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40]안양2동(3) 안양여고 뒷동네(2014.03.08)

안양똑딱이 2018. 2. 2. 16:30

 

2014.03.08/ #안양 #안양기억찾기탐사대 #안양2동 #박달동 #마을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가 40차 탐사 여정으로 찾아간 안양2동 세번째는 안양여고 뒷동네. 안양여고-벽화 그려진 임희택씨 집-안민교회-어수정경로당-만안플러스어린이집- 군부대 옛관사촌(양화로 116번길)
안양여고 뒷편에는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주택이 많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들어 택지를 분할해 문화주택들이 골목마다 들어섰고 그 덕분에 지금도 골목길이 넓찍넓찍하다. 옛 단독주택들은 다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연립, 다세대, 다가구주택에 이어 원룸 건물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새로운 공사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양2동과 박달동에 만나는 경계지역에는 예전에 수원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아가던 정조 임금이 능행사를 하면서 마신 물 즉 '어수(御水)정'이 있었다고 한다.
성결대 문원식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이 마을 태생의 전 박달동 경노회장 김 학선옹의 증언을 청취할 수 있었는데 김 옹에 의하면 어수를 그 동리 주민들은 '으수'라고 불렀고, 으수가 솟아나는 샘이 들 한가운데 있었던 연유로 들 이름을 '으수들'이라 불렀으며, 그 으수들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자신의 생가가 있어서 아침나절이면 항상 연무가 '어수정(御水井)'을 중심으로 자욱히 피어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샘 주변에는 수초와 고기가 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맑고 찼으며,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어수가 마르는 법은 없었다는 것.
임금께 진상한 물이니 당연히 안양지역에서 가장 물맛이 좋았을 것이고, 6,100여 명의 사람과 1,400필이 넘는 말의 목을 축이자면 수량도 풍부한 샘이었을 것이다.
또 지역의 변원신 어르신 말씀과 안양시지(安養市誌)에 의하면 1930년대 초 일제는 조선에 방직공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전국에 걸친 수질검사를 실시하였는데, '어수(御水)물'을 샘플로 채취해서 검사해본 바, 방직공업에 가장 적합한 불순물이 없는 물로 평가가 나고 현 안양2동과 박달동 경계지가 물이 제일 많이 고이는 지점으로 조선직물주식회사(해방이후 금성방직-대농)를 건립, 펌프시설을 설치하고 직물을 제조, 광목과 군복 등 2차 대전 시 군수물자로 공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0년대에는 금성방직 내에 가로 35미터 새로 50미터 이상의 저수지를 파서 물을 끌어가도 일대의 전답에 물을 대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 어수정(御水井)은 60년대 이후 박달동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어수정이 원래 위치하고 있던 지점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금성방직 담밖 약 50미터 지점으로, 지금은 민가가 되어버린 박달동 68번지 43호와 45호 및 47호 주택의 중간 지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어수정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안양여고에서 청소용 허드렛물로 지하수를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물이 차고 맛이 좋다는 소문으로 이 지하수가 과거 정조 임금이 드시던 어수의 물맛을 계승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