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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군포 역사 및 옛 자연마을 지명 유래

안양똑딱이 2016. 6. 11. 08:10

군포의 역사 및 각동 지명유래

 

군포시의 역사

군포시(과천군 남면)는 진국(辰國)이 삼한(三韓)으로 분리되면서 마한(馬韓)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 당시의 백제의 도읍지인 광주(廣州)의 속현이었다고 한다.

그 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長壽王)은 동왕63년(475)에 국도(國都)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그 결과로 백제의 수도 한산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부득이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되자 경기도의 전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따라 고구려는 과천시의 전역과 군포시 안양시의 만안구 안양동, 동안구의 호계동 등을 「율목군(栗木郡-一云冬斯?)」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반도 동남부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신라의 영토에 속하게 되는데 이는 신라가 백제와 공동으로 진흥왕(眞興王)12년(551)에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상류지역을 점령하고 그로부터 2년후에는 공동작전으로 고구려를 공격한 백제를 축출하고 하류마저 점령하였다. 이후 3국이 정립되어 고려가 될 때까지 군포시(과천군 남면)은 신라의 영토로 존속되었다.

문무왕16년(676)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神文王)대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정비하여 9주 5소경을 설치하였다. 9주아래 설치한 군과 현은 경덕왕(景德王)16년(757)에 일대 개혁이 이루어 졌는데 이때에 율목군(栗木郡)은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었다. 이때의 율진군은 과천군, 군포시, 서울특별시의 용산구, 동작구의 일부와 서초구의 일부지역이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하던시기에 지방의 호족이나 성주, 촌장 등에 의하여 후삼국이 성립되었으나 궁예를 축출하고 개성지방에서 세력을 규합한 왕건(王建)에 의하여 후삼국이 통일되고 고려 왕조가 설립되었다.

고려 태조23년(940)에 신라 경덕왕이 실시하여오던 주·군·현의 행정지명을 전면적으로 개정하게 되어 과천군「군포시」는 율진군에서 「과주군(果州郡)」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치관으로 감무관(監務官)을 두었다. 성종때에 지방행정 제도가운데 별호(別號)제를 사용하였는데 과주군의 별호제를 살펴보면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구절(句節)이 있다.

果川 本高句麗 栗木郡(一云 冬斯?) 新羅 景德王 改爲栗津郡 高麗初更 今名顯宗九年末屬後置監務 別號富安(成廟所定) 又號富林 有冠嶽山 「高麗史」권56. 지10. 지리1.)

果川縣 本高句麗栗木郡 新羅改爲 栗津郡高麗改爲果州 顯宗戊午屬廣州任內 後置監務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果川縣監 別號富林(淳化所定, 一作富安) (세종실록 권148. 지리 8.)


위에서 본바와 같이 과천(군포)에 별호는 「부안」또는 「부림」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러한 별호는 고려 성종9년(990)부터 성종13년(994)에 정하여 졌다고 하며 고려에서는 그 당시 성종의 유교적 체제확립과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여 진행중이였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송나라의 문물제도를 바탕으로하여 지방의 특성을 별호로 제정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치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체제와 제도가 완비되어 가자 태종2년(1402)에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를 합하여 경기좌우도라 칭하였으며 이후 지방행정 구역은 점차변화를 보이다가 태종13년(1413)에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다. 당시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는 1목 8도호부 6군 26현으로 개편되었는데 과주군은 「과천현」으로 개칭됨과 아울러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주와 부와 군과 현과의 사이에는 등급이 있었는데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본따서 지관(知官)인 행정관이 있는 자리에도 주(州)자를 부쳐 불렀는데 이러한 예를 들면 「仁州」,「槐州」니하는것이 바로 그것이고 현감으로 「州」자를 부쳐 부르는 고을은 「果州」,「衿州」가 바로 그런예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혼용되어 등급을 알수없어 지관이나 현무관으로 행정관리가 된 고을의 그주를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를 바꾸게 된 것이다. 후에 산이니 천이니하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어 과천으로 개칭된 것이다.

태종13년에 개칭된 과천현은 이듬해 다시 금천현과 합병하여 금천현의 「금」자와 과천현의 「과」자를 합하여 「금과현」이라고 칭하였으나 불과 두어달만에 파하고 종전대로 복구하였다.

이어 세조2년(1456)에 다시 금천현과 병합하였지만 역시 얼마 안가서 파하고 예전의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은 연유는 세조6년(1462) 5월 3일 이조(吏曹)에서 과천백성들의 상언에 의하여 이미 과천을 혁파하고 금천에 부쳤으나 과천현과 금천현의 거리가 30리이고 사객이 빈번하게 왕래하여 접대하기 어려우므로 치소를 종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그대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세조이후 해정구역은 변동없이 지내오다가 일본의 침입에 의하여 지방제도가 일대개편을 보게 되었다. 1895년 1월 7일 일본의 조정에 의하여 제정된 홍범(洪範)이 있었는데 그 14조 중에는 지방관제를 개정하고 지방관리의 직권을 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인하여 동년 5월 26일에 전문6조인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건」을 공포하여 지방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하여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의 지방행정단위가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으며 이에 따라 과천현이 과천군이 되었다.

