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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내손동의 임연대군묘 및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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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행]의왕 내손동의 임연대군묘 및 사당


임연대군묘 및 사당

의왕시 내손동 산154-1에 있는 세종대왕의 넷째왕자인 임영대군 묘 및 사당은 능안 마을 뒤쪽 모락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3단으로 상단에는 봉분과 비석이 있는데 봉분은 둘레가 1,650cm, 높이가 210cm로 대형이다.

봉분주변의 호석은 1981년에 새로 축조한 것으로 동서남북의 모서리에 대나무, 꽃, 새 등의 무늬를 새겨놓았다. 봉분의 동쪽에는 높이 200cm, 너비 50cm의 비석이 있는데 앞면에「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 (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뒷면에는「개국533년어돈병월일중건 (開國五三三年於敦病月日重建)」이 새겨져 있다.

중단에는 상석, 망주석 2개, 장명등이 있다. 원래의 상석은 없어지고 1981년 새로 만든 이 상석은 140×90×45cm의 크기이고 기석은 너비 43cm, 높이 36cm로 중간에 문고리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숙종때 세웠다고하는 장명등은 사방으로 4개의 구멍이 뚫려있다. 하단에는 동서양쪽에 높이 250cm의 문신석인이 있는데 얼굴이 새겨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손을 모아쥐고 있는 홀도 선명하다.

임영대군의 신주를 모신사당은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이다. 원래 사당의 위치는 마을에 있었으나 지금부터 약 180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사당은 8작지붕에 3칸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가운데 방에는 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양쪽방에는 제기와 제복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건물은 1967년 1월에 전면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향은 음력으로 정월 21일 낮 12시에 행하며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사당은 크지는 않지만 건물의 짜임새나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추어져 있다. 경기도에서는 2000년4월17일 문화재 자료 98호로 지정하였다.

* 위 치: 의왕시 내손동 산154-1(능안마을)
* 연락처: 내손동 35-1/ 이택(T.019-326-2992)

교통편
4호선 인덕원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백운호수에서 하차
능안마을 방향으로 10분정도 도보

2003-05-31 15:09:11

경기도지정 제36호 의왕의 백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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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행]경기도지정 제36호 의왕의 백운사


경기도지정 제36호 백운사

의왕시 왕곡동 산3번지 백운산 능선에 있는 백운사는 경기도지정 제 36호의 전통사찰로서 고종32년(1895) 청풍김씨종중에서 건평20평 규모의 암자를 세운 것이다.

백운사는 원래 19세기말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백운사에서 3km정도 올라간 지점에 있었으나 고종 31년(1894) 산불로 소실되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었다.

그 후 1916년, 1955년, 1971년, 1999년, 네 차례에 걸쳐 증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그 곳 빈 절터에는 주춧돌과 기석, 그리고 기와조각이 산재하여 있을 뿐이다.

** 교통편 **
4호선 인덕원역에서 60번 버스를 타고 의왕등기소에서 하차,
도보로 30분거리

2003-05-31 15:08:24

하루짜리 값진여행 의왕 백운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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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행]하루짜리 값진여행 의왕 백운호수


하루짜리 값진여행 의왕 백운호수
소재지; 경기 의왕시 학의동

의왕시 학의동에 있는 이 저수지는 제방길이가 253m 담수면적이 60여ha로 1953년 9월 준공을 본 인공호수이다.

백운산과 청계산이 둘러 있고 이들 산계곡의 물이 호수로 흘러든다. 따라서 물이 맑고 주변풍치가 매우 좋다. 호수가 생긴뒤 오랫동안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즐겨찾는 곳이었으나, 아름다운 주위 풍치 때문에 저수지 주변일부가 유원지화 했고, 이뒤로 낚시보다는 행락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유원지에는 음식점과 카페가 고르게 갖춰져 있고 호수에는 유선을 띄우고 있으며 호수주변에는 순환도로가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매우좋다.

승용차; 인덕원 사거리-백운호수
대중교통; * 지하철:인덕원 하차. * 시내버스:안양삼원극장-청계버스종점(25분간 소요), 인덕원 사거리-청계버스 종점(10분간 소요) * 마을버스:인덕원사거리-백운호수(배차시간 30분간격, 15분간 소요)


ㅇ신나는 보트타기
시원하고 탁트인 호수를 보면 절로 마음이 상쾌해진다. 여기까지 와서 보트를 타보지 않고 그냥 갈수는 없지!!

