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죽어라 외웠던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
1968년 12월 5일 . 결혼기념일은 가물가물한데 그 날만은 까먹지를 않는다. 아침에 눈뜨면 스피커에서 국민체조 노래가 훈육처럼 흘러나오던 그 무렵. 학교 모든 교실 앞에는 붓글씨로 쓴 국민교육헌장 액자가 정성스레 놓여 있었으며, 모든 교과서 앞부분에 실려 있었고, 입학식 졸업식은 물론 모든 국가 행사 앞부분 식순에는 반드시 국민교육헌장 낭독이 있었다.
기독교 신자들이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줄줄 암송하듯이 외우고 통독한 덕분으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지금도 한 줄 빼놓지 않고 적을 수 있다. 그 시절 그렇게 외워댔던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면 달콤하기는커녕 머리 쭈뼛 서고 통증을 유발하는 좌골신경통인 양 아프다. 결코 애틋하지가 않다.
겨울방학이 끝나자 처음에 한 숙제검사가 바로 헌장을 외웠느냐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충하는 숙제인데 외웠을 리가 없었다. 그때는 평소 선생님답지 않으셨다. 반장부터 매를 맞고 외우기 시작해서 전 학생이 외울 때까지 회초리는 끊이지 않았다. 제대로 못 외우는 아이들은 남아서 보충수업까지 받았다. 헌장 전문을 쓰는 붓글씨대회와 국민교육헌장을 주제로 한 백일장과 웅변대회도 열렸다.
소심한 아이들은 그 헌장 덕분에 더욱 주눅이 들어 중얼중얼 대다가 맞고 혼동하여 한 말을 다시 되풀이하다 맞고 받아쓰기도 매일 해야 했다. 393자밖에 안 되는 헌장이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죽어라 외우던 아이들은 그 헌장에 자주 나오는 국민, 국가, 나라, 순서가 헷갈려서 얻어맞는 꿈을 꾸곤 했다.
그 시절은 외우는 것이 헷갈려 혼돈하였는데 그 헌장이 폐지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헌장 때문 혼돈하고 산다. 아니 우리 모두는 여전히 그 혼돈 속에 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낭독과 낭독 속에 반복되어 무의식으로 스며들던 국민교육헌장.
개인윤리에서 출발해 사회윤리를 거쳐 국가윤리에 이르는 치밀한 구조논리로 시작해서 ‘ 국민, 국가, 나라’ 에 대해 강조되는 이념추구로서 자연 순종 형 체질로서의 전환을 꾀하는 정형성에 서구의 민주적 근대성을 부정하는 민족우월론 따위로서 1890년 메이지 일왕이 선포한 교육칙어와 다를 바 없는 극우 파시즘의 정신적 토대이며 상징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한 이념 문건이다.
당연 자율·자유의 정신과 개인의 권리주장은 결여되고 국가의 대과업이 우선한다. 아, 내 한 몸 이 조국과 민족의 영광된 그날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고 말겠다는 결의가 그대로 우러나오는 제국주의에서나 있을 법한 철두철미한 충절서이다. 이에 주먹 불끈 쥔 가미가제 특공대가 탄생되었지 싶다.
나는 한 때 이성적으로 분노하면서도 내 몸에 문신처럼 각인된 정서를 떨치지 못하는 몰골로서 헌장을 미워하고 또 무서워했다. 그러한 생각을 갖는 나를 극좌라 할 것이던가. 나는 혼돈하고 만다. 분명 그 시절 우리는 자신을 일깨우고 세상을 배우며 삶을 만들고 절규하며 살아야 했다.
조국과 민족인 대한민국과 국민의 삶.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도 없었기에 강해야 했고 가난했기에 주린 배를 졸라매고 참았다. 빈곤한 시대의 관점에서의 헌장은 교육의 중요성과, 민족 중흥하자는 건전한 내용을 담은 강한 삶을 이끄는 명문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읊조리면서 비장한 마음가짐을 다지고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다짐하면서 우리는 영광된 통일 민족 국가의 앞날을 고대하며 전율하였었다.
간결하면서도 강한 문장, 그 속에 녹아 있는 민족중흥의 대명제. 그 명문장을 곱씹으며 절약 절도를 강조하며 우리는 그렇게 성장했다. 한때는 줄줄 외우면서도 거부하고 말하기조차 싫었던 문구들이 요즘 묘하게 가까이 다가온다. 나이 들면 그 누구든 극우가 되는 것일까. 요즘 자신만을 찾는 세태가 너무 아쉽다.
애써 이룬 우리의 자산도 국적 불문하고 몰래 팔아넘기는 물질 만능시대, 나는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이 문구가 요즘 그렇게 마음에 든다. 노파심인지는 몰라도 좌도 아닌 우도 아닌 정녕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지표로 삼을 마음의 표석이 필요한 이때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는 동창이지요.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데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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