그러나 23부제가 불합리하여 시행한지 1년 2개월만에 폐지되는 동시에 이듬해 8월 4일 칙령 제36호 「지방제도관제 봉급경비 개정의건」을 공포하여 13개도제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에 따라 경기도의 개편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4부 치소:수원)
一 등 광주부 개성부 상화부 인천부
二 등 수원군
三 등 여주군 양주군 장단군 통진군
四 등 「과천군」 안산군 시흥군 파주군 이천군 이하생략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동년 9월 30일 일본칙령 제 354호를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관제를 공포하여 36년간의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4월 1일에는 경기도령 제3호에 따라 경성부, 군면제를 도입하는 등의 부분적인 도, 부, 군, 면 간의 경계변동이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발행된 「구한국지방행정명칭일람」(1912년)에 의하면 관천군 남면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 남면(10개리)

산본동, 당리, 용호동, 장간리, 부곡리, 괴곡리, 금정리, 당정리, 봉성리, 초막동 등 10개리이다. 1914년 3월 1일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등 3개군이 합병하여 시흥군이되고 과천군 남면 (군포시)은 시흥군 남면이 되었으며 관할하는 리수는 다음과 같다.

□ 남면(5개리)
당 리 남면 당리 용호동
당정리 남면 당정리 봉성리
금정리 남면 금정리 괴곡리
산본리 남면 산본동
부곡리 남면 부곡리 장간리

1914년 3월 1일 시흥군 남면이 된후 일제를 거쳐 건국후에도 행정구역의 변동이나 명칭에 대한 변경이 없이 지내오다가 1979년 4월 7일 대통령 제9409호(1979. 4. 7. 공포)에 의하여 동년 5월 1일 시흥군 남면이 시흥군 군포읍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경제개발이 활발히 전개되고 산업시설이 입지가 유리한 군포지역으로 이전되면서 지역의 개발속도가 급진전되었다. 이에 수반하여 행정의 수요도 날로 증가하므로 이에 대한 효율적인 지역관리를 위하여 정부에서는 법률 제4050호(1988. 12. 31. 공포)에 의하여 1989년 1월 1일 시흥군을 분리하여 군포읍을 군포시로 의왕읍을 위왕시로 소래읍과 수암면, 군자면을 통합하여 시흥시로 승격시켰다. 이로 인하여 군포시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지위를 갖이고 주민위주의 행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관할하는 동으로는 군포시 동의 명칭 및 관할구역에 관한 조례 제22호(1989. 1. 1. 공포)에 의하여 군포시 당동 당정동 부곡동 산본동 금정동등 5개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하부기관으로는 군포시 행정운영 동의설치 및 동장정수에 관한조례 제23호(1989. 1. 1.공포)에 의하여 당동1부를 군포1동으로 당동1부와 부곡동을 합하여 군포2동으로 당정동을 당정동으로 산본동을 분할하여 산본1동과 산본2동으로 금정동을 금정동으로하여 6개의 행정동을 설치하였다.

그후 신도시 건설로 인하여 산본동과 금정동 일부지역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고 주택이 건설되면서 입주민이 증가하고 행정수요가 증가하면서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조례 제281호(1992. 4. 28. 공포)에 의하여 1992년 5월 1일 금정동을 분동하여 행정동인 재궁동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행정동이 7개동이 되었다.

또한 조례 제295호(1993. 1. 6. 공포)에 의하여 시청사를 당동에서 금정동 844번지 현청사로 1992년 12월 2일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후 조례 제298호(1993. 1. 14. 공포)로 재궁동을 분동하여 1993년 1월 14일 오금동이 신설하여 행정동이 8개동이 되었다.

조례 제308호(1993. 6. 8. 공포)에 의하여 산본2동을 분할하여 1993년 6월 8일 수리동을 신설함으로 행정동이 9개동이 되었다.

또한 1년후에 조례 제347호(1994. 7. 19. 공포)로 수리동을 분할하여 1994년 7월 19일 궁내동을 신설하여 행정동이 10개동이 되었다.

시로 승격한 후에 법정동은 변동없이 내려오다가 대통령령 제 14,434호(1994. 12. 26. 공포)에 의하여 행정구역의 일부조정으로 화성군 반월면 둔대리, 속달리, 대야미리, 도마교리 등 4개리가 군포시로 편입됨에 따라 조례 제363호(1994. 12. 29. 공포)에 의하여 군포시 둔대동, 속달동, 대야미동, 도마교동등 4개 법정동이 증설되어 총9개동이 되었으며 조례 제364호(1994. 12. 29. 공포)에 의하여 4개동의 행정을 수행할 행정동으로 대야미동이 설치되었다. 이로인하여 행정동이 11개 동으로 증가하였다.

그후 입주시민의 증가로 동행정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산본2동이 조례 제381호(1995. 2. 28. 공포)에 의하여 1995년 2월 28일 분할되어 광정동을 신설하였다. 이로 인하여 행정동은 12개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자료:『시흥군지』,『과천향토사』,『군포시자치법규집』,『군포시 통계연보』

 

 

 

 

 

 

군포(軍浦)라는 지명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 하는데 이곳에 머물 때 마을 사람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한다.

그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후부터 이 지역을 군포(軍飽)라고 하였으나 시대 변천으로 군포(軍浦)가 되었다.

 

군포 1동(軍浦 1洞)
본래 과천군 남면 당리이었는데 1914년 3월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 남면 당리로 개칭되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군포읍 당리로 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법류 제4050호에 따라 군포시로 승격 되면서 당리 일원이 군포1동이 되었으며 98년 10월 1일 인구가 적은 동 통합에 따라 당정동(堂井洞) 지역 전체를 흡수하였다.