보트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곡예를 하듯 아찔하게 호수 주위를 구경시켜주는 모터보트와 3인승 노젓는 보트 2종류...

바람을 가르는 신나는 모터보트는 5분정도로 약간 짧지만 그 스릴은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기가막히다.

기본적으로 백운호수를 4바퀴정도 도는데 사람이 많지 않을때는 맘씨 좋은 아저씨에게 말만 잘하면 훨씬 더 많이 태워주신다.^^

반면 스릴은 없지만, 한적한 호수를 내 마음가는대로 노를 저어가면서 구경할 수 있는 3인승 보트도 있다. 기본이 1시간이니 연인과 함께 간다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마춤!!

ㅇ 길따라 마음따라, 산책로
백운호수는 비상시에는 인근 지역의 상수도원으로도 제공되기 때문에, 호수가에 댐이 쌓여있고, 그위를 가로지를 수 있다.

백운호수 전체를 걸어서 한 바퀴 돌기에는 너무 먼거리라 차라리 가볍게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이 길을 선호하는 편.

드문드문 피어있는 코스모스도 구경하고, 풀섶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좋아, 꼭 단풍놀이를 가지 않더라도 가을의 한자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미리 도시락을 준비해갔다면 여기서 편안하게 해결해도 좋을 듯.

2003-05-31 15:04:53


우담바라로 유명해진 의왕 청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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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행]우담바라로 유명해진 의왕 청계사


우담바라로 유명해진 청계사

의왕시 청계동 11번지에 있는 청계사는 경기도지정문화재자료 제6호로 해발 618m 청계산 중턱에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충렬왕 10년(1284) 시중 조인규에 의해 중건된 청계사는 중형사원으로 사원규모와 가람(사찰)의 배치는 조선시대 전형으로 보인다.

조선 연산군이 도성내에 있는 사찰을 없애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자 불교측에서는 이 곳을 선종의 본산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안양에서 동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청계사의 현재 사찰 모습은 1955년 이후 역대 주지스님들의 정성스러운 증수로 이루어 졌다.
사찰내에는 조선 숙종 15년(1689)에 세운 청계사 사적기비(174cm×92cm×26cm)가 있고 조선후기의 건물로 보이는 극락보전이 있다. 극락보전 중앙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이 협대하고 있다. 그리고 산신각, 봉향각, 요사, 삼성당, 감로지 등이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 때 창건한 유서깊은 사찰로 청계산 산기슭에 위치해 있는 청계사는 대웅전에 있는 부처님의 오른쪽 이마에 가지런하게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는 보도가 난 후부터 이 우담바라 꽃을 직접 보려는 불교 신도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흔히 불교계에서 천년에 한 번 피는 꽃으로 알려져 있는 우담바라 꽃은 가까이서 보니 솜털모양의 깃털같아 보였다.

입시철을 맞아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님,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사람들...소원은 다양하지만 그 정성만은 하나같이 진지하다.

우담바라 꽃은 한 달 정도 피어있다고 하니, 시간이 있는 사람은 한 번쯤 구경해도 좋을 듯하다. 다만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평일을 이용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아침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다.

소재지;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남쪽 산기슭에 국사봉을 마주 건너다보며 높다랗게 올라앉아 있는 청계사는 전후좌우의 산줄기로 의연한 자태를 보인다.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 충렬왕10년(1284) 시중 조인규의 돈독한 불심으로 크게 중건된 사찰이나 현재의 사원규모와 가람의 배치는 조선시대 전형으로 보인다.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수많은 신도와 등산객들이 찾고 있다.(도지정 문화재자료 6호)

얼마전 우담바라가 꽃피워 교통체증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리고 있다.

청계산<淸溪山>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충렬왕<忠烈王>10년(1284)에 크게 중창되다었고 전한다. 조선 연산군<燕山君>이 도성 내에 있는 사찰을 폐쇄했을 때 봉은사를 대신하여 선종의 본산으로 정해졌던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에 사찰 모습은 1955년 이후 역대 주지 스님들이 중수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전체 규모와 가람의 배치는 조선시대에 틀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

사찰 내에는 극락보전과 칠성각·봉향각·삼성각·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극락보전은 이익공(기둥 중간에는 창방과 도리·장혀 사이에 화반을 놓고, 기둥 머리에서는 두공과 창방에 교차되는 상하 2개와 쇠서로 짜여진 공포 형식)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석재의 가공과 목재의 치목이 정교하며 화려한 단청이 돋보인다.

