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안양지역에서 서당식 한문교육이 아닌 서구식 근대학문을 최초로 가르친 교육기관은 호계동 호계도서관 바로 앞에 있던 낙영학교(樂英學校)이다.
낙영학교의 설립시기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 안양초등학교의 설립시기인 1926년보다 17년이나 앞서고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교육구국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설립된 사학(私學) 중의 하나였던 낙영학교는 구한말 참판을 지냈던 조 용하 선생의 사랑채에 설립되었다. 당시 설립된 사학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약 3,000에서 5,000여 학교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의 사학들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가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후에 부천대학의 설립자가 된 몽당(夢堂) 한 항길(韓 恒吉) 선생의 유고집에는 당시 낙영학교의 설립배경과 교직자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교장은 조 참판의 큰아들인 조 동우, 교감은 둘째 아들인 조 동순, 학감은 한 진유(한 항길의 조부), 교사는 인천 영화학교 교사를 역임한 한 용구(한 항길의 둘째 아버지), 경성유학생이던 조 준구(조 참판의 손자), 무관학교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제대한 조 희창 등이었다고 적고 있다.
낙영학교에서 가르쳤던 교과목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경로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노 현택은 당시의 사립학교를 연구한“사립학교구국운동”이라는 논문에서 유년필독(幼年必讀), 대한지리(大韓地理), 대한역사(大韓歷史),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자유론, 애국론 등과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항길 선생도 낙영학교 재학시 서당교육을 병행했고, 폐교 후 옮긴 수원의 장화의숙(長華義塾)에서 사서(四書) 외에 수학, 일어, 한시, 칠언절구, 사율(四律) 및 소고풍(小古風) 등을 열심히 배웠다고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사립학교의 교과목은 신구학문을 같이 병행해서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역사와 위인전기, 지리교육, 체육 및 창가 등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력을 단련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몽당 유고집은 낙영학교가 당시 안양에 마을마다 있었던 서당들로부터 학생을 공급받아 가르쳤다는 것도 적고 있다.
이처럼 늘어난 사립학교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해나가자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제정하여 사학의 설립을 인가제로 바꾸었고, 이미 설립된 사학에 대하여도 6개월 이내에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도록 소급규정을 적용하여 인가를 통제하기 시작하자 전국의 사립학교는 5,000여 개에서 선교사들이 신청한 778개교를 포함하여 820개교로 줄어들고 말았다.
1909년 2월에도 일제는 '기부금모집취제규칙'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기부금을 모집할 때, 내무대신이나 주무대신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실제는 허가를 해주지 않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주로 기부금에 의지하던 사립학교를 재정난으로 폐교하게끔 유도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일제에 의해서 설립되어 황국신민 교육을 하는 공립보통학교로 학생들을 흡수하여 민족정기의 맥을 끊어버리려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안양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사학(私學) 낙영학교는 설립된지 3년 만인 1912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한 항길 선생은 낙영학교 폐교 후, 같은 민족사학인 수원의 장화의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다가 공립학교인 시흥공립보통학교(1911년 설립)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시흥, 안양 지역의 책임자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당시 3.1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주로 도시에서는 민족계열의 사립학교 출신이었고, 시골에서는 서당출신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설립되었던 사학의 기운이 살아남아 3.1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오늘 낙영학교가 있던 자리는 주택으로 들어차 정확한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 사학을 설립했던 조상들의 정신은 기록으로 남아 전하고 있다. 이제 그 자리에 표석이라도 세워 안양 땅에 최초로 설립되었던 사학의 정신을 기렸으면 한다.
참고 : 안양시지, 안양시, 1992.
몽당 한 항길 선생 유고집, 몽당선생 유고편찬위원회, 1989.
성현서당사, 리 진호, 감리교출판사, 1998.
낙영학교의 설립시기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 안양초등학교의 설립시기인 1926년보다 17년이나 앞서고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교육구국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설립된 사학(私學) 중의 하나였던 낙영학교는 구한말 참판을 지냈던 조 용하 선생의 사랑채에 설립되었다. 당시 설립된 사학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약 3,000에서 5,000여 학교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의 사학들은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가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후에 부천대학의 설립자가 된 몽당(夢堂) 한 항길(韓 恒吉) 선생의 유고집에는 당시 낙영학교의 설립배경과 교직자 등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교장은 조 참판의 큰아들인 조 동우, 교감은 둘째 아들인 조 동순, 학감은 한 진유(한 항길의 조부), 교사는 인천 영화학교 교사를 역임한 한 용구(한 항길의 둘째 아버지), 경성유학생이던 조 준구(조 참판의 손자), 무관학교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제대한 조 희창 등이었다고 적고 있다.
낙영학교에서 가르쳤던 교과목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경로로 추론해 볼 수 있다. 노 현택은 당시의 사립학교를 연구한“사립학교구국운동”이라는 논문에서 유년필독(幼年必讀), 대한지리(大韓地理), 대한역사(大韓歷史),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자유론, 애국론 등과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항길 선생도 낙영학교 재학시 서당교육을 병행했고, 폐교 후 옮긴 수원의 장화의숙(長華義塾)에서 사서(四書) 외에 수학, 일어, 한시, 칠언절구, 사율(四律) 및 소고풍(小古風) 등을 열심히 배웠다고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사립학교의 교과목은 신구학문을 같이 병행해서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역사와 위인전기, 지리교육, 체육 및 창가 등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력을 단련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몽당 유고집은 낙영학교가 당시 안양에 마을마다 있었던 서당들로부터 학생을 공급받아 가르쳤다는 것도 적고 있다.
이처럼 늘어난 사립학교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해나가자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제정하여 사학의 설립을 인가제로 바꾸었고, 이미 설립된 사학에 대하여도 6개월 이내에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도록 소급규정을 적용하여 인가를 통제하기 시작하자 전국의 사립학교는 5,000여 개에서 선교사들이 신청한 778개교를 포함하여 820개교로 줄어들고 말았다.
1909년 2월에도 일제는 '기부금모집취제규칙'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기부금을 모집할 때, 내무대신이나 주무대신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실제는 허가를 해주지 않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주로 기부금에 의지하던 사립학교를 재정난으로 폐교하게끔 유도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일제에 의해서 설립되어 황국신민 교육을 하는 공립보통학교로 학생들을 흡수하여 민족정기의 맥을 끊어버리려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안양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사학(私學) 낙영학교는 설립된지 3년 만인 1912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한 항길 선생은 낙영학교 폐교 후, 같은 민족사학인 수원의 장화의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다가 공립학교인 시흥공립보통학교(1911년 설립)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시흥, 안양 지역의 책임자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당시 3.1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주로 도시에서는 민족계열의 사립학교 출신이었고, 시골에서는 서당출신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을사보호조약 이후에 설립되었던 사학의 기운이 살아남아 3.1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오늘 낙영학교가 있던 자리는 주택으로 들어차 정확한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 사학을 설립했던 조상들의 정신은 기록으로 남아 전하고 있다. 이제 그 자리에 표석이라도 세워 안양 땅에 최초로 설립되었던 사학의 정신을 기렸으면 한다.
참고 : 안양시지, 안양시, 1992.
몽당 한 항길 선생 유고집, 몽당선생 유고편찬위원회, 1989.
성현서당사, 리 진호, 감리교출판사, 1998.
2003-06-07 1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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