당동(堂洞)이란 명칭은 옛날부터 뒷산에 당(堂)집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음력 10월 상달과 정월에 정성드려 제사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풍둁습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당정동은 조선시대 현재의 큰말 철로변에 물이 잘나는 샘물이 있었는데 부곡리의 대골에서 당제를 지낼 때 이 물을 떠다가 사용하였다고하여 당우물(堂井)이라고 하다가 그후 이 마을 이름도 우물 이름을 따서 당정동(堂井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군포 2동(軍浦 2洞)
이 마을은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당리 일부와 부곡리를 병합하여 군포 2동이 되었다.

부곡동(富谷洞)이란 지명은 조선중엽 남양부사가 부임차 이곳 (현 부곡변씨촌)을 지나가던 중에 어느 민가를 찾았더니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기에 주인에게 묻기를 "이 마을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주인 가로되 "예 말씀 드리기 황송하오나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문과 울타리 등 없는 것이 12가지나 되는 빈골(貧谷)이 옵니다."

"어허, 듣기 매우 거북하구나. 아무리 가난해도 빈골은 너무 했구나. 이왕이면 부골(富谷)로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하여, 이후부터 이 마을을 부곡리라 부르게 되었다.

산본 1동(山本 1동)
본래 과천군 남면의 지역으로 수리산 밑이 되므로 산밑 또는 산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안·도장골·둔전·광정·골안을 병합하여 산본리라 하였다. 이후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동 기존단독주택단지가 산본 1동이 되었다.

산본(山本)이란 지명은 일본 사람들의 성(姓)과 같은 이름이니 혹 일제시대(1910∼1945)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는 분들이 있으나,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기록되었던 「산저리」가 산본리(山本里)로 바뀌어 표기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으니 일제시대 이전에 지어진 지명(地名)임이 확실하다.

 

산본 2동(山本 2洞)
산본 2동은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리 전체 지역을 산본 1동과 산본 2동으로 분동하게 되었으며, 산본 2동 지역은 자연부락인 궁안·도장골·둔전·광정·골안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금정동(衿井洞)
본래 과천군 남면 금정리이었는데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시흥군 남면 금정리로 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군포읍 금정리로 개칭,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군포시 금정동이 되었다.

금정동은 본래 큰 샘이 있으므로 금우물(衿井), 금물 또는 금정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쟁골,느티울,벌금정,그릇점을 병합하여 금정리라 하였다.

또 일설에는 이 마을은 벌판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어느 곳이나 파기만 하면 물이 잘 나와 물깃는 여인들의 옷을 젖신다하여 금정리(衿井里)라 하였다 한다.

 

재궁동(齋宮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금정동이 됐는데 1992년 5월 1일 금정동에서 분동되어 재궁동이라 하였다.

재궁동이란 명칭은 조선초기 한성부사(漢城府事)를 역임한 송복산(宋福山 : 1390∼1467)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둘째아들인 송찬(宋瓚)이란 분이 세조2년(1456) 단종이 폐위 사사되자 관직을 사절하고 묘하에 두어칸 되는 초려(草廬)를 짓고 그 문과 창을 한양쪽인 북향으로 향하게하여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표명하였을뿐 아니라 빈객들을 들이지 않고 글을 보내 스스로 즐기면 자기의 지위나 행적같은 것을 숨기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이곳을 과천처사(果川處士)라 불렀다.

그후 그의 후손인 여산송씨 문중에서 초려를 개축하여 재실(齋室)로 사용하여, 이후부터 이 인근을 재궁골(齋宮洞)이라 불렀다.

 

오금동(五禁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으로 금정동 관할이었으나, 그후 1993년 1월 14일 재궁동에서 분동되어 오금동이 되었다.

오금동이란 지명은 밤바위산(182.1m)과 월구지고개에서 북서쪽으로 450m 뻗은 지맥의 끝이 뭉쳐 둥근봉(×85.8)을 만들어서 북서풍을 막아 주므로 둥근봉 남동쪽 마을이 형성되면서 이곳의 지형이 오금과 같다하여 「오금자리」라고 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수리동(修理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으로 산본2동으로 되었다가 이후 1993년 6월 8일 산본 2동에서 분동되어 수리동이 되었다.

수리동이란 지명은 현재의 수리산을 조선시대 안산군의 진산(鎭山)인 취암(鷲岩)을 '독수리봉'이라 불렀는데 '독수리봉'의 '수리'에서 산명이 유래 되었으며 수리산 명칭을 따서 수리동으로 하였다.

궁내동(宮內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 2동 관할이었으나, 1993년 6월 8일 수리동으로 분동된 후 1994년 7월 19일 수리동에서 분동되어 궁내동이 되었다.

궁내동이란 지명은 이곳 마을뒤(서쪽)에 있는 산이 전주이씨의 사패지(賜牌地)인데 이 산에 조선시대 어느 대군의 묘가 있어(1986년 화장되었음) 궁안(宮安)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은 매년 음력 1월 1일과 7월 1일 2회에 걸쳐 궁안 뒤의 태을봉 산록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이곳 지명을 따서 궁내동이라 하였다.

 

광정동(光亭洞)
1989년 1월 1일 군포시로 승격될 당시 산본 2동 관할구역에 속하여 있다가1995년 2월 6일 산본 2동에서 분동되어 광정동으로 되었다.

광정동의 지명은 조선 제9대 성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양군(安陽君)의 묘가 이곳에 있다. 「신축년(1901)에 이곳에 모심」 그의 4대손 중에 옥담(玉潭 : 1579∼1657)이란 분이 이곳에 처음 낙향하여 사시던 증조부(안양군의 아드님)를 비롯한 선조들의 묘를 지키며 묘하(墓下)에 살았다고 한다.

