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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6.25전쟁에서 수리산을 지킨 형제의 나라 '터키'

이야기보따리/자료

 

‘형제의 나라’ 터키, 6.25전쟁에서 수리산을 지켰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 기획취재 - ⑥  [군포신문 2010-08-26일자]
  
1951년 수리산 탈환에 큰 공 … “군포는 터키에 보은의 표시해야”
기념비 건립, 참전용사 초청행사 등 도립공원 연계 추진시 시너지 효과
 
올해(2010년)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세월이 흘러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현재의 젊은이들은 6.25의 참상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지역 군포에서 당시 어떤 전투가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해 희생됐는지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호에서는 1951년 1월, 수리산 고지를 탈환하고 이 지역을 지켜내기 위한 사람들에 대해 조명해 보고, 수리산도립공원에 ‘호국과 평화’ 문화를 가미할 가능성에 대해 살펴본다. <편집자주>
 
1.4후퇴 직후 UN군 반격 작전
수리산 탈환의 1등 공신 터키
 
‘형제의 나라’라는 호칭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터키는 6.25전쟁 당시 1만5천여명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왔다. 참전한 국가들 가운데 미국과 영연방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다. 이중 총 747명이 전사했고, 전사자 중 20명이 군포의 수리산에서 전사했다.
 
터키군은 6.25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위해 보육시설 ‘안카라학원’(현재 수원시 농촌진흥청 자리)을 세우고 휴전 이후에도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군이 우리지역 군포를 지켜냈다.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現 군사편찬연구소)가 1980년 발간한 한국전쟁사 11권에 이 내용이 자세하게 기술돼 있고, 시흥군지와 안양시사에도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이 책들의 기록에 따르면 터키군이 수리산 탈환 작전에 나선 것은 1.4후퇴 직후인 1951년 1월 28일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UN군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한강이남까지 밀리기도 했지만 이후 썬더볼트작전, 라운드업작전 등을 통해 재반격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현재의 휴전선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중 1차반격작전인 썬더볼트작전 중에 벌어진 전투가 수리산 전투다. 기록에 의하면 썬더볼트작전의 첫 목표선인 수원-김량장(용인)-이천선을 점령할 때 공을 세운 터키군은 수리산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터키여단의 담당지역은 수리산으로부터 서해안까지 였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은 수리산과 관악산, 모락산을 잇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하고 있었다.
 
1월 28일 새벽, 중공군과 북한군 8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수리산을 탈환하기 위해 터키여단의 3개 대대가 반월리 인근에 집결, 작전에 돌입했다. 431고지(슬기봉)를 목표로 전진하던 터키여단 2대대는 1월 30일 수리사 근처 바람고개에서 처음으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적군의 저항에 터키여단과 미군은 포대(砲隊)와 공군의 집중 폭격을 퍼부었지만 적군이 수류탄을 굴리는 등 완강히 저항해 고지 점령에 실패한다. 수리산 전역에서 벌어진 이날 전투에서 터키여단은 적군 60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터키여단도 1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37명이 부상당했다.
 
한편 2대대의 좌우측에서 수리산을 공격한 1대대와 3대대는 각각 안양과 시흥방향의 고지를 차례로 점령하며 북진했고 2대대는 2월 4일까지 슬기봉을 점령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월 4일 236고지(안양 서쪽 3km)를 점령함으로써 수리산 중심의 모든 고지를 차지한 터키여단은 슬기봉 점령 임무를 미군에게 인계하고 한강으로 이동했다.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8일에 걸쳐 벌어진 수리산 전투에서 터키여단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공격하는 불리한 전투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수리산의 대부분 고지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또한 2월 3일 미군 25사단 35연대가 수행한 수리산 정상 탈환작전에서는 미군이 태을봉과 관모봉을 되찾도록 도왔다. 수리산 전투의 승리는 당시 안양과 수리산을 점령하던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지리상의 이점을 제공했고, 국군이 한강을 탈환하는 데 교두보 역할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00여명 참전 추정, 103명 피해
 
수리산 전투의 전사(戰史)에 나타난 터키여단의 규모는 3개 대대다. 1개 대대의 규모를 250~300여명으로 볼 때 수리산 전투에 참가한 터키군은 대략 800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된다. 터키여단은 이 중 20명이 수리산에서 전사하고 8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전사(戰史)의 내용으로만 볼 때 여단의 약 12%가 죽거나 다친 것이다.
 
2006년 안양학연구소가 펴낸 ‘이야기로 듣는 안양 근대사’라는 책을 보면 안양지역의 토박이들이 옛 안양의 모습에 대해 증언한 녹취록이 기록돼 있다. 이 중 정덕환(1942년생, 안양시 박달동 출생) 씨의 증언 내용을 살펴보면 수리산 전투에 관한 증언이 눈길을 끈다.
 
수리산 전투 당시 열살이던 정씨는 “인천 쪽에서 들어온 미군이 수리산에 주둔한 북한군과 중공군을 몰아내기 위해 당시 육박전 전투 능력이 강하다는 터키여단을 군포 쪽에서 접근시켰다”며 “군포 사람들은 사실 터키인들에게 보은의 표시를 해야 한다. 터키여단의 거의 절반 이상이 수리산에서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정씨는 “중공군이 군포사람들을 데려다가 현재의 레이더기지 인근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능선의 돌을 쪼아서 계단을 만들고 인력으로 박격포를 끌고 올라갔다”며 “중공군이 태을봉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포탄을 쐈다”고도 증언했다.
 
정씨의 증언은 터키군의 인명피해 부분에 대해서는 전사(戰史)와 큰 차이가 있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이 산 정상에서 포격을 가했다는 부분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당시의 수리산 전투 상황도(그림 참조)를 보면 터키여단의 2대대는 반월리에서 출발, 바람고개를 거쳐 슬기봉으로 진격했다.
 
2대대의 진군 경로와 북한군 8사단이 점령했던 슬기봉의 위치, 적의 포격, 미 공군의 바람고개 폭격이 있었다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볼 때 6.25전쟁당시 수리사가 소실된 상황을 어느정도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육군 제51사단 전사자유해발굴단은 지난 5월 1일부터 약 한달간에 걸쳐 수리산 일대에서 유해발굴작업을 진행했으나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는데는 실패했다. 수리사 대웅전 뒤편에서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 1기를 발견한 것이 전부다.
 
수리산 유해발굴작업에 참여한 51사단 전사자유해발굴단 김법중 원사는 “전사(戰史)를 바탕으로 의욕적으로 발굴작업에 임했지만 유해를 찾아내지 못해 수리산 발굴작업이 종결됐다”며 “당시 수리사 인근에서 발굴작업을 진행한 것은 당시에 수리사에 은신해 있다가 군인이 전사했을 수 있고, 수리사에 대한 문화적 관심이 생겨 협조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군포 지킨 터키 공적 기려야
 
올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비극이긴 하지만 잊지말아야할 우리나라의 역사다.
6.25전쟁, 특히 수리산 전투에 참전한 터키군과 미군들이 당시 20대 초반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80세가 넘은 노인이 됐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수리산 전투에 참전한 노병(老兵)들을 군포시에 초청해 그들의 은공에 보은하는 행사를 마련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수리산 도립공원이나 인근에 터키군 참전기념비를 건립하고 곽재우 장군, 육탄 이희복 용사 등 나라를 지킨 인물들을 기념하는 공간을 조성해 ‘안보교육의 장’으로 꾸미는 것도 군포시에 좋은 ‘문화적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