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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군포의 역사와 각동 지명유래

안양똑딱이 2016. 6. 11. 08:10

군포의 역사 및 각동 지명유래

군포(軍浦)라는 지명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 하는데 이곳에 머물 때 마을 사람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한다.

그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후부터 이 지역을 군포(軍飽)라고 하였으나 시대 변천으로 군포(軍浦)가 되었다.


군포 1동(軍浦 1洞)
본래 과천군 남면 당리이었는데 1914년 3월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 남면 당리로 개칭되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군포읍 당리로 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법류 제4050호에 따라 군포시로 승격 되면서 당리 일원이 군포1동이 되었으며 98년 10월 1일 인구가 적은 동 통합에 따라 당정동(堂井洞) 지역 전체를 흡수하였다.

당동(堂洞)이란 명칭은 옛날부터 뒷산에 당(堂)집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음력 10월 상달과 정월에 정성드려 제사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풍둁습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당정동은 조선시대 현재의 큰말 철로변에 물이 잘나는 샘물이 있었는데 부곡리의 대골에서 당제를 지낼 때 이 물을 떠다가 사용하였다고하여 당우물(堂井)이라고 하다가 그후 이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당정동(堂井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군포 2동(軍浦 2洞)
이 마을은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당리 일부와 부곡리를 병합하여 군포 2동이 되었다.

부곡동(富谷洞)이란 지명은 조선중엽 남양부사가 부임차 이곳 (현 부곡변씨촌)을 지나가던 중에 어느 민가를 찾았더니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기에 주인에게 묻기를 "이 마을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주인 가로되 "예 말씀 드리기 황송하오나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문과 울타리 등 없는 것이 12가지나 되는 빈골(貧谷)이 옵니다."

"어허, 듣기 매우 거북하구나. 아무리 가난해도 빈골은 너무 했구나. 이왕이면 부골(富谷)로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하여, 이후부터 이 마을을 부곡리라 부르게 되었다.


산본 1동(山本 1동)
본래 과천군 남면의 지역으로 수리산 밑이 되므로 산밑 또는 산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안·도장골·둔전·광정·골안을 병합하여 산본리라 하였다. 이후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동 기존단독주택단지가 산본 1동이 되었다.

산본(山本)이란 지명은 일본 사람들의 성(姓)과 같은 이름이니 혹 일제시대(1910∼1945)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는 분들이 있으나,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기록되었던 「산저리」가 산본리(山本里)로 바뀌어 표기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으니 일제시대 이전에 지어진 지명(地名)임이 확실하다.


산본 2동(山本 2洞)
산본 2동은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리 전체 지역을 산본 1동과 산본 2동으로 분동하게 되었으며, 산본 2동 지역은 자연부락인 궁안·도장골·둔전·광정·골안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금정동(衿井洞)
본래 과천군 남면 금정리이었는데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시흥군 남면 금정리로 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군포읍 금정리로 개칭,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군포시 금정동이 되었다.

금정동은 본래 큰 샘이 있으므로 금우물(衿井), 금물 또는 금정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쟁골,느티울,벌금정,그릇점을 병합하여 금정리라 하였다.

또 일설에는 이 마을은 벌판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어느 곳이나 파기만 하면 물이 잘 나와 물깃는 여인들의 옷을 젖신다하여 금정리(衿井里)라 하였다 한다.


재궁동(齋宮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금정동이 됐는데 1992년 5월 1일 금정동에서 분동되어 재궁동이라 하였다.

재궁동이란 명칭은 조선초기 한성부사(漢城府事)를 역임한 송복산(宋福山 : 1390∼1467)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둘째아들인 송찬(宋瓚)이란 분이 세조2년(1456) 단종이 폐위 사사되자 관직을 사절하고 묘하에 두어칸 되는 초려(草廬)를 짓고 그 문과 창을 한양쪽인 북향으로 향하게하여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표명하였을뿐 아니라 빈객들을 들이지 않고 글을 보내 스스로 즐기면 자기의 지위나 행적같은 것을 숨기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이곳을 과천처사(果川處士)라 불렀다.

그후 그의 후손인 여산송씨 문중에서 초려를 개축하여 재실(齋室)로 사용하여, 이후부터 이 인근을 재궁골(齋宮洞)이라 불렀다.


오금동(五禁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으로 금정동 관할이었으나, 그후 1993년 1월 14일 재궁동에서 분동되어 오금동이 되었다.