옥담은 어려서부터 칼쓰기 활쏘기등 무예를 좋아하여 성년이 되자 활을 쏘고 풍류를 즐길 정자를 짓는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꿈에 정자터에 찬란한 빛과 함께 우아한 정자의 빛이 나타났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뒤에 정자를 완성 시키고 꿈에 본 정자를 염두에 두고 광정(光亭)이라 불렀는데 후에 마을 이름도 광정이라 했다는 것이다.

광정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과 7월초에 길일을 택해서 관모봉 아래 수리산 산신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수리산 산신제는 1986년 9월 13일 경기도가 주최한 「제5회 도지사기 쟁탈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시흥군 대표로 참가하여 화합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야동(大夜洞)
본래 광주군 북방면의 지역으로서 대야미리, 도마교리, 둔대리, 속달리를 관할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종32년(1895년) 안산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원(화성)군에 편입되었으며 그후 다시 1994년 12월 26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군포시에 편입 대야동이 되었다.

대야동이란 지명은 대야미리(大夜味里)에서 연유되었으며, 대야미리(大夜味里)는 본래 광주군 북방면의 지역으로서 큰 논배미가 있으므로 한배미, 큰배미 또는 대야미, 대야머리라 하였으며 동지명을 따서 대야동(大夜洞)이라 하였다.

 

군포 동네와 마을 옛 지명 유래

 

군포 1

 

군포역 : 군포에 있는 경부선의 기차정거장이다. 광무 8(1904)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얻어 개통됨에 따라 190511일부터 업무를 개시한 이후 군포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고 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정식 행정지명인 군포읍으로 개명되었으며, 시 승격으로 오늘의 군포시가 되는 등 군포라는 이름이 깊이 뿌리박은 근원은 군포역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군포역 주변은 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군포읍 소재지로서 학교·우체국·경찰지서·상설시장 등이 있다.

 

당넘어(堂下里) : 계명고교 주변에 자리잡은 마을로 정식명칭은 당하리(堂下里)이다. 선시대에 당말 사람들이 마을의 편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이 마을 뒤에 있는 도당사(都堂詞)에서 지냈다. 이후 도당사 너머에 취락이 형성되자 "당넘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의 동동 제의(祭儀)와 관련하여 지명이 유래된 사실을 알수 있다.

 

도램말(渡來洞) : 군포1동 동사무소 주변으로써 밤바위산과 47번 국도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도내말 즉 길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도랫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는 옛날 이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았다. 형은 자식이 없으나 아우는 슬하에 자식이 많아 형에게 자식을 양자할 것을 제의했으나, 형이 이를 거절하므로 동생이 멀리 떠나가 살았다고 한다. 그 후 형이 죽자 아우가 돌아와 살았는데, 이로부터 이 마을을 도래말이라 했다.

 

동막 : 군포중학교 아래(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의 동막마을(花山洞)이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구릉에는 키 큰 나무가 없어 봄철이면 진달래꽃·철쭉꽃이 만발하여 '화산동'이라고 불렀다.

 

동막의 지명유래는 다른 지방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충북 청원군 강내면 내곡리는 "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강원 철원군 갈말은 "옹기를 만드는 막이 있었으므로"

충남 보령시 옹천군 평리는 "나무토막으로 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등으로 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군포의 동막에도 아마 무슨 막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헤아려본다. 농경사회에서 점심이나 휴식을 위해 편의시설인 모정을 일반적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아구랑(阿口洞) : 상업은행 군포지점 위(서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조선 중엽에 흰개 2마리가 입을 벌리고 이곳 언덕을 넘어 갔다고 하여 아구랑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곳의 지세가 개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아구랑 이라 했다고도 한다.

 

우래산 (雨來山) : 우래산(129.5m)은 군포고등학교와 군포중학교 사이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는 세조대 호조참판과 대호군을 역임한 홍일동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답사하여 보니 법해암 뒤에 몇 기의 산소가 있을 뿐 장군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산 이름의 유래는 무엇일까? 혹 옛날에 홍장군의 묘를 모실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산에 올랐는데 마침 비가 와서 비에 젖었던 고로 그 후 비오던 산 또는 비맞았던 산이라 해서 '우래산'이라고 전해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어느 지체높은 분이 이 산에 올랐다가 비를 맞았기에 이르는 말은 아닌지 등으로 추리해 본다.

 

월구지 고개 : 재궁동의 쟁골과 당동의 아구랑 사이에 있는 고개인데, 고갯마루에 법해암이 있다. 이 고개를 일명 '당말고개' 또는 '굴다리'라고도 한다. '월구지고개' 는 달이 걸치는 고개 즉 '월걸이 고개'가 변한 이름이라고 한다.

