밭으로 되어 있어서 '한밭들'(一田坪)이라 했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부터 '함방들'로 불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