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어렷을적 명절날 목욕탕의 추억
(묵은때)
명절맞이로 귀경을 서둘러 떠난 직장이 모처럼 한가하다. 퇴근 정시보단 조금 이른 때 거리로 나왔다. 가볼 곳이 있어서다. 누가 그곳을 들리라고 하는 것은 아닌데 이 무렵엔 꼭 찾게 된다. 기실 그제도 곳을 다녀왔으니 오늘 또 가기는 그러하다. 그럼에도 곳을 가지 않아서는 왠지 찜찜하다. 생각해보니 무릇 그 시절 이 맘 때 찾던 그 습성이 나를 잡아끄는 것일 터 이 또한 명절의 한 풍습이라 해두어야 할 것이다.
역시 생각한 대로 곳은 엄청 붐빈다. 오늘 같은 대목은 근래에 드문 일이다. 이때쯤을 상인들은 대목이라 하던데 바로 이곳이 대목이다. 찜질방인가가 생기고선 할일이 없어져 곳이 객쩍다 하였는데 모처럼 신바람이 난다. 해를 넘기기 전 묵은 때를 벗겨야 한다는 생각을 다들 나와 똑같이 하는 모양이다. 내 살던 곳 안양은 시내 편에 목욕탕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일요일 아침 9시경이면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거의 없었다.
기름보일러가 없던 시절이라 나무나 조개탄을 이용했을 터인데 11시가 넘으면 벌써 물이 식어 온탕 밸브 가지고 아저씨들은 승강이를 했다. 때 구정물은 욕조에 배서 손으로 만지면 벽에 달라붙은 묵은 때가 둥둥 물살을 탔다. 실밥 터지면 꿰매서 쓰던 이태리타월 손 주머니가 그 당시 막 나오던 무렵이다. 나는 그곳을 어느 정도 커서 그것도 겨울철에만 갈 수 있었는데 그 붐비는 겨울철의 목욕탕에 숨 쉴 틈 없이 꽉 들어차던 때가 바로 명절 무렵이었다.
겨우 자리 잡은 좁은 터에 아버지와 아들이 등을 서로 밀어주는 정겨운 풍경을 많이 보았다. 나 역시도 명절 때는 어김없이 아버지하고 꼭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명절 때 곳에 서면 묵은 때를 벗겨주던 팔 힘이 무척 셌던 아버지가 소상하게 떠오른다. 아버지는 손힘이 얼마나 셌는지 앙상한 갈비뼈를 밀 때면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참다못해 아프다는 시늉을 하면 아버지는 밀린 때를 내보이며 더욱 세차게 밀어대곤 하였다. 그런 아버지는 때를 다 밀고 나면 으레 등짝을 한 대 후려쳐 다 되었음을 알렸다.
그쯤은 두 아들이 아버지 등을 밀 차례인 것이다. 두 아들이 힘을 합하여 아무리 세게 밀어도 아버지는 꿈쩍을 하지 않았었다. 힘들인 목욕을 그렇게 하고나면 목이 마르고 몸이 축 처지고 만다. 곳을 나와 우리가 꼭 들리던 곳이 바로 길 옆 호떡집이다. 어쩌면 그것 때문 우리 형제는 아버지와 목욕탕을 가려 한 것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흑설탕 진한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호떡을 사주며 먼저 집에 가라고 하고는 옆집에 달라붙은 이발소로 향하곤 하였는데 동생과 나는 가지 않고 이발소 창가를 기웃하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동생 감기 걸리게 한다고 역정은 내셨지만 표정은 전혀 화가 난 모습이 아니었다. 가는 길에 삼베과자를 사주신 것을 봐서도 아버진 화는커녕 또 다른 느낌을 우리에게 갖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아쉽게도 아버지가 병색이 완연하여 당신이 제대로 닦지 못 할 무렵 너 댓 번 그것도 집에서 목욕을 해드린 기억 밖에는 없다. 내 어릴 적에도 존재 했을 아버지 엉덩이에 붙은 큰 점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추운 겨울 철 그것도 명절 무렵에 목욕을 같이 한 것이 고작인 셈이다.
아버지와 목욕탕에 갔던 그 따스한 기억도 아릿한 지금 내 머리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이 묵은 때를 말끔히 벗고 조상을 뵈어야한다는 의식이다. 당시만 해도 욕조에 거뭇한 때가 그득하였으며 깨끗이 벗겨내야 한다고 이태리타월로 피 멍이 들도록 몸 구석구석을 꼼꼼히 더듬었으니 묵은 때란 것이 보이는 형태로만 파악해두었을 것인데 그런데 어느 때 부터선가 나는 묵은 때를 단순 그렇게만 생각지를 않는다.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지금의 세상엔 몸을 박박 문지르던 이태리타월도 자취를 감추었으며 묵은 때도 없다.
그럼에도 다들 이 맘 때면 묵은 때라도 벗겨낼 양 몰려들어 물에 몸을 담근다. 그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도 곳에 들러 묵은 때는 아니 나온다 하여도 묵은 것을 씻는다고 여긴다. 묵은 해를 보내는 때 묵은 때 또한 씻겨 보내는 것은 당연할 터 때는 아니 나오는데 평안한 마음이 되는 것만 같다. 이때쯤의 묵은 때란 새로움을 전제한다. 비바람에 젖어들며 야속한 세월을 박박 문대어 산다고 살고 보니 묵혀진 마음속에 헛되이 쌓여진 것은 정작 묵은 때가 아닌 허욕이었으며 정갈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갈수록 쌓이는 것이 묵은 때이고 늘어나는 것이 마음의 빚이다. 자식들을 앞세운 아버지 모습들이 오늘도 눈에 많이 띈다. 그들 또한 나처럼 묵은 때에 대하여 습관처럼 행하다가 어느 무형의 또 다른 느낌을 자연스레 언젠가는 갖게 되리라. 문득 애들을 데리고 같이 올 것인데 하는 후회가 따른다. 시커먼 묵은 때처럼 나타나고 보이는 것에 급급하여 너무나도 드리없이 손쉽고 안일하고 편하게만 대하고 살았던 것도 같다.
더 늦기 전 아들들을 앞세워 이곳을 찾아와도 묵은 때의 따스한 정설로서는 여전히 유효하리라. 그 참에 내 등에 박힌 사마귀를 녀석들이 알아서는 두고두고 나를 생각해 둔다면 더더욱 고마운 노릇일 것이고 말이다. 해 저물 녘 노을이 한해의 묵은 때를 모두 짊어진 양 오늘따라 길게 늘어지며 더디만 간다. 그렇게 한해가 묵은 때 밀리듯 힘없이 저물고 있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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