오금동이란 지명은 밤바위산(182.1m)과 월구지고개에서 북서쪽으로 450m 뻗은 지맥의 끝이 뭉쳐 둥근봉(×85.8)을 만들어서 북서풍을 막아 주므로 둥근봉 남동쪽 마을이 형성되면서 이곳의 지형이 오금과 같다하여 「오금자리」라고 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수리동(修理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으로 산본2동으로 되었다가 이후 1993년 6월 8일 산본 2동에서 분동되어 수리동이 되었다.

수리동이란 지명은 현재의 수리산을 조선시대 안산군의 진산(鎭山)인 취암(鷲岩)을 '독수리봉'이라 불렀는데 '독수리봉'의 '수리'에서 산명이 유래 되었으며 수리산 명칭을 따서 수리동으로 하였다.


궁내동(宮內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 2동 관할이었으나, 1993년 6월 8일 수리동으로 분동된 후 1994년 7월 19일 수리동에서 분동되어 궁내동이 되었다.

궁내동이란 지명은 이곳 마을뒤(서쪽)에 있는 산이 전주이씨의 사패지(賜牌地)인데 이 산에 조선시대 어느 대군의 묘가 있어(1986년 화장되었음) 궁안(宮安)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은 매년 음력 1월 1일과 7월 1일 2회에 걸쳐 궁안 뒤의 태을봉 산록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이곳 지명을 따서 궁내동이라 하였다.


광정동(光亭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로 승격될 당시 산본 2동 관할구역에 속하여 있다가1995년 2월 6일 산본 2동에서 분동되어 광정동으로 되었다.

광정동의 지명은 조선 제9대 성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양군(安陽君)의 묘가 이곳에 있다. 「신축년(1901)에 이곳에 모심」 그의 4대손 중에 옥담(玉潭 : 1579∼1657)이란 분이 이곳에 처음 낙향하여 사시던 증조부(안양군의 아드님)를 비롯한 선조들의 묘를 지키며 묘하(墓下)에 살았다고 한다.

옥담은 어려서부터 칼쓰기 활쏘기등 무예를 좋아하여 성년이 되자 활을 쏘고 풍류를 즐길 정자를 짓는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꿈에 정자터에 찬란한 빛과 함께 우아한 정자의 빛이 나타났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뒤에 정자를 완성 시키고 꿈에 본 정자를 염두에 두고 광정(光亭)이라 불렀는데 후에 마을 이름도 광정이라 했다는 것이다.

광정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과 7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관모봉 아래 수리산 산신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수리산 산신제는 1986년 9월 13일 경기도가 주최한 「제5회 도지사기 쟁탈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시흥군 대표로 참가하여 화합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야동(大夜洞)
본래 광주군 북방면의 지역으로서 대야미리, 도마교리, 둔대리, 속달리를 관할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종32년(1895년) 안산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원(화성)군에 편입되었으며 그후 다시 1994년 12월 26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군포시에 편입 대야동이 되었다.

대야동이란 지명은 대야미리(大夜味里)에서 연유되었으며, 대야미리(大夜味里)는 본래 광주군 북방면의 지역으로서 큰 논배미가 있으므로 한배미, 큰배미 또는 대야미, 대야머리라 하였으며 동지명을 따서 대야동(大夜洞)이라 하였다.


군포시의 역사


군포시(과천군 남면)는 진국(辰國)이 삼한(三韓)으로 분리되면서 마한(馬韓)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 당시의 백제의 도읍지인 광주(廣州)의 속현이었다고 한다.

그 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長壽王)은 동왕63년(475)에 국도(國都)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그 결과로 백제의 수도 한산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부득이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되자 경기도의 전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따라 고구려는 과천시의 전역과 군포시 안양시의 만안구 안양동, 동안구의 호계동 등을 「율목군(栗木郡-一云冬斯?)」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반도 동남부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신라의 영토에 속하게 되는데 이는 신라가 백제와 공동으로 진흥왕(眞興王)12년(551)에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상류지역을 점령하고 그로부터 2년후에는 공동작전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백제를 축출하고 하류마저 점령하였다. 이후 3국이 정립되어 고려가 될 때까지 군포시(과천군 남면)은 신라의 영토로 존속되었다.