 

흐린내 : 이 내는 군포1, 오금동, 대야동의 경계에 있는 감투봉(189.1m)에서 발원하여 군포1동의 새터말골, 당거리들을 지나 군포1, 2동과 당정동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린내교, 금정1, 금정2, 검정3교를 지나 금호교 못 미쳐서 맑은내 즉 군포천과 합류하여 안양천이 되고 한강으로 유입되는 내이다. 흐린내라는 이름은 이 내의 상류지역이 진흙지대이므로 물이 언제나 흐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군포 2

 

부곡 : 전설은 조선중엽 어느해인지 몹시 가물어 인근의 마을에서는 심은 모가 모두 말라 죽어갔으나 오직 이마을의 논에는 물이 많아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마을을 부자 마을이라 하여 부곡리가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전설은 조선중엽 남양부사가 부임차 이곳(현 부곡변씨촌)에 들려 어느 민가를 찾았더니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기에 주인에게 묻기를 "이 마을의 무었인가?" 하니 주인 가로되 "예 말씀 드리기 황송하오나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문과 울타리등 없는 것이 12가지나 되는 빈골이 옵니다." "어허, 듣기가 매우 거북하구나. 아무리 가난해도 빈골은 너무 했구나. 이왕이면 부골로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이후부터 이 마을을 부곡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전설은 부곡리에는 본래 큰 부자가 살았으므로 대골 또는 부곡이라 하였다 한다.

 

감투봉 : 이 산은 수리산의 능선이 대야동과 수리동 사이로 뻗어내려 밤바위산과 맞닿는 곳에 우뚝 솟은 산이며 오금동, 군포2, 대야동 등 3개 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본래 산 정상에서 세 곳으로 물이 흐른다 하여 삼파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모양이 감투와 같다고 명명되었는데, 해발 189.1m이다. 물이 세 곳으로 흐른다함은 오금동으로 흐르는 물은 산본천이 되고, 군포2동으로 흐르는 물은 흐린내가 되고, 대야미동으로 흐르는 물은 반월천이 된다. 다음은 감투봉과 관련된 전설이다. 고려 말엽 이 고을에 살던 현풍 곽씨의 딸이 주씨집으로 출가를 했다. 그녀는 시부모를 봉양하던 중 친정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더니 친정아버지는 아들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죽거든 흰나무가 세 그루 있는 북서쪽 높은 봉우리에 묻어다오" 그러나 이 같은 유언을 남긴 친정아버지는 타계하지 않고 시아버지가 먼저 돌아갔다. 그녀는 친정식구 몰래 시아버지를 친정아버지가 말한 명당에 모셨다. 그 후부터 새벽이면 산봉우리에서 용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빠들은 사돈이 자기 아버지가 쓸 묘자리를 차지한 것을 알고 여동생에게 이장을 권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어느날 큰아들은 낫을 가지고 산봉우리에 올라가 싸우던 두 마리의 용중 한 마리를 베어죽었다. 죽은 용은 곧 자기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얼마 후 그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주씨네는 부유하게 살았지만 곧 몰락했고, 곽씨네는 번창했다고 한다.

 

갯다리 : 부곡 변씨촌과 고랑치기(고랑리골) 사이에 있다. 본래는 나무다리였는데, 1987년에 마을주민들이 큰 전신주 4개로 다리를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이곳은 해발 47.5m이다. 또 갯다리의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라고 쓰여있다. 이 지역의 물은 황구지천으로 흐른다.

 

고랑치기 : 변씨촌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일명 고랑리골이라고 한다.

 

구선말 (九仙洞) : 구선말을 무작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성산 : 금성산(124.9m)은 군포2(부곡)과 대야동(대야미)사이에 있는 산이다. 산정 서쪽에 호랑이굴이 있다고 한다.

 

느진골 : 군포2동의 삼성마을과 대야동, 대야미동과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지대가 높아 다른 지역보다 항상 늦게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느진골이라 부른다. 해발은 76m이다.

 

당거리들 (堂街坪) : 당거리들은 '당동 가로(街路) 앞의 들'이라는 뜻인 듯하다. 즉 토오골과 요골, 새터말골 등의 물이 합류하여 들이면서 흐린내의 상류이고, 군포초등학교 앞(남쪽)의 넓은 들이기도 하다. 안양베네스트골프클럽의 북쪽으로 과거 대표적인 논농사 지역이었다.

 

도꼬마치고개 : 일명 도둑막고개로 새터말과 용호동 사이에 밤바위산의 지맥이 융기하여 동주하는 능선이다. 능선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고갯길을 말하며 옛부터 강도·산적 등이 들끓어 해가 지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왕래하기를 꺼렸다는 고개이다.

 

무지개골 : 무지개골은 구선말 북쪽에 있는 서고동저의 골짜기이다. 이곳의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에서 무지개가 섰다고 하여 '무지개골'이라 부른다. 일명 '무작골'이라고도 한다.

 

밤바위산 : 월구지고개(100m)에서 감투봉(189.1m)까지 지형상 직선거리 2.1km로 군포시의 한 가운데를 북서와 남동으로 양분하는 산으로 해발 182.1m이다.

 

변씨촌 : 이 마을은 원주 변씨 창의공파 11세손인 변귀상이란 분이 낙향하여 터를 잡은 이래 그의 후손인 원주 변씨들이 집단으로 살았다. 외지의 사람들이 오면 변씨 외에는 다른 성씨는 살지 않는 줄로 착각할 정도로 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어 변씨골 또는 부곡 변씨촌이라 불렀다.

 

산호골 : 고래실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삼성 (三姓, 三聖, 三星) : 이 마을의 칭호를 삼성이라고 하는데, 원래 이곳의 칭호는 '삼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세이'가 어느 때 누구에 의하여 삼성으로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단지 이곳의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안 주씨, 인동 장씨, 현풍 곽씨의 세 성씨가 처음에 세거하여 살고있어 마을 호칭을 삼성(三姓)이라 하였다. 둘째로 주자를 모신 영당이 있어 이를 모현재라고 하였다. 또한 옛날 이곳에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수도에 정진하였다. 한편 다른 지역보다도 먼저 이곳에 서당이 설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옛 성인들의 성리학을 수학하여 삼성(三聖)이라고 불렀다. 셋째는 별이 빛난다는 뜻인데,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산자수려하고 서당이 있어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타지역 주민들이 부러워하는 마을로서 빛나고 있다고 하여 삼성(三星)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지명이 단지 구전에 의하여 전해질뿐이고 기록은 확인할 길이 없다.

