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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45]안양 석수3동 충훈부(3)(2014.04.20)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45]석수3동 충훈부(3)
2014.04.20/ #도시 #동네 #골목 #안양탐사대 #석수3동 #충훈부/ 안양기억찾기탐사대가 45차 탐방으로 찾은 곳은 안양천변 석수3동-충훈부 골목 세번째 여정입니다. 코스는 용강빌라 정류장-충훈로-와룡로-충훈시장-충훈로93번길-와룡로28번길-충훈로83번길-충훈로표지석(석수현대아이파크앞 공원)-충훈로72번길-충훈로90번길- 충훈공원-석수도서관-충훈터널-양화로-럭키아파트앞 정류장. 특히 이날 탐방후에는 비산동 대관령에서 5월의 신부가 되는 탐사대원 김혜련샘의 결혼 및 생일 축하도 있었지요.

안양 석수3동은 예로부터 충훈부(忠勳府)라 불리워 왔다. 충훈부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 공훈을 세운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사무와 공신으로 책록할 때 해당자의 업적을 조사하거나 공신 책봉 후 그 후손들을 관리하는 업무도 맡는 등 현재의 국가보훈처와 유사한 업무를 처리하던 기관으로 현 서울 안국동 사거리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광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양 석수3동은 일제강점기에는 밤의 명산지로, 1950년대에는 화훼와 고등 채소로 키우던 곳이다. 1970년대 초 시흥군 안양읍 시절에는 현 럭키아파트 자리 인근에 안양공설운동장이 설치돼 시흥군과 안양읍 행사들이 펼쳐진 곳이다. 특히 1977년 안양 대홍수때는 이곳에 수백동의 천막이 설치돼 피난민들이 임시 수용돼 생활하기도 했다. 안양공설운동장은 1986년 6월 30일 비산동에 새 운동장(안양종합운동장)을 건립해 이전한다. 지역원로이신 변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그 이전인 1960년대 공설운동장 마련을 처음 논의할 당시에서 안양9동 새마을지역을 후보지로 낙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양 석수3동에는 1970년대 말부터 단독주택들이 들어섰으나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빈 공터였다. 1983년 도시계획에 따라 주공아파트를 비롯 아파트와 빌라,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었고, 석수주공2단지(07.02.08착공)과 석수주공3단지(07.07.26착공)에 대한 재건축이 완료됨에 따라, 석수아이파크아파트(2009.09.30준공),석수코오롱아파트(2010.02.12준공) 완공되며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만나는 주택들은 대부분 연립,다세대.다가구 주택이지만 과거 양욕집이라 부르던 단독주택들도 눈에 띈다. 특이한 점은 연립이나 다세대 집들을 지을때 집 장사꾼들이 똑같은 형태의 집을 여러채 잇다라 짓는 것과 달리 이 곳에서는 각각 다른 형태의 건물들이 많다는 점에서 건축업자들이 소규모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주택과 주택 사이 작은 공터들이 적지않은데 텃밭 보다는 화분을 이용하여 꽃이나 화초를 가꾸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절도범이 많아서 일까. 방범망 설치한 곳이 많으며 주택과 주택 사이를 철조망으로 막은 곳도 눈에 띈다.


충훈부라 불리우는 이유

충훈부는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 설치돼 공신도감(功臣都鑑 )으로 부르다 1434년에는 충훈사(忠勳司)로 개칭했으며, 1454년 세조(世祖)때 충훈부(忠勳府)로 개칭하여 승격시켜 공신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렇다면 안양 석수3동이 충훈부로 불리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시대 당시 관청 충훈부는 공해전(公廨田: 국가 기관이나 궁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설정한 토지)이라 하여 직접 관장하는 토지가 있었는데 경기도내 사성리와 우두리, 광화대리(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 석수3동)일대에도 넓은 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훈부는 이 지역을 관리 운영했는데, 일반 농민에게 경작하게 하고 도지를 받았으며 마을이 형성되자 관청의 명칭을 취해 충훈부(忠勳府)로 호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충훈부 현대아파트 옆 공원에는 커다란 충훈부 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석은 당초 충훈1교 앞 옛주공아파트 입구에 있었는데, 주공아파트 단지가 재개발되면서 이전한 것으로 이 자리로 재개발전 충훈목욕탕 건물이 있었던 자리다.

아울러 안양시는 충훈2교 다리 둔치에 관람석을 갖춘 공연장을 조성하면서 관람석 하단에 충훈부 유래에 대한 설명을 돌 표석에 새겨 부착했다.

안양 석수3동의 행정 변화

조선시대에는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였다가, 정조 19년(1795) 음력 윤 2월 1일 시흥현(始興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5월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안양리(安養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3월1일 부령 제 111호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라 했다가, 1963년 1월1일 법률 제1175호에 따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로 되었다가, 다시 1964년 1월1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제3리(新安養3리)로 개편된 후, 1973년 7월1일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이 되었고, 1979년 4월 28일 시 조례 제340호에 따라 석수1동은 분동해 충훈부(忠勳府), 화창동(花倉洞) 등의 제 지역을 석수2동(石水二洞)이라 하였으며, 1987년 1월1일 대통령령 제 12007호에 따라 광명시 소하1동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 1일 시 조례 제 931호에 따라 만안출장소에 편제된 후, 1990년 1월1일 시 조례 제1000호에 의거 충훈부지역을 석수3동으로 분동(分洞)해 석수2동에서 분리되었고, 이어 1992년 10월 1일 만안구로 편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