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677

1970년대 안양 수암천변과 병목안 철길

안양역에서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이 껼려있고, 허름한 집들 뒤로는 수암천이 흐르는 안양1동 옛 대동서점 뒷골목의 1970년대 풍경입니다. 왼쪽이 병목안 방향, 오른쪽이 안양 롯데백화점 방향입니다. 철길은 노태우 정부시절 모두 철거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어수선한 골목길로 바뀌었지요. 허름한 집들은 80년대 건물들이 들어서고 일명 방석집이라는 술집들이 쭈욱 들어서 그룹으로 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호객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고 마치 슬럼화 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968년 안양 화단극장앞 삼거리 풍경

#안양 #닐미샬로프(http://www.mishalov.net/) #기록#역사/안양역에서 화단극장으로 가는 1번 국도(현재의 만안로)와 안양여고(트럭 서 있는 길)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의 1968년도 풍경입니다. 당시 석수동 미군부대에 전령으로 근무하던 닐 마샬로프의 홈페이지(www.mishalov.net에 게재된 사진이지요. 제 기억으로는 당시 안양읍내에는 '아이스케끼'를 만드는 곳이 네 곳이 있었는데, 안양역 앞의 태극당, 철걸 넘어 구시장과 새시장(현 중앙시장)에 각 한곳식 이었고 사진속에 나오는 곳이지요. 당시 아이스케끼 한개의 가격이 3원, 하드가 5원인가 했는데, 여름이면 안양유원지와 안양시내에서 나무로 만든 케끼통을 들고 "께끼나 하드~~"를 외치며 파는 형들이 있었지요. 사진 좌..

1970년대 초반의 안양읍내 삼원극장

안양 중앙로에 자리했던 1970년대 초의 삼원극장 모습입니다. 삼원극장은 화단극장, 읍민관(안양극장)에 이어 안양에 세번째 생긴 극장으로 안양읍 시절인 60년대부터 40여년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지요. 현재 이 자리에는 안양CGV(2004년 4월 28일 개관)가 우뚝 서 멀티플랙스 영화관으로서 영화 상영의 맥을 잇고 있지요. 8-90년대 어려웠던 시절에 영화가 서울과 동시개봉되기도 했는데, 서울개봉관과 입장료 가격 차이가 많이나 서울에서 학생들이 영화를 보러 원정을 오기도 했고요. 많은 분들이 삼원극장과 얽힌 추억과 기억들이 갖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60년대 금성방직 안양공장 항공사진

현재의 안양3동 국민은행 안양지점과 왕궁예식장 뒷편에서 박달동 우성아파트에 걸쳐있는 대농단지에 자리했던 금성방직 안양공장의 1960년대 모습입니다. 사진 좌측 하단 정문옆으로 보면 안양역으로 철길이 연결되고 화물기차가 들어올 정도로 그 규모가 컸으며, 담장 둘레만 십리라고들 했지요. 참고로 당시 안양역에서 이어진 철길 두 라인으로 하나는 수암천 우측을 따라 금성방직 안으로, 한 라인은 수암천 좌측을 따라 병목안 채석장까지 연결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진 중앙의 운동장은 천연 잔디가 깔린 축구장입니다. 1960년대 당시에는 잔디구장이 전국에 3개 밖에 없던 시절인데 한국 국가대표팀이던 양지선수단을 비롯 공군사관학교 축구부, 실업팀 등이 이곳에 와서 연습경기를 했지요.(참고 1965. 9.15일 DBS동아..

1970년대 안양읍내 양지교 주변 풍경

안양 양지교 부근의 1970년대 풍경입니다. 양지교는 수리산에서 병목안과 안양9동, 안양3동, 안양역을 지나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수암천위에 놓여진 다리로 현재의 안양CGV에서 서울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80년대 하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을 만들었는데 지금 다시 뜯어내고 있습니다. 사진처럼 하천에 다시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것처럼 당시에는 병목안 채석장행 철길이 놓여져 있었지요. 1주일에 두세차례 자갈을 잔뜩 실은 화물열차가 지나갈때면 도로위에 차들이 쭉을 늘어섰답니다. 당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인지 요즈음 같으면 교통대란이 일어 났을겁니다. 화물열차는 아주 서서히 운행했는데 아이들이 매달려 새마을까지 올라가거나 내려오기도 했고요. 철길 못을 놓아 납작해진 것..

