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오기환]문화예술과 역사2, 조선사회와 안양의 발전

안양똑딱이 2017. 3. 27. 20:54

문화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안양-<2> 

안양광역신문사(aknews0511@daum.net)
2015-08-20 오후 6:51:00   1257 

안양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기 환

 

2. 조선사회와 안양의 발전

 

조선 후기에 안양은 한적하기 그지없는 시골마을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고 수원에 현룽원이 조성되고, 새로이 화성이 축조되면서 안양은 새롭게 부상했다. 이는 임금이 행차할 때 기존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 안양을 경유하는 길을 조성하면서부터였다.

원래 화산능행 노정은 노량의 배다리를 건너 요양봉저정-만안고개-금불암-금불고개((현 숭실대 부근)-사당리-남태령-과천행궁-찬우물점-인덕원천교-갈산점-원동점-사근참행궁-지지대고개를 거쳐 화성에 이르렀다. 이는 호현(여우고개) 또는 염시현이라 불리던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거치는 길이었다.

정조가 과천로를 버리고 시흥로를 택한 것은 편의성 때문이다. 그 편의성이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본다.

과천로는 교량이 많은데다 고갯길이 험준하여 국왕 행차길에 어려움이 많고 또 길을 닦을 적에 백성들의 노력이 곱절이나 들어가므로 이런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여러 차례 편리한 방도를 생각해 보라는 명이 있었기에 지대가 평탄하고 넓은 시흥로를 정해 관아의 수리와 길을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흥로가 개설되자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바뀌고, 현감에서 현령을 파견하는 고을로승격되었던 것이다. 이후 안양일번가 유래정 뒤쪽(안양1동 674-67)에다 안양행궁을 건축(1794년)하게 되었고,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능행할 때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니, 주변은 자연히 활기찬 동네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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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795년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에 만안교(萬安橋)를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를 이용할 백성들의 고통이 많아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다.

만안교가 3개월 만에 완공을 보게 된 것은 부근의 하천에서 교량건축용 좋은 석재들이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정조는 다리의 편리함이 만백성에게 미쳐 원근의 짐 꾸러미들을 이 튼튼한 다리로 만년 동안 편안하게 건너란 뜻으로 ‘만안교’라 이름지었다. 만안교 남쪽 측면에는 다리의 연원을 밝히는 만안교비(萬安橋碑)가 세워져 있다.

만안교가 완성 되었다는 것은 시흥로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임시방편의 나무다리는 매우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정조가 장현세자 묘소를 찾던 화산능행은 1795년부터 이루어진 6차 원행부터 기존 과천로를 버리고 시흥로를 이용하게 되어 안양행궁과 더불어 만안교는 더욱 번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흥로에는 안양천을 비롯하여 많은 개울이 있어서 크고 작은 교량을 세워야 했는데, 한양에서 현륭원까지 모두 24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또한, 1,700여 명의 인원이 말을 타고 5열, 많은 경우 11열로 행진하는 까닭에 도로 폭이 이를 수용할 만큼 넓어야 했다. 길의 너비가 24척으로 오늘날 10미터 정도에 해당한다. 시흥에서 안양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가던 능행길은 순조 때에도 자주 이용되었고, 후에 1번국도가 될 만큼 비중 높은 교통로가 되었다. 또 만안교에서 안양역을 경유하여 구 경찰서 자리에서 끝나는 안양노정을 만안로(萬安路)라 이름 붙인 것도 그 역사적 흔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는 만안교는 현재 안양을 대표하는 문화재(경기도 유형문화제 제38호)의 하나이며. 조선후기 교량축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아치형 석교이다. 35.55미터의 길이와 8미터에 이르는 너비를 가진 만안교는 7개의 아치형 갑문을 통하여 물길을 안내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석조교 형태다.

하천 바닥은 두께가 두 뼘(30-40센티미터)에 달하고 가로와 세로 평균 70-80센티미터에 이르는 박석을 남북으로 30.8미터, 동서로 31미터, 총 289평의 면적에 다 깔아 놓고 있다. 이는 홍수때 물살로 바닥이 패여 기둥이 뜸으로써 교량이 붕괴되는 것을 방치하는 작용을 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참고할 만한 교량 축조건설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만안교는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 석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