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학교급식 강냉이빵을 기억하나요
(강냉이빵)
내 나이 또래가 참 많다. 내 또래부터 학급수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육이오를 겪은 당시의 소년소녀들이 첫 출산을 하던 때가 바로 내가 태어난 1957년 이후 쯤 되기 때문이다. 헐벗은 탓이겠지만 그 시절엔 고아들이 많았다. 고작 2만 명도 채 안 돼는 읍내이건만 우리 동네엔 유독 고아들이 많았다.
동네에 미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아들을 돌보았었다. 고학년이 되자 한 반이 무려 칠팔십 명을 넘어섰는데 그중 대여섯 명은 고아원 출신 아이들이었다. 기독보육원, 평화보육원, 안양보육원. 안양에는 그렇게 세 곳이 있었다. 그 애들은 거의 대부분 생년월일이나 성조차 모르고 지냈다. 우리보다 훨씬 큰 아이들이 많았으며 여드름에 턱 밑에 수염이 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애들은 당시로는 무척 큰 키들이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더 이상 자라지를 않았다. 떼로 몰려다니던 아이들은 때론 삼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다가도 어떤 날은 후하게 시리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나타나 미군들이 그리 하듯 아이들에게 휙 뿌리듯 던져주기도 하였다. 작은 자존심에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주워 먹지를 않았다.
나는 그 고아 아이들 중 한 아이와 친하게 지냈다. 그 아이가 건네 준 노란색 연필은 무척 단단하고 야무져 잘 부러지지가 않았다. 미제가 최고야 하던 그 시절이다. 몰래 하는 양키장사는 큰 돈벌이였다. 의정부니 동두천에서 나온 물건이라 하면 모두들 탐을 내던 그때이다. 이후엔 월남에서 들여온 물건까지 한 몫을 했다. 그 시절 씨레이션이라 하는 캔에 미국제 껌이나 초콜릿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먹을 것이 귀하였기 때문이다. 봄철엔 소골 안 아이들이 돼지감자하고 칡을 가져와서는 고아원 아이들이 가져온 미제 연필이나 초콜릿과 바꿔 먹든지 아니면 나체사진을 불쑥 건네 바꿔 갖기도 하였다. 미국이 건네준 밀가루포대 악수그림이 선명하던 그 시절, 존슨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한껏 거는 기대가 컸던 적도 있다. 나는 ‘쫀드기’란 흙을 먹어본 적이 있다.
밋밋하여 별 맛도 없었던 것을 어찌 알고 채워 넣었던 것인지 의아하고 그것을 그리 먹어도 되는 것인지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다. 학교에선 점심시간에 강냉이 빵을 큰 쟁반에 담아 조각조각 나누어주었다. 강냉이 빵은 알갱이가 알알이 흩어지면서도 맛은 고소하여 큰 것을 먼저 차지하려고 큰 쟁반 속에 올려진 굽은 손들이 늘 아우성이었다.
고학년에 올라와선 등치가 큰 밀가루 빵으로 바뀌었는데 난로에 올려서 데운 우유와 먹었지만 퍽퍽하기만 할 뿐 강냉이 빵엔 비교도 안될 만큼 맛이 덜했다. 결국 그것도 어느 날부터 정해진 애들만 주더니만 졸업할 때쯤엔 끝내 사라졌다. 당시의 겨울 교실은 참으로 고달팠다. 조개탄이 모자라 솔방울을 준비했고 주번은 꼭 두 명이 했는데 이른 아침 빠께쓰를 들고 학교 뒷 편 걸상 부서진 흔적이 수북한 창고 쪽으로 쭉 모였다.
전 학년 주번반장이 주번선생님한테 보고를 하고, 학교 뒤편으로 가서 땔감을 받아 날랐다. 그렇게 피운 난로불은 점심은커녕 수업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꺼졌다. 그러기에 아침엔 난로 옆에 앉으려고 서로 밀쳤으며 쉬는 시간 점심쯤엔 자연 창가로 몰려들었다. 이 때문 당시는 일주일마다 줄 전체가 한 칸 씩 이동을 해야 했다. 그래도 씩씩한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 양지바른 곳에서 구슬치기를 하든지 고무줄을 했었다.
그런 아이들 손등은 언제나 갈라져 있었다. 쥐 잡는 날이 따로 있었던 시절 우린 봄철엔 송충이를 잡으러 단체로 산을 올랐고, 파리를 성냥 곽에 담아 가져갔으며 늦가을엔 솔방울을 따러 산에 올라야 했다. 송충이 잡을 때는 깡통을 준비해서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넣어 산에서 내려 올 적 검사를 일일이 받았는데 정말이지 엄청 송충이가 많았다.
수리산은 원래 갈참나무가 제일 많고 깊숙이 들어가면 물 흐르는 기슭 언저리엔 소나무하고 참나무가 무성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산은 황폐해져서 거기에 의존해 사는 사람만큼 가난해지고 말았다. 가난하여 혹독하게 추웠던 그 겨울, 할아버지(교장선생님)를 만나는 조회시간은 엄청 고역이었다. 구멍 뚫린 양말 생각도 안 해주고 뭐 그리 하실 말씀이 많으셨는지.
차디찬 운동장 대신 냄새나는 화장실에 몰래 숨었다가 벌을 선 적이 있다. 지난번 산행 길에 오대산에 들려 마신 진노랑 옥수수 술! 난 문득 양지 녘에 쪼그리고 앉아 강냉이 빵 알갱이를 한 올 한 올 생선에 달라붙은 살점 발라먹듯 떼어 먹던 고아출신 그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엄마를 찾았다며 서울로 전학을 갔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하고 살까. 이제는 세월 따라 다 지나간 가난한 그 시절일 뿐이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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