 

새터말골 : 새터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새터말의 어원은 말 그대로 '새로 자리잡은 마을' '새로 조성된 마을' 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솔태백이 : 정터벌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옛날 묘한 기가 있었는데, 묘 옆에 큰 소나무가 있어 '솔태백이'라 불렀다. 현재는 소나무가 없다.

 

쑥고개 : 누진봉 북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300m 거리의 지점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 동쪽으로는 쑥고개가 구선말까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도마교리의 송정으로 가는 골짜기가 있다. 구선말에서 송정으로 넘나들던 고개인데, 다복쑥이 많은 고개이므로 쑥고개라고 하였다. 해발은 75m이다.

 

앞고래실골 : 감투봉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골짜기로 삼성마을과 황동마을 사이로 해서 47번 국도변까지를 말한다. '고래실'은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 '고논'을 말함이니 마을 앞에 기름진 논이 있는 골 즉 문적옥답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 된다.

 

여사벌 (麗使谷坪) : 여사벌은 고려시대 중국 사신들이 서해바다를 건너 남양을 거쳐 이곳을 경유 한양에 갔다고 한다. 금성산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용사갈 : 느진골에서 발원하여 검바위를 거쳐 왕송저수지에 합류되는 하천을 말한다.

 

용호동 :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남면 용호동이라 불렀던 이 마을은 본래 '요골'이라 불렀다. 유래는 이 마을 북서간 산중턱에 있는 동래 정씨 선대의 묘가 풍수로 보아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되므로 이곳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용호동이라 한다. 그런데 이 묘는 1970년대 말엽에 천묘하여 현재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장승거리 : 장승거리(長丞巨里)는 장터벌과 부곡육교 사이를 말한다. 이곳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장승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장승은 지난날에 이수(里數)를 나타내거나 마을의 수호신으로 동네 어귀나 길가에 세운 사람모양의 형상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드는데, 윗부분에 사람의 얼굴을 새겼으며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광주 새우대와 과천 새우대의 경계이니 장승이 있었음직하다. 현재도 의왕시와 군포시의 경계이다

장터벌 : 부곡 전철역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에 장이 서는 마을이었다는 이름인 듯하다. 장터벌 동쪽 150m 지점에서 남류하는 하천 가의 산각점()43m인데, 옛날에 이 하천 상류(북쪽) 1,150m거리에 있는 갯다리(75m)에 바닷물이 들어왔었다는 전설로 미루어보면 이곳 장터벌까지는 새우젓 배라도 드나들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옛날에는 장이 충분히 섰으리라 짐작이 가는 곳이다.

 

지봉산 : 지봉산(芝峯山)은 차돌박이골의 남쪽, 무작골의 서쪽, 느진골의 동쪽 등으로 둘러싸인 해발 111.8m의 산이다. 웃 새우대 사람들이 매년 71일 산신계를 지낼만큼 신성시하는 산이라고 한다.

 

차돌박이골 : 지봉산 북쪽부터 골짜기가 시작되어 구산말 동쪽의 차돌박이 저수지에 이르는 골짜기이다. 이 부근에 차돌(석영)이 많이 있다는 지명이다.

 

토오골 : 군포초등학교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의 막바지인 밤바위산 능선의 고개너머가 느티울 최남단의 골짜기이다. 즉 오금동 3단지에 영험한 샘물이 있다는 고랑치기이다. 두 곳을 연결하는 산본신도시 6번 진입도로 개설공사가 진행 중이다.

 

호꼬뿌리 : 금성산에서 동사면의 느진골로 돌출한 산 뿌리가 호랑이의 코에 해당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동(黃東) : 삼성마을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본래는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붉은 황토이므로 황동산이라 하였고, 그 산아래 마을이라 해서 '황동산말'이라 하여 왔는데, 그 이름이 점차 '황동'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본1

 

본래 과천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수리산 밑이라 하여 산밑 또는 산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안, 도장골, 둔전, 광정, 골안을 병합하여 산본이라 창하다가 이후 19891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1동이 됨. 한편 산본은 일본 사람들의 성과 같은 이름이니 혹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는 분들이 있으나 정조13(1789)에 발간된 과천현 읍지에 호구총수에 기록된 산저리가 산본리로 바뀌어 표기된 후 현재에 이루고 있으니 일제시대 그이전에 지어진 지명임이 확실하다.

 

 

산본2

 

골안 : 광정 북쪽에 있는 마을로 수리산 줄기의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골안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서는 이곳에 난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곡란이 골안으로 바뀌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1:5000, 1:25000, 1:50000의 지형마다 곡안 으로 표기 되었을 뿐 실제로 곡란 으로 표기된 곳은 없다. 이것은 국립지리원에서 지도제작 당시 현지답사자들이 들은대로 표기한 것이라고 추리해 볼 수 있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곡안 으로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곡란 골곡 난초란자 이므로 곡난 이 아니라 곡란 으로 함이 옳을 것이다.