또한 지붕에는 취두(지붕마루의 양 끝에 얹는 새머리 모양을 새긴 장식 기와. 국가·사회적으로 격식이 높은 건물에 쓰인다)·용두·이수 등 고급의 장식물을 올려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절 아래에는 사찰의 내력을 적은 사적비<寺跡碑>2기가 있는데 이 중 하나는 숙종<肅宗>15년(1689)에 조성된 것이다. 종각에는 숙종 27년에 만들어진 동종<銅鐘>이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당시에는 청계산을 청룡산<靑龍山>이라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6호(경기도)
분류 사찰건축
지정수량 일원
지정일 1983.09.19
소유자 청계사
관리자 청계사


대중교통 인덕원 사거리에서 청계동까지는 시내버스(12, 12-1번)를 이용하거나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마을버스 이용. 청계에서 청계사 입구까지 1시간 간격으로 마을 버스 운행.


보물 의왕청계사동종(경기도 의왕시)
의왕< 儀旺 >청계사< 淸溪寺 >동종< 銅鍾 >은 쌍룡뉴와 몸체에 2줄의 횡대< 橫帶 >가 마련되어 있어 사인비구의 중국종 양식의 수용을 보여주고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청계사소장목판(경기도 의왕시)
청계사에 소장된 18종 466판의 목판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14년(1622)에 판각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흔히 법화경이라고 하는 대승 불교의 경전으로, 부처가 세상에 나온 본뜻을 말한 것이다)을 비롯하여 인조<仁祖>원년(1623)에 판각한 선요<禪要>·도서<都序>·절요<節要>·서장 등 불교 강원의 교과목인 4집 과목의 교재용 목판과『예수십왕생칠경<預修十王生七經>』·『오대진언<五大眞言>』·『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法界聖凡水陸勝會修齋儀軌>』등 불교 의식에 관한 문헌과『계초심학인문·발심수행장<誡初心學人文·發心修行章>』·『몽산법어<蒙山法語>』등이 있다. 이외『천자문<千字文>』과 순조<純祖>31년(1831)에 새긴 『천지팔양신주경판<天地八陽神呪經板>』도 있다. 이들 목판은 모두 청계사에서 판각한 것이다.

2003-05-31 14:57:02

삼성산 정상부에 있는 삼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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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행]삼성산 정상부에 있는 삼막사


삼성산 정상부에 있는 삼막사
소재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석수동 삼성산(해발 481m)8부 능선에는 삼막사(三幕寺)란 천년 고찰이 있다. 이 절은 1천300여년전 신라 문무왕(文武王) 17년(677년)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潤筆) 등 3명의 고승이 암자를 지어 정진하던 곳으로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신라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중건하고 고려 태조가 중수했으며 조선조 무학(無學)대사에 의해 한양 남쪽의 비보 사찰로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침범, 절에 불을 질렀으나 법당 건물은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 하여 남서울의 수찰(首刹)역할을 했다.


천년을 버텨온 고찰답게 각종 유물.유적과 전설,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천불전(千佛殿)이 나타난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 가섭불, 구나함모니불 등 1천명의 부처가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하게 만든다.


천불전 옆에는 지난 1990년 신축된 6명의 부처를 모신 육관음전(六觀音殿)이 있고 그 앞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무학대사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망해루(望海樓)가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2층 누마루 건물인 망해루는 명칭이 말하듯 맑게 갠 날이면 서해바다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0호인 명왕전(冥王殿)은 지장보살을 위시, 명부의 10대왕을 모신 곳으로 조선 고종 17년(1880년) 건립됐다.


특히 천불전 뒤편에 위치한 일명 살래탑이라고 불리는 고려시대 3층 석탑(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112호)이 있다. 이 탑은 승도(僧徒) 김윤후(金允候)가 몽고군 원수인 살리타이를 살해하고 싸움을 이긴 것을 기념해 세운 승적기념탑으로 적당한 크기의 바위 위에 높이 2.55m 크기로 세워졌다.


천불전을 가로질러 삼성산 정상 부근으로 오르다 보면 삼귀자(三龜字)란 암각화가 나타난다. 삼귀자는 조선후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池雲英.1852∼1935년)이 인근 백련암지(白蓮庵址)에 은거할 당시 쓴 글로 바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龜)자를 3가지 형태로 새겨놓았다.


삼귀자를 지나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남녀의 성기 모양을 한 남녀근석(南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을 만나게 된다. 이 바위는 자연 형태의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는데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 두기를

원하고 출산과 일가의 번영, 무병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는 전설 때문에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남근의 길이는 150㎝, 여근의 높이는 110㎝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남근석을 뒤로하면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94호)이라 하여 중후하고 자비스런 인상의 양각화를 만날 수 있다.


