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최병렬]군포장의 변천과정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7. 3. 28. 02:31

사람들의 왕래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소는 장시이다. 장시는 15세기 말에 발생하여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5일장의 형태로 발전했다. 일반 백성들은 장시에서 잉여 물자를 팔고,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였다. 따라서 장시는 일반 백성들의 왕래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옛길의 형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안양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군포장(軍浦場)은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안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던 시흥로 역로(驛路)의 중간 지점인 현재의 호계동 삼신아파트와 진우아파트 지역에 인접한 구군포 사거리와 안양천(맑은내, 군포천) 사이로 지금도 이곳 구장터 부근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우고,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을 지니고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5일마다 개설되던 군포장은 처음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불리웠다. 1770년 편찬된『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군포천 옆에 장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숙종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지읍지]와 [과천현지도]에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고, 철종12년(1861) 김정호 선생이 발간한 [대동여지도]에도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다.
군포장이 서던 곳(현 호계동, 구 군포사거리)은 시흥길과 삼남길의 갈림길이다. 또 안양천의 상류로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기에 한강에서 부터 물자운송이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로 컸다. 과천시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과 군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포장이 서는 날은 이웃 안양장과 더불어 수차례 바뀌어 왔다. 조선시기에는 개시일이 3․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군포장이 되면서 1․6일로, 1923년에는 5․10일로, 1926년에는 2․7일로 나타나는 등 주변장의 영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 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은 물론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 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때는 시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뤘다고 한다.

활기 넘치는 군포장은 역 명칭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무4년(1900)에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군포장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진 군포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짓고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했기 때문이다.(영업개시 1905년 1월 1일) 역사 설치 후 민가가 늘어나자 군포장(현 호계3동)을 구 군포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장역'(현 군포역) 인근을 신 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군포장(軍浦場)하면 만세 시위를 빠트릴 수 없다.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31일 군포와 안양 인근의 주민 2,000여 명이 모여 펼졌는데 당시 시위 군중은 경찰관주재소(시흥군 남면 당리 군포장역 앞)로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특히 주민들이 사전에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시 군포장이 안양과 의왕, 군포의 경계지이자 당시 서울-수원 가도에서 과천, 안산으로 갈라지는 곳으로서 상업적 요지였기에 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민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독립기념관 사적지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755 )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군포천, 안양천)이 범람하자 그해 12월 23일 장을 군포역 앞(현재의 군포 역전시장)으로 이전하고 5일장 시장 명칭은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하천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기고 상설시장인 안양시장으로 개설했는데 그해인 1925년 12월 안양시장이 조선총독부 경기도지사에 의해 인가되었다

군포역 일대 또한 점차 상설로 문을 여는 가게들도 생기는 등 주거지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고 기차역 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자 그해 4월 1일부로 군포장역(軍浦場驛)은 군포역(軍浦驛)으로 역명이 바뀌게 된다. 또 5월 1일에는 새로 신축한 역사가 준공된다.

결국 역이 설치되면서 지역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군포라는 지명이 유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군포장 마저 이전해 오면서 군포역 일대가 기존 ‘군포’를 대신하여 새롭게 군포가 되면서 5일장으로 열리던 군포장은 도시화와 함께 사라지고 상설시장(현 군포역전시장)이 생긴다. 이후 옛 군포장이 서던 지역(호계3동)을 구군포(舊軍浦)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역 인근을 신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군포장은 수원과 안양, 안산, 남양, 과천에서 모여들 수 있는 길목이었기에 숱한 이야깃 거리를 생산하면서 발전했고, 수많은 장꾼들의 기대를 불러 모았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당시 군포장하면 소설가 이무영을 빼놓을 수 없다. 죽마지우이자 시인인 ‘이흡’을 따라 군포로 낙향했던 이무영의 눈에 비친 군포장은 예사로움이 아니었다. 그는 군포장으로 생산되는 이야기를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로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서민들의 생황상을 그려냈다. 그 후, 이무영은 10여년간 군포에 거주하면서 농경생활에 깊은 참여를 하게 되고, 그 실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궁촌기>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함으로서 <상록수>의 작가 심훈과 더불어 농민 문학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울 정도로 군포는, 그의 문학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궁촌 마을(군포) 하면 이무영의 농민소설 요람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