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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6) 박두진 시인 청록파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은 1916년 안성 출생으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시인의 유명도에 비해 안양과의 연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최근에 ‘안양시사’ 발간을 위한 자료정리와 ‘안양의 자랑거리’ 선정위원회에서 박두진 시인이 화두에 올랐던 터라 안양 관련 부분을 정리·소개해 보고자 한다. 박두진 시인은 1942년 8월에 일가족 5인이 안양으로 이주하고 금융조합의 사무원으로 취업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일가족은 안양중앙교회에서 1944년 8월에 세례를 받고, 1948년에 장로에 장립되었다. “안양으로 온 뒤로 그간 이렁성 하는 중에 아직 아무 것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악 못 미처의 풍광은 매..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5)/ 안양을 ‘시의 금광’으로 만듭시다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5) 안양을 ‘시의 금광’으로 만듭시다(2009.03.20) 나는 지난 번 칼럼에서 미국의 ‘시의 달’(4월) 행사들을 소개하면서 평소 생각하고 있던 대안들을 제시해 보겠노라고 했다. 이에 앞서 먼저 전제할 것이 있다. 우선 이 글은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라 즐기자는 것이다. 삶의 질이란 즐거움을 많이 느끼며 살수록 증가된다. 의식주는 그 즐거움의 3대요소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밥을 먹으며, 좋은 집에서 살면 행복하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몸에 해당된다. 마음에도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밥을 먹이고, 좋은 집을 지어주면 더 행복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몸의 의식주에는 돈이 많이 들지만, 마음의 옷·밥·집에는 돈이 그리 필요치 않다. 그 마음의 의식주가 바로 문화예술인데, 예술..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4)/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비를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4) 삼덕공원에 박두진 시비를(2008.11.07) 삼덕공원 기반공사를 위해 설치됐던 가림막이 제거되고, 옮겨 심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니, 벌써 마음은 공원길을 걷게 된다. 안양시가 근래 펼친 사업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문화예술 부문이 아닐까 한다. 이들 대부분은 전임 신중대 시장의 재임시에 선포된 ‘아트 시티’ 만들기에 따른 일련의 사업들로서 도심 간판 교체, 공공예술 프로젝트, 만안구 디자인 사업, 예술공원 조성, 문화재단 설립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삼덕공원도 이에 속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것 한 가지도 이의 제기없이 진행된 일이 없다. 삼덕공원이 특히 그러했다. 공원부지 제공자와의 인간적인 갈등, 지하 주차장 설치를 둘러싼 시민단체들과의 불협화음, 주변..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3)/ 내가 생각하는 ‘안양사람’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3) 내가 생각하는 ‘안양사람’ (2008.11.28) ‘안양사람’ 이라는 말은 곧바로 ‘안양토박이론’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내가 여기 쓰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분법적인 얘기가 아니다. ‘안양사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겠다. 첫째는 법적으로 안양시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안양시민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가운데는 주민등록만 안양시에 되어 있고, 실제로는 타지에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주민등록은 타지에 되어 있고 거처는 안양시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법적인 안양시민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법적인 안양시민은 안양에 세금을 내고, 안양에서 투표권을 행사한다. 선거때 불거지는 위장전입 문제도 투표권 때문이다. 명예시민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 ‘대동문고’와 ‘전영선’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 ‘대동문고’와 ‘전영선’ (2008.12.12) 1963년 대학 졸업반 때, 나는 안양여중고에서 아르바이트로 배구코치를 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어느날, 교문을 들어서려는데 한 젊은이가 상자 판지에 책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이때나 그때나 책을 좋아 했던지라 몇 권을 골라 샀다. 며칠 후에 또 그가 왔다. 책을 또 샀다. 그러기를 몇 차례,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우리는 곧 친한 사이가 됐다. 그가 바로 오늘날 대동문고의 전영선 사장, 그와의 교우는 그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45년 전의 일이다. 전영선 사장은 ‘자수성가’보다 ‘입지전적’이라는 말에 더 합당한 사람이다. 전남 영광 출생으로 가정 형편상 중학교 이상의 학업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자, 고학 일념으로 무조건 가출..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1)/ 채만식의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

김대규시인의 안양이야기(2008.12.29) 채만식의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 안양은 1960년대 이후부터 급속히 성장·발전한 후발 산업도시지만, 문학의 경우는 이보다 앞선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극작가 이서구(李瑞求), 소설가 이무영(李無影)·채만식(蔡萬植), 시인 박두진(朴斗鎭), 평론가 정귀영(鄭貴永) 등의 문인들이 작품활동을 한 관계로 일찍이 문학성이 높은 지명으로 알려져 왔다. 그들 가운데서 정귀영만 아직 생존해 있지만, 92세의 고령으로 인천의 한 노인병원에서 요양 중에 있다. 위의 네 선구자들이 안양에 남긴 업적 가운데서 문학적 유산으로 기릴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가 아닐까 한다. 첫째는 정귀영·박두진 등이 1947년에 ‘안양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안양 최초의 동인지 ..