매애삼존불은 자연암벽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바위에 부조(浮彫)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주존(主尊)인 치성광여래의 머리는 소발(素髮)에 반달형 계주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 미소짓게 함으로써 중후하고 자비스런 인상을 풍긴다.


이 절에는 어부와 관련한 이색적인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박씨 성을 가진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려고 바다에 나갔다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됐다.


동료는 모두 숨지고 박씨 등 2명이 난파선에 살아 남아 몇날 며칠을 바닷물로 목숨을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난파선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수북이 담겨 있는 놋그릇이 떨어졌고 이들은 쌀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같은 시각 삼막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님이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놓은 불기(佛器)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불공을 드리던 스님은 너무나 죄송해서 다시 공양을 올리며 기도를 계속해야 했다. 이윽고 집에 돌아와 기력을 회복한 박씨는 밥의 출처를 알아보려고 마을 서당에 찾아갔고 훈장으로부터 밥그릇에 삼성산 삼막사란 글씨가 쓰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그릇의 출처는 난파당한 아들이 살아오기만을 여망 하던 박씨의 어머니가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간절히 기도하자 부처님의 법력으로 제단에 있던 밥그릇이 난파선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박씨는 어머니와 절을 찾아가 그릇을 간직하게된 사연을 털어놓게 됐고 이후 매년 소금을 절에 공양하게 됐으며 최근까지도 박씨 후손들의 소금 공양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유적과 유물,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삼막사는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 중턱 풍광이 으뜸인 지점에 위치, 요즘도 일반 신도는 물론 등산객들로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유형문화재 삼막사마애삼존불상(경기도 안양시)
이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감실< 龕室 >을 만들고, 거기에 부조< 浮彫 >한 치성광삼존불< 熾盛光三尊佛 >로 조선후기< 朝鮮後期 >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며, 석굴사원< 石窟寺院 >유구< 遺構 >로 전해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존< 主尊 >인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 >의 머리는 소발< 素髮 >에 반달형 계주< 계珠 >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 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하여 미소짓게 함으로써 중후하고 자비스러운 인상을 풍기게 한다.

목은 밭아서 더욱 어깨가 움츠려 보이고, 신체는 두터운 불의< 佛衣 >에 파묻히고 선각< 線刻 >으로 묘사하여 양감을 느낄 수 없다. 좌우< 左右 >협시< 脇侍 >인 일광< 日光 >·월광보살< 月光菩薩 >은 각각 연화대 위에 합장한 모습인데, 머리에는 소박한 삼산관< 三山冠 >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본존과 비슷하지만 환한 미소 때문에 활력이 넘쳐 보인다.

이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부조< 浮彫 >로 생동감이 넘쳐 조선< 朝鮮 >불상< 佛像 >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의 표현을 생략한 평판적이고 경직된 신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얕은 기법 등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 아래 건륭< 乾隆 >28년(영조< 英祖 >39년, 1763)이라는 명문< 銘文 >이 있어 조선< 朝鮮 >후기< 後期 >불교조각사연구< 佛敎彫刻史硏究 >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칠성신앙< 七星信仰 >과 다산신앙< 多産信仰 >이 결합한 불교< 佛敎 >와 민간신앙< 民間信仰 >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삼막사삼층석탑(경기도 안양시)
삼막사삼층석탑< 三幕寺三層石塔 >은 삼막사 승도< 僧徒 >인 김윤후< 金允候 >가 몽고군< 蒙古軍 >의 원수< 元帥 >인 살리타이< 撤禮塔 >를 살해, 싸움을 이긴 승적< 勝績 >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 기단부< 基壇部 >는 장대석< 長臺石 >4매< 四枚 >로 하층기단< 下層基壇 >하대< 下臺 >를 만들고, 하층기단 면석< 面石 >도 역시 장대석 4매로 되었으며, 갑석< 甲石 >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상층기단< 上層基壇 >면석< 面石 >은 4매석< 四枚石 >으로 짜여 있고, 갑석은 한귀퉁이가 파실< 破失 >되었다. 탑신부< 塔身部 >는 탑신< 塔身 >과 옥개석< 屋蓋石 >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 高麗時代 >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높이는 2.55m이다.


