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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추억의 세발 자전거

안양똑딱이 2017. 3. 15. 15:45

[조성원]추억의 세발 자전거
(추억의 세발자전거)

이제 그 자체가 그리움이 되어버린 빛바랜 사진첩. 그 안에는 백옥무하(白玉無瑕)의 작은 내가 예쁘게 들어 있다. 그 시절을 산 누구라도 그러하듯 내게도 가슴 깊이 간직하는 반쯤은 찢겨 나간 그리운 흑백 사진 몇이 있다. 사진은 지나간 때를 기억하지 못하여 멈추었던 시간의 한 모습을 보고 그때를 떠올리는 묘미로서도 괜찮지만 정작 값지고 고마운 것은 정녕 알 수없는 과거로부터 지금을 현실감 있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할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보는 듯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왜 삼촌들이 여동생을 보고 할머니와 어쩌면 그렇게 꼭 빼닮았느냐 하는지 잘 이해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닮았다. 머리에 포마드를 짙게 바르고 두꺼운 오버를 걸치고 트럭을 타고 혼례를 치루기 위해 나타난 아버지. 시발택시는 아닐 줄 알았지만 설마 트럭일 줄은 몰랐다고 어머니는 이를 두고두고 말하였다.
 
이 또한 본 적이 없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우습지만 그 트럭이 때맞춰 고장 나 애를 먹었다는 사실을 곁들여서 또 안다. 사진엔 당시 정비 일을 하는 고종형의 얼굴이 보이고 형은 공구를 든 채로 서있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나는 이상하게 서서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고 판자로 어설프게 엮은 닭장 옆에서 꼭 세발자전거를 타고나온다. 자전거가 귀하였을 그 무렵 동생은 자전거를 탄 사진이 하나도 없는데 나만 유독 자전거를 타고 두 눈을 찡그리며 미소 짓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봄 소풍에서의 나는 타이스를 신고 있으며 엄마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있다. 양장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래도 엄마는 엄앵란 스타일의 머리 손질을 한 모습으로 맨 뒤에 나온다. 여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일 것인데 여동생은 어쩌고 그 자리에 있었나 싶다. 당시의 마음 환한 엄마의 얼굴이 곱게 보인다. 당시의 배경으로서는 장남이라 당연 열 일 제치고 온 것이련 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풍가는 곳 안양유원지는 초등학교에서 꽤 먼 거리였다. 철둑을 건너 안양역을 지나고 기차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관악산 아래 안양유원지가 나온다. 이름표를 큼지막하게 단 아이들이 앞장서서 가고 엄마들은 둔을 치듯 하며 뒤를 쫓았다. 하지만 엄마는 다른 엄마들하고는 달리 내 옆 가장자리에서 나와 보조를 맞추었다. 나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든든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꽤 창피하였다. 뒤로 가라고 눈을 흘긴 것도 같고 자꾸 부르지 말라고 하였던 것도 같은데 그 기억은 희미하다.
 
맛문하였지만 씩씩하게 걸어 보이려 애썼던 기억이 지금도 봄바람에 얼핏 스치는 듯도 하다. 왜 엄마는 그때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해 운동회에서 달리기에 꼴찌를 하여 웬만하면 다 타던 공책을 한 권도 못 탔다. 이후에도 나는 한 번도 운동회에서 상을 탄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씩 웃으며 공책보다 더 좋은 두꺼운 대학노트를 내게 주었었다. 동생은 천 미터 달리기 선수로도 뽑히는데 왜 나만 그럴까. 그쯤 나는 남들보다 잘 뛰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엄마는 내가 평발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발은 남들과 달리 바닥이 평평하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또 자연 알게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동네 양어장이 꽁꽁 얼어붙던 때 아버지는 동생과 나에게 스케이트를 사주었다.
 
동생은 배우지도 않은 스케이트를 잘 탔다. 회전할 때만 엉성할 뿐 단숨에 양어장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나는 똑바로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돌아서는 가족의 발걸음은 띄엄띄엄 마냥 숙지근하였다. 나는 실망하였던 당시의 아버지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스케이트를 못 탄다는 사실은 내게는 큰 아픔이었다. 그 비싼 돈 들여 산 스케이트는 한 번도 못 타보고 운 좋은 동네 형이 싼 값에 가져갔다.
 
엄마는 그때 비로소 말해주었다. 육이오 전쟁 때의 어린 소년소녀들이 서둘러 시집장가를 가서 첫 애를 놓던 시기가 바로 내가 태어날 그 무렵이다. 내 이후로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그때는 폐병도 많았지만 소아마비도 많았다. 기억 못하는 나지만 나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나는 수의사였던 아버지 덕분으로 다리 한쪽이 약간 가늘고 그로 걸음걸이가 표시가 조금 날 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신은 내 삶의 필연이며 행운이었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지만 당신은 나로 무연하고 얼룩진 마음을 늘 갖고 살지 않았던가.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이만큼 행복할 수 있도록 당신이 아팠다. 자전거를 타고 집 주위를 돌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어렴풋한 기억도, 집에 탁구대를 갖다가 놓고 가르쳐 주었던 것도 못 박힌 당신들의 말 못할 아픈 심중이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절절이 안다.
 
그렇게 세발자전거를 끼고 살았던 나는 다리가 아팠다는 것에 대해 어느 한 때 육니하고 억색하다 한 적은 있지만 크게 좌절해 본 적은 없다. 심하지도 않았지만 따스한 당신들 앞에서 약해져서는 안 될 것이란 생각이 자연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래서 또 아픔의 질곡을 넘는 그 시절 당신들의 애틋한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자 여기 쳐다봐, 씩씩하게. 자전거 꽉 잡고 여기! 여기! 반쯤 찢긴 누렇게 변색이 된 다소는 슬퍼 보이는 잊지 못할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세발자전거를 타고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닭장 옆에 늡늡하게 서있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