 

 

▣​금정동

 

벌금정 (坪衿井) : 벌금정은 안양시 호계동과 경부선 선로변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맑은내(군포천)와 흐린내의 범람원으로 벌판평()자를 넣어 평금정 또는 벌금정이라는 이름이 된 듯하다.

 

안금정 (內衿井) : 금정리의 한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서 안금정이라고 한다. 이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1일과 71일 시청 뒤 동산(114.8m)의 전철 선로쪽 봉우리(101.8m)에 있는 큰 참나무 아래에 금정도당대제단(衿井都堂臺祭壇)199551일 새로이 설치하여 마을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점말 : 본래 안금정에 속했던 마을로 안금정과 당리 동막골 사이에 있었다. 우래산 북쪽 기슭이라고 짐작해 본다.

 

 

▣​재궁동

 

광재골 : 쟁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느티울골 : 오금자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900m길게 자리한 느티울골의 논이 기름져 고래실 농이었다고 한다. 지형은 남고북저형으로 동··서의 세 방향이 해발 약 100m의 밤바위산과 그지맥으로 둘러 쌓였으며, 안골의 논은 남쪽이 해발 90m로 높고 북쪽 둥근봉 너머의 낮은 곳은 해발 49m 로 낮아 현재의 3단지, 2단지의 물이 북쪽이 시청 앞으로 흘렀다. 지명은 둥근봉 서쪽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그루 있어 느티나무괴()자와 골곡()자를 써서 '괴곡동' 또는 '느티울'이라 불렀다.

 

동산 : 마을 한가운데 있는 산을 동산 또는 '동메,' '동미'라고 한다. 이곳은 군포시청 뒷산으로 해발 114.8m이다.

 

쟁골 : 월구지고개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쟁골마을 : 오금자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과거에는 '느티울' '괴곡동'에 속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현재의 위치는 군포고등학교 앞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조선 초기 한성부사를 역임한 송복산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둘째 아들인 송찬이 세조 2(1456) 단종이 폐위·사사되자 관직을 사절하고 묘아래 두어칸 초려(草廬)를 짓고 그 문과 창을 한양 쪽인 북향으로 향하게 하여 임금을 잊지 않았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빈객들조차 들이지 않고 글을 보내 스스로 즐기며 자기의 지위나 행적 같은 것을 숨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과천처사(果川處士)라 불렀다. 그 후 그의 후손인 여산 송씨 문중에서 초려를 개축하여 재실(齋室)로 사용하였다. 이후부터 이 인근을 재궁골이라 불렀는데, 후대에 내려오며서 '쟁골'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있던 산소들이 지금은 시청 뒤에 있는 동산으로 이장되었다 한다.

 

 

오금동

 

조선중엽 임경업 장군의 증손인 임인석(병조판서 역임)이 낙향하여 그 후손들이 기거하면서 마을을 형성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남면 괴곡리(槐谷里)라는 행정명을 사용하였고 큰느티나무가 있었다 하여 느티울이라 불리웠으며, 특히 느티울 동쪽을 오금절이라 하였는데 원주민들의 고증을 빌면 당동 고개말과 산본동 사이에 호랑이 출몰이 잦아 "오금이 저리다"라는 말에서 오금절이가 유래되었고, 일제시대 때 지명을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五禁] 이라는 가차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함.

 

벌금정 (坪衿井) : 벌금정은 안양시 호계동과 경부선 선로변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맑은내(군포천)와 흐린내의 범람원으로 벌판평()자를 넣어 평금정 또는 벌금정이라는 이름이 된 듯하다.

 

안금정 (內衿井) : 금정리의 한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서 안금정이라고 한다. 이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1일과71일 시청 뒤 동산(114.8m)의 전철 선로쪽 봉우리(101.8m)에 있는 큰 참나무 아래에 금정도당대제단(衿井都堂臺祭壇)199551일 새로이 설치하여 마을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점말 : 본래 안금정에 속했던 마을로 안금정과 당리 동막골 사이에 있었다. 우래산 북쪽 기슭이라고 짐작해 본다.

 

 

▣​수리동

 

너른골 : 초막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너른골은 넓은 골을 뜻한다.

 

무성골 : 작은 고개골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방아골 : 도장굴골 남쪽의 골짜기 (도장터널 부근)이다.

성지골 : 남북으로 긴 모양의 초막골 남쪽에 이어져 있는 남북으로 긴 골짜기이다.

 

손봉골 : 막골 북쪽에 이어져 있는 남북으로 긴 골짜기이다.

 

수리산 (修理山) : 수리산은 수리산괴() 전체를 말하는 이름이고, 보통 수리산이라 쓰인 봉우리(474.8m) 이름은 거룡봉이라고 한다. 수리산의 지명유래를 시흥군지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신라 진흥왕대(539~575) 창건된 것으로 신심(信心)을 닦는 성지의 절이라하여 '수리사'라 불렀다. 그 후 사명을 따 수리산이라 하였다. 둘째는 조선시대 안산군의 진산인 취악을 '독수리봉'이라 불렀는데 독수리봉의 '수리'에서 산명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셋째는 아주 오랜 옛날 천지개벽이 있을 때 서해안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이 산정상에 '수리'가 앉을 만큼을 제외하고 전역이 물에 수장되었다고 해서 '수리산'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넷째는 조선의 어느 왕족이 이산에서 수도하였으므로 수리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위의 4가지 설 중에서 둘째의 설은 대동지지(1864) 안산군편의 산수에서 "수리산은 읍치에서 동쪽 5리에 있는 산을 태을산 또는 견불산이라고도 이른다. 자못 크고 높은 취암봉(수암봉)이 있는데, 독수리 취자를 일컬어 '수리'라고 한다." 라고 유래를 알려주고 있다. 이상에서 1914년 이전에는 안산의 진산인 취암봉(395m)'수리산'이라 하였고, 1914년 이후는 과천 태을산의 거룡봉을 '수리산'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는 듯하다.