삼막사사적비(경기도 안양시)
삼막사사적비< 三幕寺事蹟碑 >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 地臺石 >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 碑文 >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경기< 朝鮮國京圻 >관악< 冠岳 >산맥갑묘행룡삼성산하< 山脈甲卯行龍三聖山下 >사명삼막좌유향로봉< 寺名三幕左有香爐峰 >"과 건립년대< 建立年代 >를 밝히는 "강희< 康熙 >46년 정해< 丁亥 >"란 명문< 銘文 >이 있어 비석< 碑石 >의 위치는 경기 관악산맥 삼성산 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 朝鮮 >숙종< 肅宗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시도민속자료 삼막사남녀근석(경기도 안양시)
삼막사남녀근석 < 三幕寺男女根石 >은 삼막사< 三幕寺 >칠성각< 七星閣 >옆에 있는 자연 형태에 남근석< 男根石 >과 여근석< 女根石 >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돌에다 정성을 들인다. 속전< 俗傳 >에는 신라< 新羅 >문무왕< 文武王 >17년(677) 원효대사< 元曉大師 >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전부터 이 선바위는 토속신앙< 土俗信仰 >의 대상으로 숭배하였다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 두기를 원하고 출산< 出産 >과 일가< 一家 >의 번영< 繁榮 >, 무병< 無病 >및 수명장수< 壽命長壽 >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며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등 이름 있는 날에는 경향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과 삼색과실< 三色果實 >등을 차려놓고 빈다. 천연 그대로의 돌인 남근의 높이는 150cm, 여근의 높이는 110cm이다. 이러한 성기숭배< 性器崇拜 >사상< 思想 >은 수렵< 狩獵 >, 채집< 採集 >의 풍족과 풍농< 豊農 >, 풍어< 豊漁 >, 다산< 多産 >과 무병장수 신앙과 하나를 이루어, 선사시대< 先史時代 >부터 행해져 왔으며 고려< 高麗 >, 조선시대< 朝鮮時代 >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 巫俗 >, 풍수신앙< 風水信仰 >, 동제< 洞祭 >, 미륵신앙< 彌勒信仰 >속에 어우러져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자료 삼막사명부전(경기도 안양시)
삼성산<三聖山>에 위치한 삼막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그 뒤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하였고 서산대사<西山大師>등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한다. 사내에는 명부전을 비롯하여 육관음전, 망해루, 삼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위시하여 명부의 10대왕을 모신 곳으로 명왕전<冥王殿>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곳 삼막사에서는 명왕전이라고 현판했다.

조선 고종<高宗>17년(1880)에 건립된 명부전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은 2단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맞배지붕에 방풍판(비바람을 막기 위해 처마가 없는, 지붕의 박공 부분에 대는 널판)까지 시설되어 있으나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개수한 것으로 생각된다. 공포는 조선 말기의 일반적인 주심포계(주심포 : 기둥 윗면에만 사각형의 주두를 올려 놓고 그로부터 여러 부재들을 짜 맞춰 올라가면서 처마를 받치는 공포 형식) 형식으로 귀포(처마를 안정되게 받치고 처마의 무게를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 부재들을 짜 맞추는 공포 가운데 모서리에 꾸며진 공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사용되었다.


2003-05-31 14:57:45


수리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사찰 수리사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볼기행]수리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사찰 수리사


수리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사찰
소재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군포시를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는 수리산 거룡봉 남쪽에 위치한 1천5백년의 전통사찰 수리사는 신라시대 진흥왕 18년(558년)에 수도중에 나타난 부처님으로부터 “너는 다음 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은 운산(雲山)스님에 의해 창건돼 ‘도를 닦아 이치를 깨달았다 뜻’의 수리사(修理寺)로 명명된 고찰이다.

절의 기록이나 석물이 남아 있지 않아 역사를 헤아려 볼 길이 없다. 하지만 예부터 견불산수리사(見佛山修理寺)라 하여 수리산의 유일한 고찰로 오래 존속해 온 것이 확실하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부속 암자만 12개를 거느리기도 한 것으로 알려진 수리사는 임진왜란 중에 크게 파손 되었고,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재건했음에도 불구하고 6.25동란을 거치며 또다시 파괴돼 예전의 웅장한 모습을 잃었다.