1970년대 안양읍내(우체국 사거리) 풍경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서안양우체국(과거 안양우체국) 사거리에서 안양천을 건너 이마트가 있는 동안구 비산동으로 넘어가는 관악대로의 1970년대 모습입니다. 우측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은 안양초등학교이고요. 그 아래 주택들이 있는 자리에는 현재 중화당한방병원이 들어섰고, 좌측으로는 현재 남부시장이지요. 당시에는 경부선 철길을 넘아가는 고가도로가 놓여지기 전으로 도로는 비포장에 한산하기만 했지요. 이곳은 과거 교하동(안양5동)이라 불리웠는데 옛 지명인 남부동(안양1동)과 주접동(안양6동) 사이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네로 사실 시민들이 알고 있는 안양5동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지도로 안양5동을 검색해 보면 안양5동은 안양대학교와 근명고 주변인데 이 곳은 만안대로를 건너편에 있어 "이곳이 왜 안양5동..

안양 수리산 담배촌의 천주교 교우촌(1900년대 초)

안양9동 수리산 병목안 골짜기 담배촌의 옛 천주교 교우촌 모습(시진 출처는 http://board.cainchon.or.kr/insamo/?document_srl=32995 년도 미상입니다) 이곳은 기해박해(1839년) 이후 최경환 성인을 비롯한 교우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뤘던 오래된 교우촌으로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해서 '뒤띠미(뒷듬이)'로 불리기도 했지요.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이 곳은 한때 담배를 경작하며 교인들이 살던 곳으로 병목안 첩첩산중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의 은신처로 더 없이 좋은 자리였지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로 충남 청양군 화성면이 고향인 그는 조선 후기 ..

안양 만안교-이전하기 전의 모습(1972년)

정조대왕이 건넜던 안양 만안교의 1972년경 사진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원래 만안교는 안양예술공원으로 등어가는 교차로에서 서울방향으로 약 2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 국도확장의 일환으로 약 200미터 더 올라가 삼막천 위로 옮겨져 복원하여 설치했지요. 1970년대 당시에는 교각의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고, 다리위에 난간이 추가 설치돼 변형됐음을 보여줍니다. 다리 뒷쪽으로 보이는 하얀 건물은 제 어릴적 기억으로 벽산계열의 금강스레트 공장이었던것 생각납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영화하이닉스 아파트가 들어섰고 담벼락에는 만안교가 있었다는 자그만한 표지석만 하나가 역사적 진실을 표현하고 있을뿐이지요. 과거의 놓여져 있던 만안교를 보며 풀리지..

안양천 나무다리-양명고앞(1981년)

안양 양명고 앞에 놓여있던 안양천 나무다리(1981년. 김귀연씨 제공)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검정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다리를 건너는 이 사진은 2009년 11월 안양2동주민센터에서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안양의 재발견 사진첩에 실린 사진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안양천 곳곳에 튼튼한 세월교와 커다란 돌을 놓은 징검다리가 있어 하천을 건너기가 편리하지만 예전에는 수량이 많아 6-70년대에는 드럼통으로 만든 줄배를 타고 건너거나 80년에는 사진처럼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 다녔지요.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

1970년대 안양읍내 풍경(현 CGV사거리)

현재의 안양CGV 사거리의 1970년대 모습입니다,. 안양 도심에 있던 절 용화사가 왼쪽에 보입니다. 이 자리는 이후 본백화점이 들어섰지요. 사진 오른쪽으로 가면 안양역입니다. 어릴적, 그러니까 족히 40년 이상은 되었을 그때의 용화사 경내에는 넓은 마딩이 있었고 큰 갓을 쓴 미륵불이 있었지요. 그리고 크나큰 대문이 가물가물해지는 기억속의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