 

작은 고개골 : 초막골의 남쪽끝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골짜기이다.

 

 

​▣​궁내동(宮內洞) : 198911일 군포시 승격과 동시에 산본2동 관할이었으나, 199368일 수리동으로 분동된 후 1994719일 수리동에서 분리되어 궁내동이 되었다. 궁내동이란 지명은 마을뒤(서쪽)에 있는 산이 전주이씨의 사패지(賜牌地)인데 이 산에 조선시대 어느 대군의 묘가 있어 (1986년 화장되었음) 궁내(宮內)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은 매년 음력 11일과 712회에 걸쳐 궁안 뒤의 태을봉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이곳 지명을 따서 궁내동이라 한다.

 

둔전(屯田) : 6, 7, 8단지 경계지점인 롯데슈퍼 앞 4거리부터 수리초등학교에 이르는 동적골의 논이 둔전이고, 이 둔전의 북쪽 언덕 에 집촌을 이루고 살았으므로 이 마을을 둔전마을이라 하였다. 둔전은 고려·조선시대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이나 관청이 경비에 쓰도록 지급된 토지이다.

 

산골 : 엘림복지원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엘림복지원과 9단지의 경계도로가 과거의 산골 골짜기인 듯하다. 따라서 궁내동은 동적골에서 산골까지의 사이가 되는 셈이다.

 

산본천 : 산본천은 수리산에서 흐르는 물이 금정역 근방으로 모여서 군포천으로 합류한다. 본래 과천군 남면의 지역으로 수리산 밑이 되므로 산본이라 하였다.

 

 

광정동

 

거북바위 : 안양군의 신도비(神道碑)가 거북바위 위에 서 있다. 이 바위는 본래 산본고등학교(199431일 개교) 자리에 있었는데, 산본신도시 개발로 부득이 다음과 같이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 이전기간 : 19927월부터 199212월까지 6개월간 - 이전거리 : 50m - 중 량 머리부분 : 47t 중체부분 : 270t 후체부분 : 340t 도 합 : 657t 이와같이 거북바위의 중량이 거대하며 실제 길이를 측정한 결과 머리부분 : 길이 4m, 2.1m, 높이 1.8m, 중체부분 : 길이 3.8m, 8.9m, 높이 2.6m, 후체부분 : 길이 6.7m, 9.6m, 높이 2.9m, 꼬리부분 : 길이 1.4m, 3.3m, 높이 1.6m였다. 특히 비석의 받침돌이 귀부(龜趺)로 되어 있는데, 위와 같이 거대한 자연석의 귀부는 드문 일로서 자연미와 인공미가 겸비된 훌륭한 신도비이다.

 

골안고개 : 광정과 골안사이에 있는 작은 길로 산기슭에 있어 일명 '산실고개'라 부르기도한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하여 작은 길이고 산기슭이고 없다. 산본중학교 근방에서 곡란초등학교로 가는 사이에 있는 언덕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이곳은 지형도상으로 해발 75m정도 되는 언덕이었다.

 

관모봉 : 관모봉(426.2m)은 산본을 감싸고 있는 수리산 봉우리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봉우리이고, 이 봉우리 밑의 동쪽 골짜기가 산본2동의 골안이다.

 

노랑바위 : 산본리 수리산 산신제당 위인(서쪽) 관모봉 중턱에 있다. 이 바위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옛적에 어느 임금이 있었다 그에게는 불혹을 넘어도 왕손을 이어갈 왕자가 없어 근심하던중 하늘이 감복했는지 기골이 장대한 왕자가 태어났다. 왕자가 세 살이 되던 해 전란이 일어나자 급기야는 궁궐을 떠나 강화도로 향하는 나룻배를 탔는데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하려는 순간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나 왕자를 태우고 육지로 나와 은신처를 찾던중 관모봉 중턱에 이르렀다. 거북이의 등에 업혀 며칠을 굶다보니 왕자의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왕자에게 드릴 음식을 구하기 위해 거북이가 마을로 내려가자 거북이의 뜻을 모르는 왕자는 분한 마음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바위를 향해 힘껏 주먹으로 내려쳤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무너지면서 왕자를 덮쳤다. 이에 왕자는 노란 피를 흘리면서 숨을 거두었고, 마을로 내려간 거북이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바위를 맞아 죽었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노랑바위라 불렀고, 광정마을에 안양군의 신도비가 세워진 바위를 '거북바위'라 불렀다.

 

도장공원 : 도장공원은 산본역에서 안산쪽을 향하여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아담한 산이다. 해발 90.5m인 정상에는 8각정이 있고, 전망이 좋아 오르내리는 이들이 많다.

 

도장굴골 : 6, 7, 8단지의 경계지점인 롯데슈퍼 앞 4거리부터 4단지와 5단지 사이로 해서 도장터널 좀 못미치는 지점에 이르는 구간이다. 도장굴골의 ''자를 감출장()자 또는 긴장()자를 쓰는데, 주변의 지명 중 '원숨을골'이라는 곳이 있다. 이와 연계를 짓는다 마감출장자가 옳을 것 같고 또 골의 길이가 15Km나 되어서 길다는 긴장자도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