주춧돌과 절터만이 남아있던 수리사는 1955년 꾸준히 재개된 보구언사업을 통해 현재는 대웅전,나한전,삼성각 등의 법당과 석등2기,3층석탑,입불좌대(立佛座臺)등이 자리잡은 화성 용주사 말사로 군포시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그러나 수리사가 예전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 가는 현재의 경내 주변 수만평에 이르는 절터와 수리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50년대 말 한 스님이 대웅전 뒤편에서 낮잠을 자다가 부처님 호통소리에 놀라 잠을 깻는데 ,그 자리를 파보니 오동나무 상자에 든 금동불상이 나왔으며,그 이전에도 전쟁의 화(禍)를 피해 묻어둔 성보(聖寶)들이 지금도 사찰 주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98년에도 당시 수리사 신도회장이던 송만용 전시원의 부인 문옥순씨가 3번의 선몽(禪夢)을 꾼 끝에 대중전에서 약2백m 떨어진 산 중턱에서 고려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돌부처와 좌대를 찾아내기도 했다.

정부에서도 수리사의 이러한 전통과 역사를 인정,지난 88년 뒤늦게나마 전통사찰 제86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고 금번에 대규모 중창불사를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지난 96년 임기 4년의 주지로 부임해 수리사 옛모습 복원사업을 위해 연임된 성견스님은 “수리사가 이번에 추진하는 중창불사는 단순히 불교계만의 숙원사업이 아니라 27만 군포시민이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문화재로 변모시키는 우리 모두의 사업”이라며,시민들의 적극적인 성원과 협조를 당부했다.

오는 12월8일 수리사 경내에서 진행될 대웅전 기공식에는 한국불교계의 대표인 대한불교 조계종 정대 총무원장이 참석해 군포시의 문화재로 거듭나는 수리사의 발전을 축원하는 등 내외빈,불자,시민 등 3천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향후 수년이 소요될 수리사의 중창불사 계획이 발표되며,유명 연예인들로 구성된 축하사절단의 공연과 달마도 그림으로 유명한 동양화가 담원 김창배 화백의 선화 전시회도 함께 열리게 된다.

수리사는 수리산의 푸른 산림과 산새소리,맑은 공기가 어우러져 수도권에서도 손꼽히는 수도 도량으로 지난 1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민족의 흥망성쇠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도 경허 큰 스님 등 이 시대까지 추앙받는 고승들을 배출하며 수리산을 지켜온 고찰로 현시대에 이르러 커다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군포시에서는 하나의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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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웅전과 종각,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는데 절 주변에 숲이 울창하여 쉼터로도 손색이 없으며 가을이면 절뒤에 숲속에서 밤을 줍는 재미도 쏠쏠하다.

뒷산을 오르면 공군부대가 있고 옆길로 넘어 안양9동 병목안쪽으로 향하는 등산길을 올라서면 능선을 보며 서쪽으로 안산과 멀리 인천앞바다가 보이고 안양으로 내려오기 전 옛 봉화대 돌산을 오르는 것도 좋다.

능선길 중간에 헬기장을 지나 뒤로 돌산이 있다.

승용차 1번 국도 이용, 안양역 에서 병목안 방향으로 2km정도 직진.
대중교통 안양시내버스 10, 11-3, 13, 15-2,, 913번(2~3분간격) 병목안 종점하차. 


제58회 인덕원 비석제(당제) 열려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제58회 인덕원 비석제(당제) 열려

[11/18]

제58회 인덕원 비석제(당제) 열려
[2011-11-18 오후 3:13:00]

안양시 관양2동 인덕원사거리에서 의왕·수원으로 가는 방면 대로변 약 200미터 지점(인덕원 삼성아파트 104동 건너 대로변) 인덕원 상가 앞에 빛바랜 비석 2개가 나란히 있다.

비석 앞에서 제사복장을 차려 입은 마을사람들이 술과 돼지머리, 팥시루떡 등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비석에 고사를 지내는 의식을 갖고 있다. 치성을 드리며 비석에 제를 올리던 날, 도심 속 여간해 보기 드문 진풍경이 연출되자 이를 목격한 행인 및 지나가는 차량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매년 음력 시월 관양동(冠陽洞) 인덕원마을에서 마을의 흥망을 좌우하는 영험한 비석(碑石)으로 알려진 비(碑) 앞에서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리는 마을제사를 당제 또는 현감제라고도 한다.

마을의 길흉을 좌우하는 비석으로도 알려진 비석의 주인공은 1701년(숙종 27년, 5월)과천 현감으로 부임한 송정명(宋正明)과 1866년(고종 3년, 12월) 과천현감으로 부임한 이태응(李泰應)으로 마을에서는 업적을 영원히 기억하자는 취지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다.