[자료]1번국도 의왕구간에 대한 역사/의왕시사

1번국도의 연혁 현재 한국의 공설도로(公設道路)는 고속국도[고속도로], 일반국도, 특별·광역시도, 지방도, 시·군도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보통국도로 불리는 일반국도는 고속도로와 더불어 전국의 주요 도시와 항만·공항·관광지 등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양대축이다. 2004년 말 총 56개 노선으로 짜여진 한국의 국도는 총 길이가 1만 4,264㎞에 달하고 포장율도 계속 증가되어 97.4%에 이른다. 국도는 전세계적으로 남북축으로 뻗은 노선에는 홀수번호를 동서축으로 가로놓인 노선에는 짝수번호를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한국에서도 남북을 종관하는 간선도로에 대해 서쪽에서부터 1·3·5·7번을 부여하였으며, 동서를 횡단하는 간선도로에 대해 남쪽에서부터 2·4·6번을 부여하였다. 이밖에 8·9·10번국도가 북한에 소..

[20170218]도심 가로수 도시의 품격 말해준다

어느 도시를 방문하면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도로변 가로수의 모양새도 그 도시의 품격을 말해준다. 손발 짜른듯 무지막지한 가지치기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마치 자로 잰든 예쁜 옷을 입혀 놓은 듯한 도시에서는 환한 미소를 짓게한다. 각설탕처럼 네모나게 깜짝 변신한 가로수가 눈길을 끌고 있는 이곳은 수원 장안문(북문)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행궁동지역 팔달로변으로 길가의 버즘나무 가로수가 2013년부터 매년 사각 전지(翦枝·가지치기) 로 예쁘게 단장을 하고있다. 도심의 가로수는 도심 속 콘크리트 숲속에 사는 시민들이 그래도 가까이에서 접하는 녹지대로 경관개선이나 대기오염 정화, 소음공해 감소, 열섬현상 완화 등 도시환경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녹지자원이다. 동시에 도시영역의 일정한 ..

[최병렬]안양 박달동 군용지(軍用地) 이야기

안양시 박달2동 삼봉천을 따라 수리산 골짜기 안쪽은 그야말로 산에 둘러싸인 분지같은 곳으로 이곳을 군용지라 부르는데 산악 분지형에 보안 및 방호에 유리하고 시설 배치에 필요한 공간 확보는 물론 주둔지로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지역입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모두 12개의 자연 취락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차 안양분창' 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1941년 일본 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 강제 수용 당하면서 모두 쫓겨납니다. 시흥현읍지(1899) 능묘조, 시흥군지, 영월엄씨세보(世譜) , 안양시지(安養市誌) 등의 기록을 보면 군용지는 묘자리로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조선 태종(太宗)의 일곱째 서자(어머니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 李氏)인 후령군 이간(厚寧君 李衦, 1404∼1455)의 ..

[최병렬]안양교도소 이전 추진 과정과 쟁점

안양교도소는 재판이 끝나 형이 확정된 수형자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고인을 동시에 수용관리하는 시설로써, 법질서 확립을 통하여 사회안정을 도모하고 수용자 자립 갱생을 위하여 보호 관리하는 국가 교정시설이다. 안양교도소의 역사를 보면 1912년 9월 경성감옥이 1946년 4월 마포형무소와 1961년 12월 마포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안양시 호계3동 458번지 일원 396,700㎡에 새 구치소를 짓고는 1963년 9월 3일 안양교도소로 개소했다. 안양교도소 이전 논란은 건축 45년이 지나면서 1995년과 1999년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전체 89동 가운데 44동에서 중대 결점이 나타나자 법무부는 지난 1993년부터 인근 지역으로의 이전을 추진했다. 자료에 따르면 안양교도소는 주거지역 1만2700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