문무왕16년(676)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神文王)대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정비하여 9주 5소경을 설치하였다. 9주아래 설치한 군과 현은 경덕왕(景德王)16년(757)에 일대 개혁이 이루어 졌는데 이때에 율목군(栗木郡)은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었다. 이때의 율진군은 과천군, 군포시, 서울특별시의 용산구, 동작구의 일부와 서초구의 일부지역이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하던시기에 지방의 호족이나 성주, 촌장 등에 의하여 후삼국이 성립되었으나 궁예를 축출하고 개성지방에서 세력을 규합한 왕건(王建)에 의하여 후삼국이 통일되고 고려 왕조가 설립되었다.

고려 태조23년(940)에 신라 경덕왕이 실시하여오던 주·군·현의 행정지명을 전면적으로 개정하게 되어 과천군「군포시」는 율진군에서 「과주군(果州郡)」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치관으로 감무관(監務官)을 두었다. 성종때에 지방행정 제도가운데 별호(別號)제를 사용하였는데 과주군의 별호제를 살펴보면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구절(句節)이 있다.

果川 本高句麗 栗木郡(一云 冬斯?) 新羅 景德王 改爲栗津郡 高麗初更 今名顯宗九年末屬後置監務 別號富安(成廟所定) 又號富林 有冠嶽山 「高麗史」권56. 지10. 지리1.)

果川縣 本高句麗栗木郡 新羅改爲 栗津郡高麗改爲果州 顯宗戊午屬廣州任內 後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果川縣監 別號富林(淳化所定, 一作富安) (세종실록 권148. 지리 8.)


위에서 본바와 같이 과천(군포)에 별호는 「부안」또는 「부림」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러한 별호는 고려 성종9년(990)부터 성종13년(994)에 정하여 졌다고 하며 고려에서는 그 당시 성종의 유교적 체제확립과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여 진행중이였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송나라의 문물제도를 바탕으로하여 지방의 특성을 별호로 제정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치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체제와 제도가 완비되어 가자 태종2년(1402)에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를 합하여 경기좌우도라 칭하였으며 이후 지방행정 구역은 점차변화를 보이다가 태종13년(1413)에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다. 당시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는 1목 8도호부 6군 26현으로 개편되었는데 과주군은 「과천현」으로 개칭됨과 아울러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주와 부와 군과 현과의 사이에는 등급이 있었는데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본따서 지관(知官)인 행정관이 있는 자리에도 주(州)자를 부쳐 불렀는데 이러한 예를 들면 「仁州」,「槐州」니하는것이 바로 그것이고 현감으로 「州」자를 부쳐 부르는 고을은 「果州」,「衿州」가 바로 그런예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혼용되어 등급을 알수없어 지관이나 현무관으로 행정관리가 된 고을의 그주를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를 바꾸게 된 것이다. 후에 산이니 천이니하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어 과천으로 개칭된 것이다.

태종13년에 개칭된 과천현은 이듬해 다시 금천현과 합병하여 금천현의 「금」자와 과천현의 「과」자를 합하여 「금과현」이라고 칭하였으나 불과 두어달만에 파하고 종전대로 복구하였다.

이어 세조2년(1456)에 다시 금천현과 병합하였지만 역시 얼마 안가서 파하고 예전의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은 연유는 세조6년(1462) 5월 3일 이조(吏曹)에서 과천백성들의 상언에 의하여 이미 과천을 혁파하고 금천에 부쳤으나 과천현과 금천현의 거리가 30리이고 사객이 빈번하게 왕래하여 접대하기 어려우므로 치소를 종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그대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세조이후 해정구역은 변동없이 지내오다가 일본의 침입에 의하여 지방제도가 일대개편을 보게 되었다. 1895년 1월 7일 일본의 조정에 의하여 제정된 홍범(洪範)이 있었는데 그 14조 중에는 지방관제를 개정하고 지방관리의 직권을 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인하여 동년 5월 26일에 전문6조인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건」을 공포하여 지방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하여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의 지방행정단위가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으며 이에 따라 과천현이 과천군이 되었다.

그러나 23부제가 불합리하여 시행한지 1년 2개월만에 폐지되는 동시에 이듬해 8월 4일 칙령 제36호 「지방제도관제 봉급경비 개정의건」을 공포하여 13개도제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에 따라 경기도의 개편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4부 치소:수원)
一 등 광주부 개성부 상화부 인천부
二 등 수원군
三 등 여주군 양주군 장단군 통진군
四 등 「과천군」 안산군 시흥군 파주군 이천군 이하생략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동년 9월 30일 일본칙령 제 354호를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관제를 공포하여 36년간의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4월 1일에는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경성부, 군면제를 도입하는 등의 부분적인 도, 부, 군, 면 간의 경계변동이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발행된 「구한국지방행정명칭일람」(1912년)에 의하면 관천군 남면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 남면(10개리)

산본동, 당리, 용호동, 장간리, 부곡리, 괴곡리, 금정리, 당정리, 봉성리, 초막동 등 10개리이다. 1914년 3월 1일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등 3개군이 합병하여 시흥군이되고 과천군 남면 (군포시)은 시흥군 남면이 되었으며 관할하는 리수는 다음과 같다.