처음에는 이태응불망비(1869년 3월 건립)만 있었으나 해방 후 이 비석이 외롭게 보인다하여 주변에 있던 송정명불망비(1704년 11월 건립)를 옮겨왔다고 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탕, 팥시루 등을 마련하고, 제의 절차는 술을 올리고 초헌, 아헌, 종헌 순으로 제가 끝나면 제관 중 한명이 축문을 받아 읽고 이를 태워 하늘로 보내는 소지(燒紙)의식과 함께 음복행사로 의식은 마무리된다.

12시부터 농악놀이가 진행되는 가운데 11월 4일(금) 오후 2시에 개최된 ‘제58회 현감비 당제’는 인덕원마을회(회장 김웅준, 前시의원)가 해마다 주최하여 전통의 맥을 계승해 오고 있다.

안양문화원의 후원과 함께, 최종찬 한나라당동안갑당원협의회장, 심재민시의원, 김주석시의원, 관양2동 주민자치팀장 등 관계자, 김재훈 관양2동 前 체육회회장, 부녀회장 등 사회단체장, 김부창 인덕원마을회초대회장 및 이종찬 청년회회장 등 마을회회원, 시립인덕원어린이집소속 아동, 학부모 및 교사, 안양시문화예술과(문화유산팀)관계자, 시민 등 100여명이 대거 참석하여 성황 속에 개최됐다.

비석의 주변에는 시립인덕원어린이집 원생아동들이 가족에게 바라는 바 소박한 소원을 적은 ‘우리의 소원’쪽지가 전시되어 있어, 비석이 그냥 보통의 추모용 비석과는 좀 다른 소원을 비는 비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시사해 준다.

원생 아동들은 비석에게 원하는바 소원을 빌어 가슴이 후련하였으며, 인덕원마을회 김웅준회장이 선물로 증정한 학용품 등 마을제 참석기념품을 받아 기분이 여간 좋아 덩달아 신이 나기도 했다.

행사 후에는 뒤풀이 형식으로 다목적복지회관에서 떡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비석제 의미를 되새기고 마을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안양지역 여타 마을제는 인식과 참여부족 등의 사유로 사라질 위기 속에서 명맥을 어렵사리 이어오고 있는 데 반해, 인덕원마을의 마을제사는 마을회 김웅준회장 및 회원을 중심으로 미취학 아동, 학생, 청년, 성인, 노인회 회원 등 어르신, 상인 등 지역주민, 일반시민 등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균형감 있게 골고루 참석하여 비교적 모범을 보이고 있다.

오늘의 행사가 열린 인덕원은 과거 마을사람들이 덕화를 베푸는 고장의 의미로 인덕(仁德)이라 칭하다가 공용(公用)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원(院)을 설치하면서 인덕원(仁德院)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인덕원은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 이순신장군이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제22대 정조임금의 수원 능행로(陵幸路)로 알려진 곳이다. 안양광역신문 조성현 기자/aknews@paran.com

우리고을의 민속신앙를 찾아서...‘석수동 쌍산신제가 열리던 날’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우리고을의 민속신앙를 찾아서...‘석수동 쌍산신제가 열리던 날’

[11/10]조성현

우리고을의 민속신앙를 찾아서...‘석수동 쌍산신제가 열리던 날’

안양예술공원초입의 석수동지역에서 매월 음력 10월 3일 고사음식과 맑은술 등 제물을 산신령에게 받치며 마을의 안녕과 평화 등을 축원하는 산신제는 할아버지산 산신과 할머니산 산신께 동일한 날짜, 동일한 시간에 개최된다. 마을제사를 두개마을의 2개소 제단에서 동시에 거행되어 일명 ‘석수동쌍산신제’로 칭하기도 한다. 약 300여년간의 역사성을 자랑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명맥을 이어온 우리고을 전통 문화행사로서 안양지역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이다.

