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자료-오기환]문화예술과 역사3, 안양의 전통문화재(유물.유적)

안양똑딱이 2017. 3. 27. 20:57

문화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안양-<3> 
 
안양광역신문사(aknews0511@daum.net)
2015-08-28 오전 10:52:00   1375 
안양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기 환

 

3. 안양의 전통문화재(유물.유적)로 본 사회적, 경제적 변화

선사(청동기)시대의 유물인 타제석기가 평촌동 250번지 귀인마을 일대에서 수습된바 있고 동안구 관양동 산15번지 일대에서도 석핵, 찍개, 긁개, 박편석기, 망치돌, 식재류 등의 석기류가 확인되었다.

최근 광역상수도사업 확장공사시 선사시대의 생할터전을 발굴 확인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내비산동에서도 타제석기가 수습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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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양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8기와 수혈유구 4기가 확인되었고, 주거지는 대략 해발 600미터 내외의 구릉 남사면에 위치하여, 장축 방향이 등고선과 거의 평행하게 축조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수혈식 주거지이며 대부분 경사면을 굴토하고 바닥은 점토로 다짐한 것이 특징이다.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유물 빗살무늬토기는 해안선을 따라 바닷가 환경에 적응해 살고 있던 선사인들의 음식물 채취와 폐기행위로 인해 생긴 유적으로 빗살무늬토기는 볼 수 없고, 관양동에 발굴된 유적 토기류는 빗살무늬토기보다 모양새가 약간 변화된 토기류인 것이다. 즉, 안양 일대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인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시대의 유적은 관양1동 산4-1번지 일대의 백제토기 산포지가 있고, 평촌동 365-3번지에는 신선바위라고 불렀던 지석묘가 있었다. 지석묘 서북쪽에 백제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 주거지는 초기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수혈식주거지(움집)의 형태로 주거지 내부에서는 갈색토기편, 승석문토기분, 돌도끼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적 주변에는 이미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던 지석묘도 있었다.

또한, 안양과 시흥 경계에서는 신라시대 잉벌노현(곡양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호암산성”이 조사되었다. 신라군이 안양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된 산성이다.

고려 태조에 이르러서 안양지역의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찰이 안양사이다.

고려말까지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고, 그리고 이것은 고려시대에서 안양지역이 매우 중요한 지역의 하나임을 말해 준다.

절의 남쪽에 “칠층전탑”이 있다. 이외에도 삼막사와 중초사 등은 널리 알려진 안양의 사찰이다. 특히 중초사지에는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당간지주는 827년(흥덕왕2년)에 건립되었다는 명문이 남아 있고, 삼층석탑은 고려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안양은 고려시대의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안양지역이 고려시대애 매우 활기차고 주목받는 고장이었음을 말해준다. 현재 안양예술공원에 위치한 안양사(安養寺)는 태고종 사찰로 서울시 옥수동에 소재한 용운암을 본사로 두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이후 18세기 후반경에 폐사되고 현재의 안양사(安養寺)는 1950년대 말 새롭게 중창되었다. 가람으로는 대웅전. 명부전. 법증각. 심건당. 천불전 등이 있으며, 귀부와 석조부도가 남아 있다.

‘안양“은 불가의 세계 중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아미타 부처가 주재하고 있는 극락을 의미한다. 극락은 불가에서 가장 평화스럽고 행복하고 안온한 세상으로 근심 걱정이 없는 이상향의 세계이다. 이러한 지명을 사용한 것은 안양이 곧 극락이라는 관념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