□ 남면(5개리)
당 리 남면 당리 용호동
당정리 남면 당정리 봉성리
금정리 남면 금정리 괴곡리
산본리 남면 산본동
부곡리 남면 부곡리 장간리

1914년 3월 1일 시흥군 남면이 된후 일제를 거쳐 건국후에도 행정구역의 변동이나 명칭에 대한 변경이 없이 지내오다가 1979년 4월 7일 대통령 제9409호(1979. 4. 7. 공포)에 의하여 동년 5월 1일 시흥군 남면이 시흥군 군포읍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경제개발이 활발히 전개되고 산업시설이 입지가 유리한 군포지역으로 이전되면서 지역의 개발속도가 급진전되었다. 이에 수반하여 행정의 수요도 날로 증가하므로 이에 대한 효율적인 지역관리를 위하여 정부에서는 법률 제4050호(1988. 12. 31. 공포)에 의하여 1989년 1월 1일 시흥군을 분리하여 군포읍을 군포시로 의왕읍을 위왕시로 소래읍과 수암면, 군자면을 통합하여 시흥시로 승격시켰다. 이로 인하여 군포시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지위를 갖이고 주민위주의 행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관할하는 동으로는 군포시 동의 명칭 및 관할구역에 관한 조례 제22호(1989. 1. 1. 공포)에 의하여 군포시 당동 당정동 부곡동 산본동 금정동등 5개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하부기관으로는 군포시 행정운영 동의설치 및 동장정수에 관한조례 제23호(1989. 1. 1.공포)에 의하여 당동1부를 군포1동으로 당동1부와 부곡동을 합하여 군포2동으로 당정동을 당정동으로 산본동을 분할하여 산본1동과 산본2동으로 금정동을 금정동으로하여 6개의 행정동을 설치하였다.

그후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산본동과 금정동 일부지역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고 주택이 건설되면서 입주민이 증가하고 행정수요가 증가하면서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조례 제281호(1992. 4. 28. 공포)에 의하여 1992년 5월 1일 금정동을 분동하여 행정동인 재궁동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행정동이 7개동이 되었다.

또한 조례 제295호(1993. 1. 6. 공포)에 의하여 시청사를 당동에서 금정동 844번지 현청사로 1992년 12월 2일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후 조례 제298호(1993. 1. 14. 공포)로 재궁동을 분동하여 1993년 1월 14일 오금동이 신설하여 행정동이 8개동이 되었다.

조례 제308호(1993. 6. 8. 공포)에 의하여 산본2동을 분할하여 1993년 6월 8일 수리동을 신설함으로 행정동이 9개동이 되었다.

또한 1년후에 조례 제347호(1994. 7. 19. 공포)로 수리동을 분할하여 1994년 7월 19일 궁내동을 신설하여 행정동이 10개동이 되었다.

시로 승격한 후에 법정동은 변동없이 내려오다가 대통령령 제 14,434호(1994. 12. 26. 공포)에 의하여 행정구역의 일부조정으로 화성군 반월면 둔대리, 속달리, 대야미리, 도마교리 등 4개리가 군포시로 편입됨에 따라 조례 제363호(1994. 12. 29. 공포)에 의하여 군포시 둔대동, 속달동, 대야미동, 도마교동등 4개 법정동이 증설되어 총9개동이 되었으며 조례 제364호(1994. 12. 29. 공포)에 의하여 4개동의 행정을 수행할 행정동으로 대야미동이 설치되었다. 이로인하여 행정동이 11개 동으로 증가하였다.

그후 입주시민의 증가로 동행정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산본2동이 조례 제381호(1995. 2. 28. 공포)에 의하여 1995년 2월 28일 분할되어 광정동을 신설하였다. 이로 인하여 행정동은 12개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자료:『시흥군지』,『과천향토사』,『군포시자치법규집』,『군포시 통계연보』

2003-06-13 09:5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