“산이 주는 교훈으로 알차고 복된 나날이 되길 산신령께 기원 드리옵니다.”
2011년 10월 29일(토) 오후 5시 삼성산자락 할아버지산 산신제단에 정성스레 준비한 고사음식을 올리고, 제단 아래 소재한 삼성산무량사 주지스님이 격식을 갖춘 전통예법에 따라 엄숙하고 경건한 가운데 마을사람들과 함께 산신께 축원 드리며 기도하고 있다. 안양예술공원 초입의 구, 유유부지앞 삼성천을 경계삼아 두개마을로 나눠 매년 음력 시월 초사흘이면 석수1동 할아버지산 제단(삼성산자락 무량사 뒤 산신당)과 안양2동 할머니산 제단(경수산업도로변 별장가든 뒤편 약수터 위)에서는 마을과 개인의 평화와 안녕 등을 염원하는 산고사를 동시간대에 동시에 개최해오고 있다. 산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애착과 정성이 산을 신성시하고 산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마음에서 예로부터 산신제를 치러왔다. 제물로는 통북어, 시루떡, 백설기, 돼지머리, 대추, 밤, 사과, 배, 맑은술 등을 산신께 공양하고 삼배, 헌주 등으로 제를 올리며 축문낭독과 함께 소원을 비는 소지(燒紙)행사 등으로 의식을 치룬다.
두개마을에서 동시에 산신께(할아버지산 산신& 할머니산 산신) 제를 올리는 특이한 풍습을 일명 ‘석수동 쌍산신제’라고도 하며, 정체성을 담아 약 300여 년간 명맥을 이어온 역사성과 전통이 있는 지역 문화유산이다.
과거에는 산신제를 치루기전 가가호호 방문 고사지낼 재물을 추렴하러 다니는 ‘선당주’와 추렴한 자금으로 술을 빚고 고사음식을 준비하는 ‘앉은당주( 또는 안당주)’를 행사개최 3일전 선정하여 행사에 만전을 기했다.
어려운 여건임에도 오늘날까지 그나마 명맥을 이어 석수동 대동산신제가 개최되기까지는 산신제 대동회장들 및 회원들의 숨은 노고가 컸다. 고사비용을 추렴하여 고사떡, 고사머리 등 온갖 제물을 준비하고 행사개최 뒤풀이 장소섭외, 제관선임, 할머니산(또는 할아버지산)산신제 대동회장과 고사시간 조율, 초대장발송, 문자 및 전화로 회원들 참여 독려, 제물을 시간에 맞춰 산중턱 제단까지 운반, 뒤풀이장소에서 음식을 접대하는 서빙 등 많은 손길과 정성이 필요하다.
금번 2011 할머니산 산신제는 유원지상인연합회원 및 청년회원, 이성우씨 등 마을주민들의 주체적 참여와 함께 이종걸 국회의원, 정용대 한나라당만안지구당운영위원장 등 외빈들이 참여하여 자리를 빛내주었고, 석수동 할아버지산 산신제는 석수1동 최영인동장 및 아랫마을과 웃마을의 통장(석수1동 10통, 15통, 16통), 부녀회원이 연대 참여하여 산신제가 원만히 봉행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산 산신제는 삼성산 무량사에서, 할머니산산신제는 안양예술공원 길성이식당에서 뒤풀이 형식(옛날에는 통상 앉은당주집 마당에서 멍석을 깔고 함)으로 떡 등 고사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산신제개최 의미를 되새기고 마을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뒤풀이 장소에서 만난 할아버지산 산신제 대동회 감사인 유만석씨는 “시흥군 시절 과거 50년전만 하더라도 석수2동(화창동, 꽃챙이), 석수3동(충훈부)주민들이 안양예술공원초입 석수마을(구, 유유부지 주변)의 할아버지산 산신제를 대거 찾아와 앉은당주집 앞(마을입구 보호수인 회나무 옆)은 대성황 속에 고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렬이 약 1㎞나 되는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소회를 털어놓으며 아련한 추억과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그 옛날 축제도 그다지 많지 않고 항상 부족했던 시절, 산신제는 마을동민 대부분이 참여하여 마을과 개인의 평안 등을 염원하고 덧붙여 대동화합을 꽤하는 축제인 셈이다. 하지만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인식 및 주민 참여부족 등의 사유로 안양의 마을제사는 대부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고 명맥을 이어오는 마을제는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불과 몇 개 안되는 점 안타깝다.
할아버지산 산신제대동회 김영순(金英順)대동회장은 우리고을 마을제인 석수동 산신제는 오랜 역사성을 자랑하는 전통이 있는 지역 문화행사이나 참여부족 등의 사유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실정이라고 밝히며, 안양지역 조상들이 물려준 산신제의 명맥이 계승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성원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김무웅(金茂雄) 할머니산 대동산신제 대동회장은 “그 옛날 석수동지역 대다수의 전 동민이 참여하여 대동화합과 결속을 다졌던 석수동대동산신제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치 있는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이다.”라고 피력하며, 마을제의 원형을 살리고 발전시켜 온 동민의 참여 및 소통과 함께 대동화합과 단결을 다지는 주민 축제의 장으로 승화·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산신제: 산제 또는 산고사라하며, 마을의 수호신이라 믿는 산신에게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마을제사(洞祭)의식을 말한다.